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미 <만인의 연인>
CAST 황보운, 서영희, 전석호, 김민철, 홍사빈
어느 겨울 아침, 애인에게 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엄마가 집을 나갔다. 열여덟 살 고등학생 ‘유진’은 당황스럽지만, 홀로 살아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한다. 그곳에서 만난 세 남자. 첫눈에 반한 ‘강우’, 동갑내기 아르바이트생 ‘현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만남을 이어가던 유진의 연애는 점장의 사고로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유진은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어진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처음으로 연애 감정을 느끼고 성적인 호기심이나 욕망을 느껴 능동적으로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는 시기인 10대를 보내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많은 영화에서 이런 여성 캐릭터는 만인의 연인처럼 판타지로 비치거나 비하하며 편협하게 대상화되어왔다. 여성들이 서툴지만 열정적이던 시절의 이야기를 나눌 계기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꼈고, 여성의 욕망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 속 감정 혼란스러움. 누구를 사랑하는지, 사랑이 뭔지, 책임감은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누가 알려준 적 없는 관계에서 피어나는 무수한 물음표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도 혼란스러웠던 한때를 떠올렸으면 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고 불쑥 용기가 솟아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
결정적 장면 새벽에 버스 정류장에서 잠들었다가 깨는 장면이다. 유진에게 그 전과 후의 세계가 달라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전의 세계에선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았다면, 잠에서 깨어난 후의 세계에서는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유진의 밑바닥이 어떻게 하면 낱낱이 드러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유부남과 연애하는 엄마를 비난하면서도 자신 또한 두 남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그 때문에 파국을 맞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닫기를 바랐다. 그리고 밑바닥을 타인에게 고백했을 때 과연 받아들여질지 궁금했다. 그래서 각 인물들이 최대한 이기심에 솔직할 수 있도록 이야기와 관계를 쌓아갔다.
나의 영화 선생님 아녜스 바르다의 존재 자체. 시나리오가 막힐 때든 촬영장에 가기 두려울 때든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 때마다 아녜스 바르다의 씩씩한 걸음과 호기심으로 가득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를 보며 나도 그렇게 씩씩하고 즐겁게 만들면 되겠구나 싶었고, 나도 나이 들어서도 오래오래 영화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다.
오성호 <그 겨울, 나는>
CAST 권다함, 권소현
가난한 환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순경 시험을 준비하던 ‘경학’에게 갑작스레 어머니의 빚 2천만원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결국 공부를 중단하고 배달 라이더로 돈을 갚으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애인 ‘혜진’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재작년 겨울, 생업으로 노가다를 하다가 때운 이가 깨진 적이 있다. 치과 가서 돈 쓸 거 생각하니까 분한데, 하는 일까지 풀리지 않아 속상했다. 속이 상해 툴툴대며 퇴근하던 길에 옆을 지나던 라이더의 오토바이 소리가 마음에 꽂혔다. 기분 탓인지 오토바이 엔진음이 구슬프게 들렸고, 그 순간 배달 라이더 일을 하는 돈 없는 청년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영화 속 감정 처연함. 먹고사는 문제로 발버둥치고 있으니까. <그 겨울, 나는> 속 인물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게 누구 때문인지조차 모른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만 불행의 화살이 날아갈 뿐. 그게 참 슬프다.
결정적 장면 마지막 시퀀스. 주인공 경학이 우여곡절을 거쳐서 결국 영화의 ‘마지막 장소’로 내려간다. 거기서 경학을 보면 이전과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이전에는 잘 살아보려고 파닥거리며 날갯짓을 하던 애가 점점 추락해서 마지막 장소로 왔고, 그곳에서는 병든 아기 새처럼 착 가라앉아 있다. 그 장면을 모니터링하며 ‘아, 우리가 이걸 담으려고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다. 그건 시나리오에도 없고, 연출에도 없던 것이다. 오롯이 권다함 배우가 만들어낸 뉘앙스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나는 돈이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고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돈을 통해 관계 맺고 소통하고 서로 이해하기도 하고 때론 오해하고 미워하며 싸우고 헤어진다. 어쩌면 자본주의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걸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 당연한 사실에 이상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 이 기분을 같이 느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경학. 시나리오 단계에서 경학은 착하고 바른 청년이었다. 그래야 관객이 경학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그를 응원하며 영화를 봐줄 것 같았다. 그런데 권다함 배우를 만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경학을 건실한 청년으로만 표현하는 건 솔직하지 못한 거란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의 방향을 틀면서 강단 있고 성질도 부릴 줄 아는 지금의 경학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학이 비호감 인물로 비치지 않고, 관객이 그를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의 영화 선생님 한국영화아카데미 선생님들.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프리 프로덕션을 하고, 편집하는 각 공정마다 곁에서 숙제 검사하듯 봐주는 분들이다. 보통의 코멘트 수준을 넘어서 아주 깊이 있게, 아주 진지하게. 내가 원체 고집스럽고 돌 같은 사람인데, 가끔 돌처럼 군다 싶으면 선생님들이 망치 하나씩 들고 여러 각도에서 나를 깨준다. 그러다 보면 객관화되고, 균형도 좀 잡힌다.
