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회든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 해결책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힘겹게 유리 천장을 뚫고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힘을 믿습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전망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행동이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니까요.

 

박영선 의원

언론과 정치라는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속에서 여성이라 느꼈을 자각이나 깨달음도 있었죠? 여성에 대한 편견과 무시가 지금보다 더 심하던 때, ‘여자라서 저래’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 반항과 오기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입사 초년생 시절에는 어느 선배가 “박영선, 회사를 몇 년이나 다닐 생각이지?” 하고 묻더군요. 그런 걸 정하고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있나 생각하던 찰나 “도대체 여자들은 말이야. 믿음직스럽지가 못해서··· 일하면서 퇴근할 생각만 하는지 뭘 빼먹기 일쑤고 특히 숫자에 약해. 조직적이지 못하다고 할까? 보아하니 쉽게 그만두지는 않을 듯한데 욕 안 먹으려면 사고를 좀 조직적으로 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응? 그리고 여자이기 때문에 저런다는 얘기 안 듣도록 출근부터 퇴근까지 빈틈 없도록 하고···.”

(잠시 정적) 아··· 듣기 힘드네요. 그렇죠?(웃음) 그 선배 말에 이렇다 할 대꾸를 못 했지만 아주 불쾌했죠.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얼마 후 하필이면 제가 기사에 숫자를 잘못 표기하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증시 개방 한 달 동안 국내 주식 투자를 위해 들어온 외국 자금은 약 4만 달러, 우리 돈으로 3천억원을 넘어섰다’는 기사였습니다. 3천억원이라면 4억 달러로 표기했어야 하는데, 시청자들이 피부로 느끼도록 수치를 전달하기 위해 달러와 원화를 모두 표기하다 우를 범한 거죠. ‘여자이기 때문에’라는, 그 한 마디를 듣지 않으려고 그토록 애썼는데 그 선배의 편견과 무지의 내용이 내게도 적용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이고 부끄러웠습니다.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자니까 원···.’ 이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수많은 직장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훨씬 고달프게 살며 자신들을 몰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이보그가 아닙니다.

여성을 저평가하는 차별적 분위기가 여성들을 완벽주의자로 몰아간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간혹 실수라도 하면 필요 이상으로 자책하게 만들고요. 일이 잘못됐다면 그 결과로 얘기하면 되고,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면 일하는 과정의 잘못을 지적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남자가 실수했을 때와 여자가 실수했을 때의 사회적 반응은 다릅니다. 같은 실수를 해도 남성에겐 ‘개인의 잘못’으로, 여성에겐 ‘여자니까 못해’라고 규정 짓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미국의 한 유명 정치인을 만나서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가 “남자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당선된 사실 하나만으로 인정받지만, 여자는 당선되고도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하더군요. 여성들이 처한 사회를 제대로 설명한 말이죠.

