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오 감독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

 

에릭 오 감독이 만든 <오페라>가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부문 내 유일한 아시아 작품으로 세계적인 무대에 오른 <오페라>는 픽사와 디즈니 등 유수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특별 상영되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올해 열린 슬램댄스영화제와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SXSW)에서 일찍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20대 중반부터 픽사에서 경험을 쌓은 후 자신만의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주목받고 있는 그를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둔 어느 날 화상으로 만났다.

 

에릭 오 감독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페라

 

<오페라>가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 애니메이션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오늘을 기준으로 시상식이 2주 정도 남았는데, 어떤 기분이 드나? <오페라>가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안 후 한동안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벅찬 마음으로 지냈다. 시상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긴장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시상식 며칠 전부터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러야 하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그래서 감정적인 부분은 잠시 미뤄둔 채 차분하게 시상식을 기다리고 있다.

<오페라>가 처음에는 전시를 위한 작품이었다고 들었다. 이 작품을 영화로도 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전시를 관람하는 관람객은 각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반면 영화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상영되고 큰 화면과 풍부한 사운드가 몰입감을 높인다. 여기에 욕심이 생겨 두 가지 버전을 병행했고, 거의 동시에 완성했다. 전시 버전에서는 하루가 루프처럼 끝없이 반복된다면, 영화 버전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처럼 클라이맥스와 엔딩 등이 있게끔 연출했다.

작품이 상영되는 약 8분 동안 피라미드처럼 보이는 삼각형 구조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옛 벽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벽화에 인류의 중요한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 <오페라>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과 비슷했다. 우리 사회가 그대로 담긴 ‘움직이는 벽화’를 만들고 싶었던 셈이다. 인류의 역사, 문화, 정치, 종교, 교육 등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를 반영했다.

정교하게 움직이는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약 4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지난해 초에 마무리했다. 중간에 다른 일을 할 때도 있었고 상황상 함께 제작하는 팀 내 아티스트들이 바뀌기도 했다. 하지만 작업 과정 자체가 즐거워 마냥 힘들진 않았다. 내부적으로도 다 같이 더욱 합심해 작품을 만들어가려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작품이 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러 상황 중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나? 여러 가지가 떠오르는데, 그중 세 가지를 말하고 싶다. 먼저 얼굴색이 다양한 사람들이 처형당하거나 교도소에 수감되는 모습이다. 요즘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이 큰 이슈인데, 인종뿐 아니라 성별과 사상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이 알아봐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리고 삼각형 꼭대기를 보면 서기가 있다. 그의 글이 적힌 종이가 밑으로 흘러내리고, 사람들은 종이에 담긴 내용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믿는다. 이를 통해 한 사람의 기록이 전 세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을 꼬집으려고 했다. 마지막으로 대자연을 의미하는 큰 물고기다. 낮에는 사람들이 물고기를 뜯어 먹지만, 밤이 되면 물고기가 전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상황이 하루를 주기로 반복된다. 이를 통해 자연과 인간이 서로 해하는 상황을 표현하고자 했다. 다양한 사회문제에 한 명의 사람이자 아티스트로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 어떤 마음으로, 무엇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한다.

다양한 군중이 등장하는 한편, 군중을 이루는 인물들의 형태는 비교적 단순하다. <오페라>는 다른 애니메이션에 비해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다. 인물들이 군집을 이뤄 마치 개미처럼 움직이는 모습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캐릭터는 단순하게 표현했다.

캐릭터의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점도 눈에 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캐릭터 자체가 ‘젠더 프리’다. 남녀 구분 없이 모두가 작품 속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존재한다. 아이를 출산하는 장면 등 생리학적으로 성별의 차이가 드러나야 하는 부분에서만 조심스럽게 구분했다.

사운드 또한 <오페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듯하다. 음악과 음향을 중시해 작품 구상 단계부터 청각적인 부분도 함께 생각하는 편이다. 음악이야말로 <오페라>의 서사를 하나로 묶는 장치다. 클라이맥스를 지나 침묵으로 돌아갔을 때 다가오는 감정의 요동은 결국 음악이 이끌어주는 듯하다. 음악이 없다면 무엇을 봐야 하고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쉽게 알지 못할 것이다.

