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개 부문을 수상하고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 유명 감독의 프로듀서였던 ‘찬실’(강말금)이는 영화에 빠져 산 20대와 영화에 미쳐 산 30대를 지나 마흔을 막 넘어설 때 감독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다. 쉬지 않고 열심히 살았지만 ‘망’했다. 성공하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실패 후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는 늦은 나이, 마흔한 살의 찬실은 달동네로 이사를 간다. 단출한 이삿짐을 나르는 사람들은 찬실이와 친구들이고, 이사 간 곳에서 집주인 할머니를 만난다. ‘장국영’(김영민)을 만나고, 돈을 벌기 위해 가사 도우미를 시작한 집에서 안고 싶은 남자도 만난다. 오늘은 힘들지만 어제의 꿈이 무엇인지를 떠올리고 내일을 함께할 사람들이 있으니 찬실이는 복도 많다. 찬실이는 김초희 감독의 이야기이자 쉴 새 없이 다가오는 위기를 버텨내며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개봉할 때 코로나19가 한창 심각해지는 시기였다.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도 그 무렵이었다. 어쨌든 개봉을 마쳤다. 매를 빨리 맞자는 심정이었다. 할 일이 있는데 미루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라 뚜껑을 빨리 열었다. 여전히 코로나19로 개봉하지 못하고 기다리는 작품이 많은데, 그 마음이 얼마나 힘들까 싶다. 나 역시 개봉을 앞두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웃음) 텅 빈 극장에 관객이 한두 명밖에 없을 때도 많았다. 그 관객들에게 ‘시네마 열사’라고 말했다. 당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아준 관객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많이 고맙다. 그분들이 모여 2만7천여 명이라는 숫자를 만든 거니까. 영화에 대한 ‘찐사랑’의 마음으로 극장을 찾은 분들이다. 어쩌면 ‘찬실이’ 같은 분들이기도 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결국 영화를 사랑하는 찬실이의 삶 아닌가.
찬실이의 시작점은 김초희 감독 자신이다. 나는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래서 30대 중반의 여자 회사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찾는 데만 해도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이 걸린다. 그 인물이 내 안에 들어올 때까지도 많이 걸리고, 내 안에 들어온 그 인물을 객관화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반면에 나를 투영해서 만든 인물은 나와 거리만 벌려놓으면 내가 그 인물을 장악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영화 속 인물에 대한 객관화도 쉽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어떤 인물이든지 내가 장악한 다음 거리를 벌려 나가는 작업이어서 시간 싸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나를 투영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이 용이했다.
시나리오 초기 단계와 완성된 영화를 비교할 때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거의 비슷하다. 영화는 주인공이 위기를 통과해 나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시나리오 작업 초반에는 톤 앤 매너를 어둡게 가져갈 것인지, 밝게 가져갈 것인지 고민이 컸다. 어두운 얘기를 어둡게 할지, 아니면 반대로 밝게 할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후자를 선택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찬실이가 계속 나아갈 수 있는 건 결국 사람들 때문이었다. 이 설정 역식 개인적인 경험의 영향을 받았나? 그렇다. 5년 전 실직했을 때 마흔 한 살이었다. 그렇게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였다. 그때 좀 막막했다. 위기 상황으로 다가왔다. 이제 뭘 먹고 사나 싶어서. 그런데 살다 보면 힘든 일이 한 번만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그 전에 겪은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생각해보니 늘 생각하지 못한 인연들이 나를 도와줘서 일어설 힘을 얻었다. 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집구석에 가만히 처박혀 있으면 안 된다. 힘든 때일수록 약속을 잘 지키고 밖으로 튀어 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인연의 물꼬가 트인다. 위기라는 게 기존의 인연이 다하는 시기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 것에 균열이 생기고 폭삭 가라앉는 게 위기다. 실직했을 때 그 전에 내가 맺고 있던 인연의 시간들이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인연의 장으로 넘어가려면 내 몸이 움직여야 했다. 그럴 때는 여행을 떠나거나 이사를 가든가 이직해야 한다. 찬실이가 ‘망한’ 후 이사 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실직했을 때 캐나다에 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났고. 그 인연 속에서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얻었다. 찬실이도 달동네로 이사 간 후 복실 할머니(윤여정)를 만나고 장국영과 ‘김영’(배유람) 같은 인물을 만나지 않나. 물론 오래 알아온 ‘소피’(윤승아)도 있고. 알던 인연과 새로운 인연이 연대하면 가진 게 없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주인공의 이름 ‘찬실’이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빛날 찬, 열매 실, 빛나는 열매라는 뜻이다. 스물세 살부터 영화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영화를 공부하고 유학도 떠나고, 영화를 많이 보고 영화 일도 했다. 데뷔작을 내놓기 전까지 영화를 하는 것에 대한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다만 성과의 문제가 아니라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뿐이었다. 열정은 가득하지만 내 마음이 힘든 만큼 끝까지 가서 닿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그래서 찬실이라는 인물을 통해 내가 영화를 사랑한 초심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찬실이라는 인물을 통해
내가 영화를 사랑한 초심을 떠올리며
나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다.”