신선 <모퉁이>
cast 이택근, 하성국, 박봉준
포르투갈 여행을 다녀온 ‘성원’은 가장 친한 영화과 동기인 ‘중순’과 만나 대학 시절 단골 식당인 ‘개미집’ 으로 향한다. 그 길에서 10년 전 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던 또 다른 동기 ‘병수’와 마주친다. 어색한 인사가 끝인 줄 알았는데, 병수가 개미집으로 찾아왔다. 10년 전 일을 다시 꺼내며 성원과 병수는 얼굴을 붉히고 만다. 그리고 며칠 뒤 병수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2019년 11월에 가족들과 포르투갈 여행을 갔는데, 리스본에 머물면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읽은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낮에는 도시 구석구석 발이 아플 때까지 걸어 다니고, 밤에 숙소에 돌아와 잠들기 전에 <불안의 서>를 읽으면 그날 무심결에 떠올린 생각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이어 붙여졌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메모해둔 내용과 2018년에 쓴 <열화와 같은 성원>이란 제목의 시나리오를 조금씩 섞어가며 지금의 <모퉁이>를 만들었다.
결정적 장면 영화 초반부에 성원이 중순을 만나러 나왔다가 뭔가 가져오지 않은 게 있어서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발생한 시간 차가 이후의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꼭 그것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우연의 한 요소일 수도 있고, 세상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복잡성으로 가득하니까. 그런 면에서 그 장면이 나에겐 결정적 장면이지만, 범위를 넓혀보면 보잘것없는 장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더 정이 간다. 작고 별것 아니지만, 그 나름의 역할을 다했을 테니.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영화를 통해 뭔가를 전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고, 앞으로도 그런 건 없을 거다. 그렇다고 흔히 얘기하는 의식의 흐름 같은 것도 아니다. 다만 머릿속에 있던 어떤 것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자연스럽게 영화 속에 배치되었고, 그 간격과 리듬을 조절하는 과정을 거쳐 영화가 만들어지고 보니 은은하게 표현되는 몇 개의 덩어리들이 있는 것 같다. 시간과 장소가 만들어내는 우연성과 관계의 회복,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이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없지만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영화에서만 가능한 아름다움이 <모퉁이>에 담겨 있길 바란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천천히 생각을 통과하자. 영화를 만드는 내내 마음속으로 이 생각을 되뇌었다. 시간에 구멍을 내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기 때문에 시나리오에만 얽매이지 않고, 머릿속에 생각할 여유를 10~20% 남겨두었다. 그리고 현장의 분위기와 그날의 날씨, 장소가 가진 한계 등을 직접 몸으로 느끼며 시나리오에 없는 상황과 대사를 추가해 유기적으로 연결해가는 방식으로 연출하고자 했다. 제작 여건상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천천히 생각하고, 실수를 줄여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하나씩 생각을 통과하면서 나아가다 보니 기존의 지문이나 대사들도 서로 영향을 끼치며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고, 마지막 9회 차에서는 마침내 어떤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영화 선생님 미래에만 존재할 것 같은, 당장은 절대로 손에 잡히지 않던 영화라는 실체를 현재로 당겨올 수 있었던 건 함께 영화를 하는 친구들 덕분이다. 각기 다른 모양의 불안을 안고 있지만 자기만의 페이스로 조금씩 나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고, 서로 다독이고 응원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줬고, 아주 먼 곳에 있던 이 영화를 눈앞에 가져다주었다.
