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내가 누구를 대변하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방향 속에서 정책도, 법안도 만들어지는 것이라 봐요. 반대로 유권자는 나를 대변하는 이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지지하는 게 중하고요. 그 선순환 속에서 우리 삶이 나아질 수 있어요.
이정미 대표
2월 8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의당 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에 대해 공개 사과를 했습니다. 공당의 대표가 당내 성폭력 사건을 공개하고 사과한 최초의 기자회견이 아닐까 싶은데요. 어떤 마음이었나요? ‘안태근 검사 성추행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이 정치 공방으로 흐르지 않았습니까. 최교일 의원에 대해 2차 가해다 아니다 하며 서로 남 탓만 했죠. 그런데 저는 정말 그러기 싫었습니다. 검찰 조직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충격적일 수 있으나 미투 운동이 안태근 검사 성추행 사건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요. 오래전부터 많은 여성이 자신이 있는 곳에서 이런 아픔을 겪고 있었노라고 힘겹게 이야기해온 문제 아닙니까. 남 탓만 하다가 어느 세월에 성범죄가 근절되겠나 싶더라고요. 우리부터라도 스스로 성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기자회견을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진보 정당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진보 정당은 이 문제를 훨씬 더 엄격하게 다뤄야 하는 집단입니다. 어느 집단도, 또 어떤 사람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 접근 방식의 기준을 정해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문제 발생시 신속히 해결할 수 있는 사후 대책도 나오는 것이고요. 한편으로는 조직이 성범죄에 긴장하고 있어야 구성원이 혹시라도 그런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하고 스스로 명확한 신호를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빠르게 입장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요.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성평등 정책조정회의를 앞두고 ‘#미투, 응원합니다’라는 피켓을 들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응원’이라는 단어 사용이 적절한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응원이라는 단어는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셨나요? 응원조차 안 하고, 왜 이런 문제로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하느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뭐, 그보다는 나은 대응이라고 봅니다. 제가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결심한 포인트가 바로 그 지점입니다. 피해자들은 당시 상황을 돌아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고통입니다. 공개적인 자리에 서기까지도 힘이 드는데 심지어 고발을 하고 난 뒤에는 2차, 3차 가해라는 끔찍한 상황을 맞닥뜨려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미투 운동이 더 활발히 일어나 더 많은 고발이 있어야 한다? 그걸 응원한다? 그건 피해자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입니다. 왜 피해자가 고백해야 합니까? 가해자들이 자수를 해야죠. 그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우리부터 우리 자리에서 그런 일은 없었는지, 내가 가해자는 아니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번 기자회견을 통해 가해자가 스스로 고백하고 반성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 같은 날(웃음), 시인 고은의 성추행 사건을 두고 한 원로 평론가가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라고 말한 인터뷰 혹시 보셨습니까? 네, 봤습니다. 여성들이 피해를 호소하는 일이 그렇게 시시콜콜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지난 십 수 년간 대한민국에서 성폭력 사건들이 은폐돼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 지금 덜 불편해서 그런 말씀들을 하는 거예요. 불편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더 불편하게.
낙태죄 폐지와 관련해 합리적인 입법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낙태죄 폐지는 페미니즘 관련 이슈 중 가장 논쟁적인 사안 중 하나입니다. 눈치 봐야 할 곳이 많아 서인지 정치인들이 쉽게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고요. 낙태죄 폐지 관련 법안에 어떤 태도로 접근할 예정입니까? 저 역시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접근하기가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낙태를 단지 여성의 책임으로만 전가하고, 그 책임을 여성에게만 묻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낙태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 사람은 여성입니다. 낙태를 하고 싶어 하는 여성은 어디에도 없어요. 낙태를 감행하게 하는 사회경제적인 이유, 어려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사회와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낙태죄를 폐지하면 여성들이 무분별하게 낙태를 한다? 적어도 그렇게만 볼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낙태를 형벌의 대상으로 보는 조항 때문에 생긴 불법적인 시술이 여성의 생명을 위협한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1966년 루마니아에서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했습니다. 그 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서 임신한 여성의 사망률이 그 이전보다 7배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루마니아 정부는 위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곧바로 법안을 개정했어요. 전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을 믿는 이탈리아도 여성의 건강권과 행복권을 위해서 낙태죄를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고요. 낙태가 합법이건, 불법이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여성에게 죄를 묻는 방식이 아니라 미혼모가 아이를 키워도 손가락질받지 않고 양육할 수 있는 환경을 국가가 만들어주고, 청소년의 경우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 교육을 철저히 해야 하는 거죠. 생명권은 이런 방식으로 보호되어야 합니다.
