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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동화 사이, 박영준(박디)

토끼와 행성, 나무와 별, 노란 모자를 쓴 꿀벌과 하얀 달빛이 한 장의 그림에 어우러져 있다. 일러스트 작가 박영준의 작품 세계에서는 현실에서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 서로 마주 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어김없이 한 남자가 등장한다. 커다란 배낭을 매고 동화 속 세계를 여행하는 이 남자는 바로 박영준 작가 자신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것들에서 영감을 받아요. 그래서 그림 속 주인공은 대부분 저 자신이죠. 기분이 어땠는지, 오후의 하늘이 어떤 색깔이었는지, 누굴 만났는지, 어떤 나무를 봤는지 등등 평소에 느낀 사소한 것을 모두 반영해요. 무언가를 목격하고 느낀 감정을 모아 하나의 그림에 담는 작업이죠. 현실에서 느끼거나 만지고, 본 것들이 하나의 그림에 모이면 동화 같은 세상을 이뤄요.”

박디(Park.D)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그는 주로 콜라주 기법으로 완성한 그림을 선보인다. 소소한 생각과 감정의 조각을 한데 모아 조화시키는 그의 작품 세계와 갖가지 이미지를 이어 붙여 새로운 형태를 표현하는 콜라주 기법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많다.

“콜라주에 쓸 소재들을 찾기 전에 순간순간 드는 생각을 작업 노트에 적어둬요.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잡다한 생각들이 그림을 그릴 때는 훌륭한 재료가 되죠. 혼자 버스를 타고 가다 창밖을 내다보거나 아침에 일어나 샤워할 때, 작업실에 앉아 재즈 음악을 들을 때 드는 생각이요. 가끔씩 괜히 멍해지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럴 때 그림에 넣고 싶은 소재가 자주 떠올라요.”

 

박영준은 대학에서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세상을 마음껏 그려보기로 결심하고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취업과 스펙 쌓기에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불안한 현실과 싸우는 대신, 소박하지만 따뜻하고 밝은 청춘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작지만 이미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을 관찰해 그려내는 그의 명랑한 시각 덕분인지 박영준의 그림은 볼수록 유쾌한 기분을 안긴다.

“처음 시작할 땐 패기 넘치는 복학생 마인드로 달려들었죠.(웃음) 뭐든 그릴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별다른 직업 없이 사회에 던져진 게 가끔은 외롭고 힘들기도 했지만, 나름 괜찮았어요. 세상에는 온통 그리고 싶은 게 가득하니까요.”

박영준 작가의 공간에서 발견한 것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브로콜리 너마저와 언니네 이발관의 LP 앨범, 지우개 부스러기를 치울 때 쓰는 책상용 빗자루, 자주 들르는 양재꽃시장에서 데려온 이름 모를 다육식물, 여기저기서 사 모은 가양각색의 연필들, 그림보다 글이 더 많은 2016년의 작업 노트,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 여행기 .

박영준 작가의 공간에서 발견한 것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브로콜리 너마저와 언니네 이발관의 LP 앨범, 지우개 부스러기를 치울 때 쓰는 책상용 빗자루, 자주 들르는 양재꽃시장에서 데려온 이름 모를 다육식물, 여기저기서 사 모은 각양각색의 연필들, 그림보다 글이 더 많은 2016년의 작업 노트,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 여행기 <안녕 다정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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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이야기를 그리다, 이누리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 감상의 여지 없이 뚜렷하고 딱딱한 풍경에 눈과 마음이 피로해질 때가 있다. TV나 길 위에서, 혹은 각종 매체에서 마주치는 그림과 사진은 대부분 시각적으로 강한 자극을 주기 위해 온통 요란한 것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잡지와 광고 분야에서 활동하는 일러스트 작가 이누리의 작품을 보노라면 온통 자극적인 것에 지친 감성과 시각이 치유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연필 선으로 촘촘히 채워 넣은 그녀의 그림에서는 자그마한 풀잎들이 살포시 흔들리고, 사색하는 여자의 눈빛도 촉촉이 살아 있다.