박송열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
CAST 원향라, 박송열
실직 상태에 빠진 부부 ‘영태’와 ‘정희’. 당분간은 평화로운 일상을 즐겨보기로 한다. 그런데 점차 생활은 빠듯해지고, 그 와중에 정희의 모친 생일이 다가온다. 돈을 두둑하게 마련해온 다른 형제들과 달리 이들 부부만 선물을 못 드리고 돌아온다. 초라한 기분을 느낀 영태는 괜히 정희를 탓하고, 화가 난 정희는 홧김에 절대 쓰지 말자고 다짐한 사채를 내러 간다. 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전작인 <가끔 구름>을 원향라 배우와 둘이서 카메라를 세워두고 연기하는 일종의 셀프 카메라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이 방식으로 한 번 더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작 여건으로 보면 매우 제한적인 상황이었다. 이 방식을 고려하면 거대한 사건을 다루기보다 일상적인, 미니멀한 영화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환경이 먼저 정해지고 그 환경에 맞는 이야기를 구상하게 된 거다. 코로나19 여파로 여기저기서 실직 사태가 벌어지던 시기이기도 해서 실직한 부부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 속 감정 이 영화의 지배적인 감정이 슬픔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일상적 영화이니만큼 주체할 수 없는 슬픔보다 통제가 가능한 슬픔을 다루고자 했다. 관객이 슬픔 안에서 나름의 위트를 발견하면 좋을 것 같다.
결정적 장면 생일 파티 장면. 극 중 부부의 일상을 흔들어놓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보는 사람에 따라 별거 아닌 일에 왜 이렇게까지 극단적 감정으로 치닫는지 의아할 수도 있을 거다. 그렇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캐릭터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작품을 만드는 일 자체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슬픔을 다루지만 어디에서 웃음이 나오게 할지 가장 많이 고민했다. 관객의 몰입을 끝까지 끌어가려면 이 영화만의 리듬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위트와 유머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흐름에 놓일 수 있도록 편집하는 것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나의 영화 선생님 한 편의 재미있는 영화를 보면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서 보곤 한다. 감독의 말을 통해 그 영화의 바탕에 깔린 철학을 알게 되고, ‘그럼 나는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라는 사고를 거듭하는 훈련을 한 것이 영화 만들기의 기본을 다져준 것 같다. 또한 여러 노동의 과정에서 깨닫게 된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영화로 이끈 존재는 앞선 시대의 영화와 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정원희 <둠둠>
CAST 김용지, 윤유선, 박종환, 김진엽
전자음악 뮤지션을 꿈꾸던 ‘이나’는 의도하지 않은 임신으로 비혼모가 되었다. 그런데 불안장애에 시달리는 엄마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아이는 위탁모에게 맡기고, 꿈도 접은 채 평범한 회사원으로 무기력하게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같이 음악을 공부한 친구이자 이제는 스타가 된 ‘민기’의 화려한 무대를 보면서 자신의 꿈을 상기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무렵 전자음악의 성지인 베를린에 갈 기회를 제공하는 오디션 정보까지 알게 됐다. 이나는 현실을 떠나기 위해 다시 음악을 하기로 결심한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시기는 프랑스에서 단편 작업을 마친 직후인 2016년이었다. 평소 일렉트로닉 음악을 즐겨 들으며, 그 안에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댄스음악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게 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영화 속 감정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은 주인공이 꿈꾸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다는 점이고, 슬픔은 비혼모라는 신분, 불안한 엄마의 존재 등 그를 둘러싼 갈등이 쉽게 극복하기 힘든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자신의 길을 나아가려는 주인공의 모습을 따라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정적 장면 마지막 오디션을 보는 클럽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트는 장면. 그리고 직후에 일어나는 일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음악을 통해 자유를 얻으려는 한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과정이 꽤 험난하다는 것도. 그렇지만 지속적으로 여러 순간들을 지나가다 보면 어떤 결말 아닌 결말에 도달하게 되고, 그렇게 조금씩 성장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주인공이 처한 환경에서 느끼는 불안과 엄마가 느끼는 불안. 그리고 일렉트로닉 음악, 정확히는 테크노 음악 안에서의 진동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잘 연출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의 영화 선생님 특정한 영화 선생님이 있다기보다 오랫동안 다양한 영화를 접한 것이 나를 영화 속 어딘가로 이끈 것 같다. 특히 유학 시절에 장르와 형식을 떠나 꾸준히 많은 영화들을 만나면서 감동받고 매력을 느낀 부분에 더 집중하고 고민하면서 나만의 색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서보형 <벗어날 탈 脫>
cast 임호준, 위지원, 김현정, 성용훈, 장준휘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영목’. 여자친구 ‘선화’는 약을 먹으면 낫는다고 하지만, 그는 실체적 죽음을 느끼고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단식과 108배 같은 수행에 매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 끝이 두려워 결론에 이르기 직전의 순간만 그리는 작가 ‘지우’에게 한 큐레이터가 애니메이션을 다시 해보라고 권한다. 이야기는 결국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피해온 지우는 새로운 형식을 찾는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묘한 한 남자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불교에 심취해 매일 108배와 명상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체험해보고 싶었는데 아무리 해도 되지 않아서 괴로웠다. 몇 년을 매달리다 결국 어떤 체험을 했는데 그것이 예상외로 아무것도 아니어서 놀란 경험이 있다. 그 이후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이것을 영화적 언어로 풀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는데 적절한 형식을 찾을 수 없었다. 불교에 불일불이(不一不二)라는 말이 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는 이 말은 모든 분별이 사라진 자리를 말하는데, 이 철학을 대입하는 순간 이야기가 풀리기 시작했다.