<오페라> 속 군중의 상황은 과거에도, 현대에도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미래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문명과 기술은 점차 발전하는데도 인류 측면에서 보면 정말 나아지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오페라>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희망이다. 작품 자체는 다소 어둡고 절망적일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 세계가 현재와 닮아 있고 앞으로 악순환처럼 반복된다면, 그 고리를 어떻게 끊어낼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페라>는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픽사에서 애니메이터로 일한 경력이 있다. 이곳에서 <오페라> 특별 상영을 마친 이후에 들은 소감 중 어떤 말이 가장 인상 깊었나? 먼저 동료이자 존경하는 아티스트들에게 <오페라>가 기술적으로 인정받은 점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오페라>를 통해 여러 방면에서 애니메이션의 틀을 깨는 동시에 중요 요소들은 지키려고 했다. 이를테면 캐릭터의 동작이 아주 정교하다. 실험과 존중에 대한 내 의도가 보였다는 반응이 격려가 되었다. 그리고 다문화 스튜디오인 픽사에서 여러 동료들이 각자 자신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문화와 시대를 막론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데 많은 이들이 공감해줘 기뻤다.

지난 3월에 열린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에서 <오페라>가 관객상을 수상했다. 전문가뿐 아니라 관객도 공감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듯하다. 수상 소식을 듣고 굉장히 놀랐다. 영화제에서 수여하는 여러 상 중에서도 관객상은 조금 다른 의미로 와닿는다. 만약 혼자만의 환상을 그려냈다면 공감을 얻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올해 안에 한국에서 대형 미디어 아트 전시를 열어 국내 관객에게도 <오페라>를 선보일 계획이다.

픽사에서 보낸 시간이 지금의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 훌륭한 아티스트들과 소통하며 영화와 예술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이들과 협업하는 과정에서 배운 점도 많다. 세계적 수준의 스튜디오에서 발 맞추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했다. 그 경험이 내 일부가 되어 작품은 물론 앞으로 살아가는 데도 큰 영향을 끼칠 듯하다.

애니메이터로 일할 때와 감독으로서 작업할 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먼저 픽사에서는 수백 명의 뛰어난 아티스트들이 한 작품을 함께 만들어간다. 엄청난 시간과 예산을 들여 만든 결과물을 전 세계 사람들이 보게 되니 뿌듯하고 보람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 결과물은 온전한 나의 것은 아니다. 감독을 맡아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작품을 만들어갈 때 느끼는 보람은 또 다른 것 같다.

애니메이터로 활동할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가는 것이 있나? 내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점은 한결 같다. 픽사 등 저명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대부분의 작품은 결국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 사랑, 평화 등은 삶을 지탱해주는 가치니까. 이런 작품에 참여할 때 나 또한 내 삶을 쏟아부으며 진심 어린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개인 작품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다.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나?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이를 증명하고자 한 작품이 <오페라>다. 애니메이션 하면 대부분 만화 영화를 떠올릴 텐데, 사실 애니메이션은 영화와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될 여지가 많다. 심지어 가상현실(VR) 같은 기술에도 접목할 수 있다.

실제로 차기작 <나무>에서 가상현실을 활용하기도 했다. <오페라>가 세상에 대한 내 분석이 담긴 기록이라면 <나무>는 대단히 개인적인 작품이다. 오래전 할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무>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녹아 있고, 오직 그만을 돋보기로 관찰하듯 살펴본다.

이 작품에 가상현실을 도입한 이유가 있나? 영화를 볼 땐 관찰자 시점으로 화면을 바라봐야 하지만, 가상현실은 기기를 쓰는 순간 작품 속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나무>에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화면으로 보는 것과 가상현실로 체험하는 것은 분명 온전히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있다 보니 가상현실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가상현실이 가진 경험적 특성을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펼칠 예정인가?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특정 매체에 국한되기보다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전시 형식으로 만든 <오페라>, 가상현실을 활용한 <나무>, 현재 제작 초기 단계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니>처럼 말이다. <오페라>가 세계적인 무대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인정을 받은 셈이다. 작품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지 못한 경험을 안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문화적으로 더 나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런 내 진심이 관객에게 오롯이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