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카레 @신흥시장
정복자, 김대환(코스모스 식당)
“전부터 있던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잘 어우러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에요. 원래 있던 삶의 방식을 고려하지 않은 섣부른 시장 재생 프로젝트는 오히려 분위기만 어지럽힐 뿐이죠. 투기가 심해지면 상인들이 내몰리는 경우도 생기고, 또 터무니없이 올라버린 월세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접근하기 어려워지고요. 아직 신흥시장 안쪽은 괜찮은데, 해방촌이 뜨면서 바로 앞 골목까지도 영향을 받게 됐어요.” 해방촌오거리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나오는 좁은 콘크리트 계단.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인 이 틈새가 바로 신흥시장 입구다. 시장은 먼지가 쌓인 슬레이트 지붕이나 빛바랜 벽돌처럼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코스모스 식당’은 지난 2월 신흥시장 맨 안쪽에 문을 연 가정식 카레 가게다.
이곳을 운영하는 김대환은 그의 어머니 정복자와 함께 작고 편한 가게를 열고 싶어 신흥시장을 찾아왔다. “작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가 다른 식당에서 일을 하셨는데, 그게 마음이 불편했어요. 돈을 많이 못 벌더라도 작은 가게에서 어머니랑 오순도순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가게예요. 전에는 이 동네에 미싱 공장이 많았대요. 어머니가 젊으실 때 이 동네에서 산 적이 있다고 하시면서 반가워하셨어요.” 김대환의 아이디어에 어머니의 손맛을 더한 코스모스의 메뉴는 조금씩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신흥시장의 대표적인 청년 가게로 자리 잡았다. 오기 쉽지 않은 시장 깊숙한 위치까지 먼 데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만나면 유난히 더 반갑고 뿌듯하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신흥시장 내에서 공방이나 비스트로, 술집을 운영하는 젊은 세대끼리 모이는 커뮤니티도 만들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상인들끼리 시장 앞 빈 광장에 모여 조그마한 축제 같은 것도 열어보고 싶어요. 공예품이나 음식을 팔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요. 물론 아직까지는 좀 낡고 어두워 평일엔 찾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앞으로는 흥미진진한 일이 더 많아질 거라 믿어요.”
디자이너의 특별한 작업실 @서울중앙시장 신당창작아케이드
이준아(FABLOOP)
지난 4월 신당창작아케이드에 새로 입주해 한창 적응해가고 있는 이준아는 다양한 컬러와 패턴의 니트 디자인을 선보이는 작가다. 그녀는 미국의 패션 스쿨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후 우연한 기회에 이곳에서 젊은 작가들의 공간을 지원한다는 걸 알게 됐고, 작업 심사를 거쳐 입주 작가로 선발됐다. “여기 들어오기 전에는 냉난방이 전혀 안 되는 다락방을 작업실로 썼거든요. 작년 여름에는 폭염 때문에 고생이 심했어요. 당시엔 얼마나 간절했던지, 심사 인터뷰 때 포트폴리오를 보여주며 작업을 설명하던 도중에 단 하루라도 에어컨이 있는 곳에서 작업해보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니까요.”
지상과 지하, 전통시장과 창작 아케이드로 나뉘어 여러 세대의 문화가 공존하는 이곳이 처음부터 편하지는 않았다.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에 익숙한 젊은 세대 이준아에게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곳곳에 걸려 있는 가게들과 이리저리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이 익숙한 풍경일 리 없었다. “처음엔 좀 당황했죠. 난생처음 보는 것들도 많았으니까요. 여긴 서울에서 손꼽히는 큰 시장이고 정말 없는 게 없거든요. 또 상인들은 여기서 아주 오랫동안 생활한 터줏대감 같은 사람들인데, 갑자기 낯선 젊은이들이 오가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하지만 운영재단에서 상인들과 관계가 원활해지도록 중간자 역할을 잘 맡아주어서 금세 적응할 수 있었어요. 조만간 시장 미화 프로젝트가 열리면 저도 참가해볼 생각이에요.”
요즘 들어서는 서울중앙시장 뒷길로 늘어선 가게들을 다니며 작품의 영감을 받고, 때마다 필요한 재료를 구하러 다니기도 한다는 이준아는 바로 옆 작업실에 입주한 섬유 디자이너와 함께 연말 전시를 한창 계획 중이다. 조만간 열릴 공예트렌드페어(KCDF)에도 참가할 예정이다. “한국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 막막하기만 했는데, 몇 달 만에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면서 새로운 일들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올해 남은 시간도 열심히 작업해서 심사 잘 받고, 내년에도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볼 생각이에요.”
충무로 펑크족 @인현시장
김민형(MK Leather Work)
어린 시절부터 펑크를 좋아해 라이브 공연을 보러 다니던 때, 문득 펑크 뮤지션을 위한 가죽 액세서리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가죽공예를 시작한 작가 김민형. 7년 전 첫 작업을 시작한 그는 개인 작업실이자 가죽 클래스 스튜디오인 ‘엠케이 레더 워크’를 운영하며 유연한 곡선 형태의 가죽 소품을 만든다. 그의 작업실은 인현시장 끝 충무로 인쇄 골목과 맞닿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개발되지 않은 옛 모습의 골목이 어딘가 친숙하게 느껴져서 이곳을 선택했어요. 가죽공예 클래스를 들으러 찾아오는 이들에게 재미있는 풍경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진 오래된 물건들을 좋아하는데, 이 동네는 그런 제 취향에 꼭 맞아요.”
스튜디오가 깊숙한 뒷골목에 위치했는데도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수강생들이 적잖다. 가죽공예를 배우며 시간을 보내는 동시에 클래스 전후로 전통 재래시장의 독특한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김민형의 직장인 친구들이 시장에서 저녁 겸 술자리를 즐기기 위해 퇴근 후 들르는 날도 잦다고 한다. “여기 숨어 있는 맛집이 아주 많거든요. ‘영심이네 김치찌개’에 가면 꼭 달걀말이를 추가로 주문해야 해요. ‘장곰식당’에서는 1인분 감자탕도 먹을 수 있으니까 혼밥 해도 좋죠. ‘서대문곱창’은 인현시장 입구에 있는데 저녁 시간이면 자리가 꽉 들어차요. 골목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동네 맛집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요.”
김민형의 지인을 비롯해 수강생들,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 찾아오는 더 많은 사람들까지 그가 시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주변의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던 인쇄 골목 상인들과도 사이좋은 이웃이 되어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하루를 시작한다. “골목 너비가 1미터 조금 넘는 좁디좁은 곳이니까 자주 마주치고 얼굴을 볼 수밖에 없죠. 그래서 상인들끼리 더 가깝게 지내는 것 같아요. 언젠가 이곳을 떠나면 인현시장에서 보낸 시간은 늘 즐거웠다고 기억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