영화 속 감정 불교의 십이연기에 따르면, 안이비설신의(눈, 귀, 코, 혀, 피부 감촉, 마음 작용)가 그것의 인식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생김, 소리, 냄새, 맛, 닿는 느낌, 마음 흐름)을 만나 감정이 생긴다고 한다. 즉, 촉(접촉, 만남)이 수(느낌, 감정)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기쁨과 슬픔 역시 만남과 연관되어 있다. 닿을 수 없는 것 혹은 닿았던 것이 떨어지는 것이 슬픔을 낳고, 그것은 홀로란 정서를 만든다. 반대로 닿는 것, 접촉의 감각은 기쁨을 가져온다. 깨달음에 닿고자 애쓰는 주인공 영목에게 닿을 수 없음은 무상과 같은 허무,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야 이루어지는 어떤 만남은 관객에게도 환희와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한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벗어날 탈 脫>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남자와 새로운 미술 작품에 영감을 줄 무언가를 찾는 여자가 시공간을 초월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생하는 이야기다. 개개인이 서로 단절된 지금의 팬데믹 상황에서 너와 나(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의 관계에 대해서 이 영화가 보다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이 영화에는 두 인물과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릴레이 경주를 벌이듯이 일정한 리듬 속에서 배턴터치를 잘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주요했다. 그것이 잘 구조화되어야 마지막 순간의 정서가 온전히 전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나의 영화 선생님 나를 영화로 이끈 선생님은 장인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감독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많지만, 이 영화와 관련해서는 로베르 브레송 감독을 언급하고 싶다. 그의 저서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에 대한 언급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유성 시네마가 발명한 것은 침묵이다.’ ‘이미지와 소리가 서로 의지하게 하면 안 된다. 이미지와 소리는 각자의 역할에 따라 마치 일종의 릴레이처럼 구사되어야 한다.’ 영화를 단지 영상으로 보는 태도와 달리, 브레송은 이미지와 소리가 만들어내는 관계성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고, 그 태도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김덕중 <컨버세이션>
CAST 조은지, 박종환, 곽민규, 김소이, 송은지, 곽진무
20대 후반 파리에서 함께 유학했던 세 여자. 어느새 30대 후반이 되어 각자의 삶을 고민하기 바빴던 세 사람은 오랜만에 과거의 기억을 경유하며 프랑스어로 대화를 시도한다. 한편, 아파트 공원에서 유모차를 끌고 있는 두 남자가 있다. 대화를 유심히 들어보면 이들 사이에 관계가 미묘했던 순간들이 있고 지금은 추억으로 남았다는 걸 추측할 수 있다. 이어 카메라의 시선은 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것으로 보이는 남녀로 향한다. 이들은 사실 어제부터 이어진 묘한 관계에 놓여 있고, 진실과 거짓말 게임을 통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쩐지 둘의 관계는 계속 이어질 것만 같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어떤 영화의 작품 제작비 펀딩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성사되지 않을 수 있는 펀딩만을 기다리고 있기엔 다급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체 제작비 규모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작품을 구상해보자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한정된 예산 안에서 어떻게 하면 흥미로운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내가 찾은 방식은 수다 혹은 대화였다. 카페에서 신나게 수다 떠는 옆 테이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 같은 재미, 그 지점에서 출발한 영화다.
