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경험이 축적된 기록으로서의 몸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자기 검열도 열패감도 없이 몸을 돌아보자는 제안에 11명의 여성은 각자 고유한 몸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술 자국이 아문 배꼽, 볼록 솟아오른 점, 발톱이 자주 빠지고 상처 입으며 수고하는 엄지발가락, 치열이 불규칙한 이, 웃지 않는 눈과 입, 노동으로 단련된 어깨와 팔, 매끈해야 할 이유가 없는 피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담았다. 어느 때보다 몸에 대한 담론이 활발한 지금, 여자들은 안다. 내 몸은 어때야 하고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수치와 형태로 판단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자기 관리라는 말로 개선하거나 고쳐야 할 것이 아님을. 78억 명의 다른 인생이 있듯 다르고 다양한 몸이 존재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여자들은 이제 다 안다.
정다운의 어깨와 팔
“항상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하니까
어깨와 팔은 내 몸에서 가장 지구력이 필요한 부위예요.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죠.
타투를 팔에만 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최근 촬영감독으로서 장편영화 작업을 마쳤어요.
주로 핸드헬드(여타 장비 없이 카메라를 손으로 들거나
어깨에 메는 것)로 작업하는 편인데, 이번 영화는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로 촬영했어요.
렌즈까지 합하면 15~20kg에 달하는 장비를
하루 종일 오른쪽 어깨와 팔로 지탱하는 거죠.
현장에서 내가 원하는 앵글을 담기 위해
오래 버텨야 하니까 영화 촬영 들어가기 두 달 전부터
어깨와 팔 근력을 키우는 운동을 집중적으로 했어요.
이제는 양팔의 길이가 다르고,
어깨도 굽어서 잘 펴지지 않아요.
승모근은 굳을 대로 굳었고.
근데 지금보다 더 커지고 탄탄해져도 좋아요.
나 정다운이 이만큼 열심히 일했고,
힘껏 살았다는 표시잖아요.”
이주영의 엄지발가락
“영화 촬영 중에 도망치는 신이 있었는데
뛰는 연기를 하다가 양쪽 엄지발톱이 다 빠졌어요.
처음에는 까맣게 멍이 들었나 보다 했는데
피가 고인 거였어요. 며칠 뒤 새 발톱이 올라오니까
죽은 발톱이 툭툭 빠지더라고요.
촬영이 끝날 때까지 내내 통증을 견디며 연기해야 했죠.
그러다 작년에 코로나 19로 예정된 작업이 취소되면서
꽤 오래 쉬었어요. 아무래도 배우는 일할 때와
하지 않을 때 삶의 격 차가 크잖아요.
이에 따른 정서 관리도 스스로 해야 하니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산을 찾게 되더라고요.
그렇게 1년 동안 전국의 산 열두 곳을 다녀왔어요.
어떨 때는 한 달에 서너 번 가기도 하고요.
얼마 전에도 한라산을 다녀왔는데 등산하다
엄지발가락을 또 다쳤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발을 내딛는데 무척 아프더라고요.
속이 시끄러울수록 몸을 더 단련하려는 과정에서
제 발과 엄지발가락이 자기 역할을 아주 잘해주고 있어요.
요즘은 발이 몸의 뿌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서희의 점
“허리 왼쪽 위에 큰 점이 있어요.
신기한 건 엄마도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크기의 점이 있죠.
직업이 모델이라 그런지 내 몸에 대해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때가 있거든요.
얼마 전에도 수영복 화보를 찍는데 점을 보고
다들 놀라더라고요. 점을 빼는 게 좋겠다,
아니면 털이라도 뽑는 게 어떠냐 하면서요.
근데 이 점이 내게, 그리고 이 점에 대해
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도 아무 피해를 주지 않는데
왜 빼야 할까요. 빼야할 이유를 못 찾겠어요.
사람들이 자꾸 빼라고 하니까 더 빼기 싫고요.(웃음)
요즘은 누군가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면
‘어? 저 여기 털도 났어요’ 하고 말해요.