이누리는 디지털 장비와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대신, 새하얀 도화지를 펼쳐두고 연필로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구도를 완성한다. 연필 특유의 질감을 통해 그녀만이 가진 그림의 결과 정서가 풍성하게 표현된다.

“세밀하고 사실적인 그림을 주로 그려요. 먼저 수작업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완성하고, 간단한 채색과 보정 단계에서 컴퓨터의 힘을 빌리죠.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그림을 좋아해요. 의뢰를 받아 작업할 땐 대부분 주제가 정해져 있어 그릴 수 있는 소재가 한정되지만, 개인 작업을 할 땐 달라요. 사적인 감정을 펼치거든요. 제 속에 꽁꽁 감춰둔 비밀 같은 것들이요. 그러다보니 여자의 일상, 여자의 감정이 표현될 때가 많죠.”

이누리 작가의 작품에는 그녀가 20대 초반에 살았던 도시 파리를 그리워하는 마음 또한 곳곳에 묻어 있다. 그림 한구석에 자그마하게 에펠탑을 그려 넣는가 하면, 파리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기도 하고, 자주 먹던 크루아상이 잔뜩 올려진 식탁이 등장하기도 한다. 은은하고 빈티지한 색감 역시 유럽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요소다. 몇 시간을 공들인 수작업을 고집하는 작품 세계와 옛날의 흔적을 고스란히 껴안은 프랑스의 감성이 어딘가 닮은 듯하다.

“감수성이 가장 풍부하던 시절을 파리에서 보냈어요. 오래되고 낡은 것을 없애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간직한 프랑스의 풍경이 좋아요. 제 작품도 그곳의 풍경 같으면 좋겠어요. 유행에 따라 변하거나 퇴색하지 않고, 세월의 흔적을 근사하게 입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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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리 작가의 공간에서 발견한 것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자수와 드로잉을 혼합한 기법으로 작업하는 프랑스 작가의 작품집, 기하학적 패턴을 채워나가는 독특한 컬러링 북, 직접 작업한 뮤지션 커피소년의 앨범 커버, 늘 가지고 다니는 똑딱이 카메라, 지난겨울 찾아간 샌프란시스코의 한 기념품 가게에서 구입한 스노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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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핑크빛 세계, 신모래 

얼마 전 디뮤지엄에서 운영하는 프로젝트 전시 공간인 ‘구슬모아당구장’에서 일러스트 작가 신모래의 전시 <ㅈ.gif-No Sequence, Just Happening>展이 열렸다. 공간이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어 있고, 어느 구석에선가 몽롱한 사운드가 흘러나온다. 희한한 기분이 든다. 분명 사랑스러운 핑크색이 가득한데, 작품을 감상하면 할수록 왠지 쓸쓸한 감정이 밀려오고 마음이 먹먹해진다. 시각적 이미지와 상반되는 정서가 감도는 독특한 작품 세계다.

“이토록 따뜻하고 귀여운 색이 슬프고 우울한 스케치에 입혀지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에 처음 써보게 됐어요. 공허한 감정과 고독한 기억이라는 주된 소재의 분위기를 조금 환기시키는 효과를 주고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막상 핑크색을 넣어보니 의외로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묘하게 증폭되는 것 같더군요. 과하지 않고 덤덤하게요.”

신모래는 주로 영화와 책, 음악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감상법은 좀 독특하다. “영화는 내용보다는 특정 장면을 잘 기억하는 편이에요. 감독의 시각, 영화의 색감과 정서에 집중하죠. 책은 아주 좋아하는데, 특히 시집을 주로 읽어요. 음악은 멜로디보다는 노랫말에 더 귀 기울이는 편이고요. 시 구절이나 노래 속 문장이 작품을 구상하는 결정적인 모티프가 되기도 하죠.” 그녀는 회화 작가로도 활동한 미국 출신의 감독 줄리언 슈나벨의 영화들과 도어스나 사이먼 앤 가펑클의 음악, 그리고 시인 이수명의 글을 좋아한다.

