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의 느린 시간

시칠리아의 해변 곳곳에는 야외에 설치된 샤워 부스가 있다. 물놀이를 즐기고 물가에 나온 사람들의 모습. 시칠리아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 라구사(Ragusa).

괴테의 작품 <이탈리아 기행>에는 시칠리아(Sicilia) 섬을 표현한 한 구절이 등장한다. ‘시칠리아가 없었다면 이탈리아는 내 영혼에 아무런 잔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지중해의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시칠리아는 기원전 8세기 페니키아인이 처음 발견했다. 그 후에는 그리스가 통치했고, 뒤이어 로마와 아랍, 노르만, 프랑스, 스페인이 차례로 정착해 다양한 문명을 일궜다. 이토록 파란만장한 역사가 남긴 흔적은 훗날 괴테의 영혼에 특별한 잔상을 남긴 아름다운 유산이 됐다.

그리스 신화의 유적지부터 이탈리아의 선명한 색채로 물든 구시가지, 화려한 바로크 예술과 스페인 고딕 양식이 어우러진 건축물까지 다채로운 풍경이 한데 모여 있다. 오랜 세월 섞인 여러 문화가 뿌리내리며 호화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편, 시칠리아 섬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고요하고 느리게 흐른다. 시간이 멈춘 듯한없이 나른한 정적으로 가득 찬 나날이 지난다.

시칠리아에서 태어난 서른살의 사진가 시모네 라엘리(Simone Raeli)는 이렇게 잔잔한 시칠리아의 풍경을 담은 사진 시리즈 ‘O Sole Mio’를 완성했다. 약 1년 동안 섬을 여행하며 주민들이 만드는 평범한 삶의 순간을 포착한 그의 작품에는 지중해의 파도처럼 한적히 흐르는 시칠리아의 시간이 그대로 스며들어 있다.

사진 시리즈 ‘O Sole Mio’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작업인가? 나는 시칠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육지로 떠나 사진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4년에는 5년 만에 시칠리아로 돌아가 이 작업을 진행했다. 화려한 휴양지 분위기의 시칠리아가 아닌 자연스러운 정취가 느껴지는 시칠리아를 사진에 담고 싶었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시칠리아가 당신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지 궁금하다. 작가의 시각으로 다시금 바라본 그곳의 풍경은 마음속에 한층 특별하게 다가왔다. 시야를 꽉 채우는 광활한 자연과 시칠리아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이 어우러진 모습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졌다. 시칠리아는 다양한 얼굴을 가진 섬이다. 생각보다 위험한 사건 사고가 꽤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평화롭고 깨끗한 해변을 바라보다 보면 모든 부정적인 생각이 금세 잊혀질 만큼 근사한 감상이 든다. 내륙 지역 또한 아름답다. 구시가지인 라구사 이블라(Ragusa Ibla)나 그리스 콘코르디아 신전이 있는 아그리젠토(Agrigento) 등 여러 구역에는 고대 문화가 생생히 남아 있는 한편, 카타니아(Catania)나 팔레르모(Palermo)처럼 현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대도시도 있다. 알수록 재미있는 섬이다.

물안경을 쓰고 바다에 들어가 잠수하기를 즐기는 시칠리아 소년. 산조반니 리 쿠티(San Giovanni Li Cuti).

고향의 익숙한 풍경을 새로운 시각으로 담아냈다니 흥미롭다. 이 특별한 작품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20년 넘게 시칠리아에서 살았다. 행복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사춘기가 지나고 성인이 되면서는 섬에 사는 것이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도시로 나가고 싶은 꿈은 커져갔고, 그럴수록 점점 더 외로워졌다. 근사해 보이기만 했던 시칠리아의 바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마 시칠리아에 사는 젊은 사람들은 내가 겪은 감정에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1년간의 작업이 끝날 때쯤에는 한창 느꼈던 고독하고 혼란스럽던 마음이 깨끗이 정화됐다. 새로운 영감으로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작업은 한 젊은이로서, 작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사진 속 요소들이 이루는 대칭과 균형 잡힌 구도가 신선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무드 또한 돋보인다. 작업의 주제를 구상할 때는 꽤 복잡하게 여러 가지를 고려하는 편인데,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그 모든 생각을 덜어내고 깔끔한 시각을 유지하려 애쓰는 편이다. 대칭과 균형으로 채워진 사진은 편안한 감상을 안긴다는 점이 좋다.

시칠리아에서 보낸 1년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언제였나? 시칠리아 서쪽 해안에서 8km 정도 거리에 있는 작은 섬인 파비냐나(Favignana)에서머물던 시간을 잊을 수 없다. 하루는 한밤중에 숙소에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달리다가 텅 빈 길 한가운데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마저 파묻힐 정도로 깊은 정적이 흘렀는데 동시에 밤하늘에는 거대한 은하수가 펼쳐졌다. 그 순간만큼은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순수한 적막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보트에 걸터앉아 일광욕을 하는 시칠리아의 여자들. 자르디니 낙소스(Giardini Naxos)의 해변.

해변에서 결혼식을 올린 커플이 지중해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시라쿠사(Siracusa)의 해변.

프라이빗 비치의 선베드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소년의 두 손. 타오르미나(Taormina)의 해변.

커다란 수건으로 강한 햇빛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하는 시칠리아 소녀. 라구사.

당신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것이 무엇인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연출한 영화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의 시각을 매우 좋아한다. 미국의 사진가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스티븐 쇼어(Stephen Shore)의 작품도 자주 감상한다. 하지만 이번 작업의 주된 영감은 내 할아버지에게 받았다. 어릴 적 시칠리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쌓은 추억을 자주 떠올렸다.

앞으로는 어떤 작업을 진행할 계획인가? 이번에는 북쪽의 섬으로 떠난다. 아일랜드를 다음 여행지로 정했다. 이후에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더욱 다양한 지역의 일상을 찍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늘 여행하듯이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진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