제가 모델이지만 사회적 기준에 따라
완벽한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건 더 완벽해지고,
기준에 맞추려 할수록 나는 더 힘들어진다는 거예요.
기준에 몸을 끼워 넣기보다 지금의 나를
잘 활용하며 일하는 게 옳다고 생각해요.”
퀸와사비의 피부
“정확한 용어로는 모공각화증이래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팔에 뭐 난 것 같다,
닭살 돋은 것 같다고 말해줘서 처음 알았어요.
‘왜 이렇지?’ 하는 생각은 했지만,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어요.
그런데 데뷔 후 촬영할 일이 많아지면서 피부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미적 기준이 적용된다는 걸 알았어요.
특별히 요청한 적도 없는데 사진을 받아 보면 항상
모공각화증이 있는 팔이 매끈하게 보정돼 있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매끈한 피부가 기본값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됐어요. 잠깐 ‘없애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냥 그대로 두기로 했어요.
건강에 문제가 될 만한 것도 아니고,
사는 데 불편한 것도 아니고, 이건 주근깨처럼
제 몸의 특징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누군가는 이상하게 볼 수도 있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도 않고요.
귀찮아요. 저는 그냥 이렇게 살려고요.(웃음) ”
신민의 이
“치과에 갈 때마다 의사에게 듣는 말이 있어요.
“부정교합이 심하네요.
이 정도면 교정할 게 아니라 양악 수술을 해야 해요.”
지인들은 제 이를 보며 공룡이나 드라큘라를 떠올리죠.
미술 학원 강사로 일할 때, 어린 학생들이 신기하다며
‘이 ~ 해보세요’ 하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주저 없이 보여줬어요.
저는 거울 보며 웃을 때 드러나는 제 이가
마음에 들거든요. 사는 데 전혀 지장 없고,
조형적으로도 참 재미있잖아요.
SNS 등을 통해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중이에요.
제가 작품에서 자주 다루는 여성들도
‘정상에서 벗어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치열이 고르지 않거나 몸집이 크거나
블랙헤드가 보이는 식이죠.
이런 제 행동이 모두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자신을 존중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데
영향을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패션 매거진을 비롯한 미디어를 통해
더 다양한 여성의 몸을 보게 되기를 기대해요.”
조아라의 배꼽
“배꼽은 최근에 모양이 바뀐 부위예요.
지난해 여름 복강경 수술을 받은 후 아래쪽에
작은 흉터가 생겼거든요. 수술 흔적이 남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은연중에 손으로 배를 가리기도 하고,
굳이 허리까지 올라오는 바지를 찾기도 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포토그래퍼의 조언을 듣고 마음이
편해졌어요. 제가 사진 속 흉터를 지워달라고 했더니
‘이건 네 잘못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야’
하고 말해줬거든요.
고민하다가 SNS에 배꼽이 드러난 사진을 올렸을 때도
아무도 흉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가끔 신경 쓰이더라도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이게 저니까요.(웃음)
흉터가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요.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좋다’ ‘나쁘다’처럼 평가의 의미를 지닌 단어를
쓰지 않는 습관을 들이면 좋겠어요.
누구나 다양한 표현을 통해
각자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요.”
이다울의 등
“2016년부터 특별한 원인 없이 신체 여러 부위에
통증이 지속되는 섬유근육통을 앓으면서
누워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등을 대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금껏
내 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등을 붙이고 쓴 일기라는 의미를 담아 웹사이트에
<등의 일기>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 되었고요.
TV나 유튜브만 봐도 건강한 사람들로 가득하잖아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오랫동안 촬영장에 있을 수 있지? 말이 되나 싶고,
제가 그들처럼 건강했을 때가 있었나 싶더라고요.
저도 중·고등학교 때는 매년 국토 순례를 가고
히말라야 트레킹도 몇 번 갔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외롭죠.
사회적으로 청년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가 있는데,
아픈 청년의 ‘아픈’은 청년을 수식하는 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요.