MORAE(@shinmorae_)님이 게시한 사진님,

신모래가 그린 대부분의 작품에 등장하는 무표정한 소년과 소녀는 힘없이 앉아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한다. 슬픔도 기쁨도 담기지 않는 텅 빈 눈빛으로 고요하게 멈춰 있다.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각도로 그들이 사는 시간을 예측해볼 뿐이다. “소년과 소녀는 무언가를 기다려요. 그런데 그 시간이 너무 길어 이제 와 포기할 수도, 더 기다릴 수도 없는 터라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내죠.” 작품 속 인물들의 얼굴에서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특이하게도 괄호가 그려져 있다.

“눈을 그리거나 입을 움직이면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요. 직접적인 감정 전달은 피하고 싶었어요. 인물들의 눈에 괄호를 그려 넣으면 그 안에 담긴 모호한 감정을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세한 메시지를 깨닫게 하는 작품보다는, 마음에 전해지는 정서를 그대로 천천히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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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모래 작가의 공간에서 발견한 것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인 이수명의 시집, 영화 <미 앤 유 앤 에브리원>에 등장한 가장 좋아하는 대사 ‘You think you deserve that pain, but you don’t’가 새겨진 연필, 좋아하는 문장을 입력해 출력하는 라벨 인쇄기, 옛날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67편이나 수록된 DVD, 아티스트인 친구의 작품 중 하나인 귀여운 모양의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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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머금은 드로잉, 이규태

소복소복 눈 내리는 버스 정류장, 파릇한 가로수가 빽빽이 늘어선 서울의 좁은 골목, 귀여운 고양이들이 나른하게 누워 있는 어느 한적한 시골길. 이규태 작가의 일러스트 작품에는 누구든 어디선가 한번은 마주쳤을 법한 평범한 일상의 장면이 담겨 있다. 오로지 색연필만으로 그린 그림들인데, 작가의 눈앞에 펼쳐졌던 풍경을 그대로 옮겨온 듯 순간의 감정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따뜻하고 평온한 색감과 색연필의 보드라운 질감, 섬세하게 표현된 햇빛과 그늘 등 다채로운 요소가 모여 이토록 매력적인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곁에 두고 오래 감상하고 싶은 그림들이다.

“모두 제 개인적인 이야기들이에요. 오독오독 사료를 먹는 친구네 고양이의 뒷모습, 친구들과 떠난 여행에서 마주친 광경이나 서울의 골목을 걷다 목격한 장면처럼 제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그리죠.”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국내 구석구석을 다니며 그림에 담는가 하면,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경을 그리기도 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인도. 벌써 세 번이나 다녀온 곳이지만 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감상이 드는 경치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인도는 가만히 앉아 있기 좋은 곳이에요. 서울보다 한결 느린 삶의 템포도 마음에 들어요. 차갑거나 분주하지 않죠. 큰 강과 바다, 산, 사막, 숲과 밀림이 있는 거대한 자연의 모습부터 대도시의 풍경까지 다 마주칠 수 있는 나라예요.”

Lee kyutae(@kokooma_)님이 게시한 사진님,

이규태의 그림 속 시간은 어쩐지 현실보다 조금 느리게 흐를 것만 같다. 멀찍이 한 발짝 떨어져 포착한 평화로운 풍경은 한없이 정적이고 잔잔하다. 그의 그림에는 맑은 햇빛의 색감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마치 적절한 온도를 설정해두고 그린 그림들처럼 하나같이 포근하고 따스하다.

“빛에 의한 현상에 관심이 많아요. 빛에 의해 만들어지는 색감과 풍광에 집중하죠. 물에 반사되면 어떻게 반짝이고, 물체에 부딪히면 어떤 색깔로 변하는지 자세히 관찰해요. 제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건 자연의 색이에요.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자연이 내는 색과 똑같이 그릴 수는 없죠. 최대한 자연을 닮은 색감을 내려 노력하는 것이 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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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 작가의 공간에서 발견한 것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늘 가지고 다니는 드로잉 작업 노트, 드로잉할 때 사용하고 남아 모아둔 몽당색연필, 만화 매거진 <쾅>에서 함께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 속 캐릭터 배지, 헌책방에서 발견한 오래된 그림책들, 작업하면서 음악을 들을 때 사용하는 헤드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