실직한 40대 여성은 소위 말해 비주류다. 첫 장편의 주인공은 좀 더 대중적인 스펙을 갖춘 인물로 설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를 구상할 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작하지 않았다. 일단 내가 가진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나와 가장 가까운 인물을 만들어냈다. 대신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보편성을 담고자 했다. 시나리오 초고 이후 1년 동안 수정했다. 나를 투영해 만든, 나와 가까운 인물이지만 1년 동안 시나리오를 고치면서 찬실이가 누구에게나 대입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랐다. 30대는 자신이 가진 꿈이 안개 같아도 무작정 돌진할 수 있다. 하지만 40대는 돌진해봤자 아무것도 생기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는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그 이유에 더 큰 의미를 두며 살게 된다. 내 인생이 앞으로 지금과 전혀 달라지지 않겠지만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찾아가는 거다.
절망의 바닥에서 찬실이를 빛으로 안내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장국영이다.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인물이 환상처럼 존재한다. 환상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건가? 장국영은 찬실이가 잊고 지낸 영화에 대한 사랑과 초심을 다시금 일깨워주는 인물이다. 장국영이지만 실은 찬실이 자신인 셈이다. 자문자답의 상황에서 판타지적인 인물을 끌어들였다. 인생은 어떤 계기가 생겼을 때 일단 멈출 필요가 있다. 멈춰서 생각했을 때 변할지 말지 결정하는 거다. 그런데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 변하고자 마음먹어도 아주 조금 변하는 것 같다. 찬실이는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며 살아온 그 전과는 다른 식의 고민을 했다. 장국영을 통해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찾아가는 거다.
20대부터 오늘까지, 영화 일을 시작하고 첫 장편 입봉까지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 시간 동안 길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 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뭔가? 거창한 것 없이 그냥 내 성격이다. 영화 말고는 강렬하게 꼭해보고 싶은 게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실컷 방황했고, 경제적으로 일찍 독립했다. 20대 초반은 누구나 다 힘든 시간을 보내지만 나는 유독 아플 만큼 힘들었다. 세상의 많은 것에 삐딱했고 부정적이었다. 삶이 답답해서 뭔가를 표현하고 싶은데 표현할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농익지 않은 내가 문학을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비디오 가게에서 일하면서 자연스레 영화를 많이 보게 됐다. 그렇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는 유일하게 마음 바쳐 하고 싶은 일이 되었고 온통 싫은 것 투성이인 와중에 영화만 좋았다. 그래서 온 마음을 걸고 순정을 바쳤다.
그 시절 유독 소중하게 생각한 영화를 꼽을 수 있나? <집시의 시간>. 그 영화를 보며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영화만큼 좋은 영화가 세상에 계속 나오고 있지만 <집시의 시간>이 특별히 좋았던 건 당시 내 상황에서 가장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집시로 태어나면 그 운명을 거스를 수 없으며 죽을 때까지 집시로 살아야 한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에게 가난과 슬픔의 가족사는 벗어날 수 없는 굴레 같은 운명이다. 마치 나 같았다. 그 시절, 나 역시 내가 가진 어둠에서 못 벗어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영화는 너무 귀여웠다. 그 영화야말로 슬픔을 유쾌하게 담았다. 하지만 슬픔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다.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자신을 투영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첫 장편이 앞으로 만들어갈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충분히 기대 이상의 복을 받았다. 관객으로부터 받은 복뿐만 아니라 이 영화 덕에 앞으로 내가 영화를 계속해도 좋다고 말해주는 것 같은 자리가 생겼다. 하지만 그 자리에만 빠져 있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영화를 하는 사람은 영화를 만들어서 증명해야 한다. 사실 앞으로는 예전보다 조금 덜 열심히 살 생각이었다. 다시 내게 영화를 할 수 있는 삶이 주어진다면 옛날처럼 그렇게 영화만 생각하는 삶은 살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었는데 안 되더라. 다시 영화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다. 열심이라기보다는 열정이라고 말해야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로 좋은 평가를 많이 받아서 너무 행복하지만 이제 이걸 빨리 잊고 어서 다음 영화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크다.
영화감독은 창작자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창작하기 위한 삶을 지속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섰나? 내게 주어진 조건은 늘 변한다. 조건이 굉장히 좋지 않을 때도 있고, 내가 가진 것보다 운이 따라줘 일이 잘 풀릴 때도 있다. 하지만 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가장 좋았다. 앞으로 창작자로서 어떻게 살겠다기보다는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고자 한다. 그 하루가 다 다르니까. 어제는 좀 괜찮았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번잡스러운 일이 있었다. 아마도 오늘 번잡스러운 일을 해결했으니 내일은 좀 더 나을 것 같다. 이런 조건 속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하고 싶은 걸 밀어붙이며 살아가야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