헌정 사상 첫 여성 국회 법제사법위원장과 원내대표를 역임했습니다.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은 동력이었나요, 장애물이었나요? 언론사에 일하면서 ‘MBC 사상 첫 여성 특파원’, ‘MBC 첫 여성 메인 앵커’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언론사에서 일할 때나 정치를 하는 지금이나 남성 중심의 주류 사회에서 느끼는 박탈감은 여전합니다. 2004년 정치에 입문한 지 10년 만에 19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 선출돼 헌정 사상 첫 여성 법제사법위원장이 됐고,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첫 여성 원내대표도 지냈습니다. 2008년 감사원 국정감사에서는 KBS 감사의 문제점을 파헤쳐 결국 감사원장의 시인을 받아내기도 했는데, 당시 감사원 직원들의 술자리에서 ‘박영선 때문에 돌겠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치열하게 살았던 날들입니다. 하지만 단지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을 갖기 위해 노력한 건 아니었습니다. 인정받고 성공한 만큼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성차별에 부딪히고, 이를 극복하려는 여성들이 외롭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범을 보이고도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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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최고 지도자가 그 사회의 성평등, 평화 지향성과 무관할 수도 있음을 우리는 지난 정권에서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 정치인에게 남은 희망을 걸고 싶습니다. 우리가 여성 정치인에게 힘을 실어주고, 이들이 일할 수 있도록 지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16년 10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6 성격차지수(GGI, Gender Gap Index)’에서 한국은 1백44개국 중 1백16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이코 노 미스 트>에서 OECD 국가를 대상으로 조사한 유리 천장 지수에서 한국은 29개국 가운데 29위로 꼴찌입니다. 반면 스위스의 성평등 수준은 어느 조사에서도 상위권입니다. 스위스 역시 처음부터 남성과 여성이 평등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랜 세월 동안 성차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려 기울여온 노력이 지금의 스위스를 만들었습니다. 남녀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헌법으로 명문화하고, 각종 여성 정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려면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정치인이 활발히 활동해야 합니다. 주장하지 않으면, 나아가 참여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잘못된 사회적 관행과 폐단을 지적하고 바꿔나가려고 노력할 때 세상은 변화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여성 정치인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여성은 성폭력에 쉽게 노출된다는 것이 ‘안태근 검사 성추행 사건’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올 것이 온 것’이라 표현했죠. 남성권위주의와 마초주의가 우리 사회 곳곳에 문화처럼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라고 봅니다. 서지현 검사의 용기 있는 고발로 검찰 내 직권조사와 성범죄 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이런 사회 분위기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회든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 해결책이 나오는 법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힘겹게 유리 천장을 뚫고 살아가고 있는 여성의 힘을 믿습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 좋아지리라는 전망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행동이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범죄가 다른 범죄에 비해 신고율과 입건율이 낮은 원인으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꼽기도 합니다. 피해 사실을 고발, 증언한 당사자들이 외려 가해자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는 거죠. 이런 보복성 명예훼손 조항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이미 폐지한 조항이고요. 보복성 명예훼손 조항 폐지에 찬성합니다. 작년, 문화계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을 고발하는 해시태그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지만 가해자의 보복성 명예훼손 고소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습니다. 형법 제307조는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한 경우인 ‘사실적시 명예훼손’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되어 피해자들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대부분 이 법률을 이미 폐지했고, 프랑스는 인종이나 성별과 관련한 혐오 표현만은 강하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젠더폭력대책TF는 가해자 처벌 기준을 강화하고, 성폭력 피해를 공개할 경우 사실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을 폐지하는 법안 마련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추진 중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던 젠더폭력방지기본법이 ‘국정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된 지 반년이 지났습니다.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새 법안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사항은 무엇이라 봅니까? 젠더폭력방지기본법은 스토킹과 데이트 폭력, 디지털 범죄, 여성에 대한 증오 범죄 등 변화된 시대에 따라 처벌 기준과 피해자 보호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법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신년 기자회견에서 젠더폭력 추방을 범정부적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올해 처음으로 디지털 성폭력 피해자 지원 예산이 확정되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도 젠더 폭력 대책 전담팀을 만들어 법 제정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새 법안은 성폭력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젠더 폭력 전담 기구 설치, 가해자 처벌에 대한 확실성 증대, 피해자에 대한 조건 없는 지원강화 등 실질적인 처벌과 피해자 보호가 담겨야 합니다.

현재 서울시는 ‘여성안심귀가스카우트’나 ‘여성안심택배’ 등의 여성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수정 보완하거나 발전시키고 싶은 정책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둘 다 훌륭한 여성 관련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안심귀가스카우트’는 여성 안전 귀가와 취약 지역 순찰 운영 등을 통해 안전 확보와 신규 일자리 창출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여성안심택배’는 다른 지자체에서 확대 운영할 만큼 반응이 좋습니다. 다만 생활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해소하는 정책도 필요하나 사회생활에서 부딪히는 뿌리 깊은 성적 차별에 대한 해결 방안은 모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특히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무 환경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정책이 부족합니다. 서울시 여성 복지 서비스의 인적, 물적 자원과 프로그램 전문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의 복합적인 복지 욕구에 보다 적합한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여성은 결혼과 육아, 커리어 사이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성공에 대해 재정의해야 할 시점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영화 <조이>를 봤습니다.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실제 인물 CEO 조이 망가노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영화입니다. 그 이야기가 특별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사업가로서 겪어나간 스펙터클한 모험담이 아닌, 싱글맘으로 개척해온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슈퍼우먼’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 있죠? 결혼하고 나서도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육아와 가정생활에도 충실한 여성을 치하하는 말이었습니다. 현실 세계에 슈퍼우먼은 없습니다.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모두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남성, 여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독 여성에게만 ‘슈퍼우먼’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덫을 씌워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실패한 여성으로 낙인찍곤 했습니다. 이제 여성의 성공 개념도 바뀌어야 할 때입니다. 여성들은 저마다의 성공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남성보다 몇 배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성공하기 위해 더 독해지고 악해져야 했던 사회적 관행과 슈퍼우먼이란 말이 지금껏 여성들을 몰아세웠습니다. 독해지고 악해지지 않아도 행복하게 자신의 성공을 위해 매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