20대 국회의 최대 쟁점은 개헌입니다. 30년 만의 기회이니만큼 인권과 성평등에 관련한 개헌 요구도 큽니다. 가장 시급하게 추진되어야 하는 사안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지금의 헌법에는 여성이 보호하고 배려해야 하는 대상으로 명기돼 있습니다. 국민의 일원으로 자기 권리를 갖는 주체로 명확하게 명시돼 있지 않아요. 보호와 배려의 이면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거든요. 남녀 임금 격차, 독박 육아 등의 사회문제가 모두 거기서 발생한다고 봐요. 그리고 또 하나는 ‘양성평등기본법’이라 되어 있는 것인데 앞으로 우리 사회가 다양한 성 정체성을 인정하는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 유럽보다 보수적이었던 미국조차 동성혼을 인정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대만은 이미 동성혼을 합법화했고요. 이미 가지고 있고 엄연히 존재하는 개인의 성 정체성을 국가가 인정한다, 못 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인권 국가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죠. 양성평등에서 한발 나아간 성평등 개념을 넣고,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번 개헌 과정에서 적시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양성평등과 성평등 논쟁이 어느 때보다 거세고 과격합니다. 이 논쟁을 정치적으로 끌어들이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반대의 목소리가 워낙 격렬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찬성의 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뿐입니다. 작년 6월, 한국갤럽이 조사한 설문조사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해고되는 것’에 대해 응답자의 81%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답했습니다. 국민들의 생각은 이미 변화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시대와 여론의 변화를 반영해야 합니다.
반발이 걱정되지는 않습니까? 정의당이 목소리를 안 내면 누가 낼까요?
작년, 국회의원 비례대표 여성 할당제 강제 조항을 포함한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습니다. 여성의 정치 참여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으시죠? 여성 국회의원 수가 증가하는 것이 일상 속 여권 향상과 얼마나 비례한다고 봅니까? 아이슬란드는 국회의원 남녀 동수제가 실현됐습니다. 입법부의 50%가 여성이고, 여성에게 가장 절박한 삶의 문제를 법제화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최근 아이슬란드는 남녀 임금 격차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법안을 발표했습니다. 우리의 경우 성차별 카테고리 안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남녀 임금 격차예요. 한국은 남녀 근로자 임금 격차가 36.67포인트(2016년 기준)로 OECD 회원국 중 압도적인 1위입니다. 남성 근로자 소득을 100이라 했을 때 여성 근로자는 63.33만 가져가는 거죠. 2018년 1월 1일부터 아이슬란드는 종업원 25인 이상의 모든 기업과 공공기관이 성별이나 인종, 국적에 따른 구분을 없애야 하며 정부에서 남녀 임금 격차 제로 인증을 3년 마다 받아야 합니다. ‘남녀 임금 평등’을 법으로 강제화한 세계 최초의 사례를 만든 거죠. 우리 역시 시대 흐름에 맞춰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법을 보완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성 의원 수가 너무 적어 법이 쉽게 통과되지 않고 있습니다. 정의당은 현재 47석의 비례대표 중에 50%인 여성 할당 의석 수를 더 확대해서 여성들의 정치 진입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고요.
대학을 자퇴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며 오랫동안 사회의 소수로 살아왔습니다. 매 순간 찍은 삶의 좌표들이 의원님을 지금의 자리까지 이끈 것이겠지요? 그렇죠···. 그런데 저는 소수가 아닙니다.(웃음) 정의당이 대변하려는 여성,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은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예요. 지금까지 국회에는 소수만을 대변하는 정치인이 너무 많았어요. 집 10채씩 가지고 있는 강남 땅 부자들, 개발 업자들, 고위 관료···. 이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소수아닙니까. 그동안 정치가 소수 기득권을 대변해왔고 이에 많은 분이 실망해 정치에 무관심해지고 정의당을 지지해주지 않아서 소수가 된 것이지요. 정치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내가 누구를 대변하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방향 속에서 정책도, 법안도 만들어지는 것이라 봐요. 반대로 유권자는 나를 대변하는 이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지지하는 게 중요하고요. 그 선순환 속에서 우리 삶이 나아질 수 있어요. 이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대선 때 폭발적이었고요. 조만간 곧 다수가 될 겁니다.
최근 파리바게뜨 불법 파견 문제를 함께 해결하며 청년들이 ‘세상을 바꾸는 경험’을 축적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죠. 이는 여성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 같습니다. 파리바게뜨 불법 파견 문제는 이 친구들이 저희에게 와서 도움을 청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동 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힘으로 회사와 교섭하는 등 주체적으로 사안을 이끌었습니다. 그 과정에 정의당이 함께한 것이고요. 그 결과 청년들이 ‘우리가 힘을 모아 함께 대응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어요. 우리 여성들도 지금까지는 피해를 입고도 가슴속 깊이 그 상처를 감춘 채 해결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면 다 같이 연대해 힘을 모아 나가자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되면 조금씩 바뀔 거라 믿습니다. 그 가능성을 믿으니까 저 역시 정의당을 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게 함께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