지금도 주변 사람들이 제게 대뜸 ‘건강해야지’ 하고
말하면 걱정하는 마음으로 하는 다정한 말인걸 알면서도
내가 그걸 모르는 게 아닌데 싶어 암담할 때가 있어요.”
박선영의 손등
“취업 준비생 시절에 길을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손등에 동전만 한 흉터가 생겼어요.
약 2주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죠.
마지막으로 내원한 날, 직원이 제게 흉터를 지울 수
있는 2만~3만원짜리 연고를 구매하겠느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당시 제 통장 잔고가 거의 0원이었거든요.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흉터를 가질게요” 하고 말했어요.
피부를 매끈하게 만들려고 돈을 빌려가며
시간과 노력을 쏟고 싶지 않았거든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이따금 흉터가 낯설게 느껴졌고,
예상보다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띄더라고요.
하지만 수년이 흐른 지금도 타투 등
여러 방법으로 흉터를 가리지 않아요.
지나온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제 이야기의 일부니까요.
누군가 몸에 대해 주체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몸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더 나아가 각자의 몸으로 무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기를 기대해요.”
이호정의 쇄골
“어릴 땐 늘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는 소심한
아이였어요. 당연히 내 몸에서 특별히 매력적으로
느끼는 부분도 없었고요.
그런데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하면서 어릴 적 자세
때문에 유독 쇄골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걸 알았어요.
영상이나 사진에 나온 쇄골을 보며 ‘마음에 든다’,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처음으로 제 몸에
좋아하는 부분이 생겼고, 자신감을 갖게 된 거죠.
일반적으로 예쁘다고 말하는 형태는 아닐 수 있지만,
미에 정해진 기준은 없잖아요. 미적으로 아름다워야만
내 몸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제 쇄골이 좋아요. 쇄골을 발견하면서
제 몸을 긍정할 수 있게 됐거든요.”
정재윤의 종아리
“회사원과 프리랜서 작가의 삶을 병행하고 있는데,
두 가지 모두 책상 앞에 앉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스스로 풀타임 책상 노동자라 칭하는 일이죠.
여기에 유전적 영향까지 더해져
늘 다리 부종과 더불어 살아왔어요.
사실 10대 때는 사회 통념상 예쁘다고 하는 몸매에 내가
속하지 않은 데 대해 불만이나 부끄러움을 느꼈어요.
그런데 성인이 되고, 여성의 몸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접하면서 관점이 바뀌기 시작했죠.
내 종아리는 기능하는 몸의 일부다, 내 몸의
특징일 뿐이다, 그러니 아름답게 가꾸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같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최근에는 간헐적 요가인이자 러너 생활을
시작했어요. 건강관리도 목적의 하나지만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는 종아리를 살피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종일 앉아서 작업만 한 날에 부어 있는 종아리,
요가를 한 후 이완된 종아리, 러닝을 마친 후 단단해진
종아리. 이렇게 다리의 기능에만 온전히 집중하게
됐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즐거워요.”
강유가람의 눈과 입
“영화 관련 인터뷰로 종종 사진을 찍힐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웃어주세요’라는 말을 들어요. 그런데 저는
웃는 표정을 짓는 게 편하지 않고 어색해요.
웃어 보이려 노력은 하는데, 돌아오는 말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고요.
생각해보면 촬영 외에도 여성은 잘 웃어야 한다고
강요당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누군가와 처음
만났을 때, 분위기가 어색할 때, 혹은 언제나 잘 웃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있어요.
싫은 내색을 하거나 무표정하게 있는 걸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평가하기도 하고요.
웃는 건 분명 긍정적인 표현이지만, 웃지 않는다고 해서
기분이 좋지 않다는 표현은 아니잖아요.
어디서든 웃음을 특별히 강요하지 않았으면 해요.
이런 면에서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포스터를
언급하고 싶어요. 웃지 않는 여성들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일러스트였는데, 사회적 시선을
환기할 만한 좋은 시도라고 생각해요.
나이 마흔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누구든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게 꼭
웃는 모습이어야 할 필요는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