영화 속 감정 친숙한 인물들의 사사로운 말들, 그 말을 하기까지 지나온 각자의 삶의 궤적을 유추해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극적으로 그려지진 않았지만 많이 다른 상대로 인해 상처 입는 인물도 나오는데, 그 인물의 어떤 순간을 지켜보며 어쩌면 공감에 이를 수도 있을 테고.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명료한 메시지는 없다. 이 영화에서 부딪치기도 하고 빗겨가기도 하는 많은 말 중 특정한 말에 강조점이 있거나 대화 간 우열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자신에게 물어본다면 오히려 영화 안에 비어 있는 공백을 누군가가 채워주기를 소망한 것 같다. 영화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에 대한 대답을 바라는 게 아닌가 싶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우선 긴 호흡의 컷을 어떻게 하면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게 만들지를 놓고 고민이 컸다.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의 동선을 깊이 연구했고, 또 어떤 장면에서는 외화면 사운드에 몰두했다. 결국은 인물이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에 반응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어떨 때는 매우 단순한 계획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얻곤 했고, 반대로 복잡하게 세운 계획이 현장에서 뜻대로 풀리지 않아 고생한 적도 많았다. 무엇을 어디까지 계획하고, 어떤 것을 즉흥과 우연에 기댈 것인지 구분 짓는 것이 어려운 지점이었다.
나의 영화 선생님 뒤늦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알게 되며, 그의 작품을 초기작부터 순서대로 쭉 본 적이 있다. 작품을 보며 그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실험한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에 놀랐다. 무엇보다 영화적 형식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인물에 대한 애정,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고 영화로 담아내고 있어 그의 영화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제한 <소피의 세계>
CAST 아나 루지에로, 김새벽, 곽민규, 김우겸
외국인 ‘소피’는 필리핀에 있는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시 한국에 머문다. 그는 ‘수영’과 ‘종구’가 사는, 인왕산이 보이는 어느 집에서 나흘간 머물다 떠난다. 2년 후, 수영은 소피의 블로그에 있는 자신들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리고 여행자 소피가 기록한 나흘간의 시간을 다시 살필 기회를 얻는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아마 경복궁 근처였던 것 같다. 어딘가를 다녀오던 길이었는데, 문득 어떤 외국인이 누군가를 찾으러 한국에 오게 되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 사람이 우리나라를 찾아온 이유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그것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후 주인공의 여정을 따라 나머지 이야기와 인물들이 하나씩 생겨났다. 그리고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얼추 정리될 무렵, 왠지 그 여정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고, 이 느낌이 영화 속 시간의 흐름을 결정하도록 도왔다.
영화 속 감정 <소피의 세계>에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과거의 무엇이 된 순간에 영화가 시작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우리가 예전 일들을 떠올리거나 이야기할 때의 마음과 닮아 있는 것 같다. 거기엔 떠올려서 좋은 것도, 힘든 것도, 슬픈 것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다 지나가버린 과거라는 아쉬움도 있을 테고, 과거의 조각들을 다시 생각하면서 새롭게 뭔가를 이해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지나간 과거의 소소한 기억이 주는 감흥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
결정적 장면 수영과 종구가 집 문제로 다투는 장면.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순간이라 연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장면이었다. 게다가 대사의 양이 A4 용지 7장 정도로 굉장히 많았다. 여러 번 반복해 찍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 장면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숏에 담기로 결정했다. 리허설을 하지 않고 특별한 코멘트도 없이 두 배우에게 오롯이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들에게 시간을 좀 준 후,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촬영을 했는데, 첫 테이크에 오케이가 났다. 테이크를 여러 번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느 정도 고생을 각오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끝나서 스태프들이 모두 좋아한 기억이 난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적은 제작비로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사실이 꽤 큰 부담이었고, 그 문제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다. 최소한의 인원과 장비로 프로덕션을 꾸려야 했기 때문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지 꽤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결과 스태프는 나를 포함해 9명으로 구성했고, 카메라도 한 숏을 제외하곤 32mm 단렌즈 하나로 11회 차로 압축해 촬영했다. 모든 스태프가 능력 있는 베테랑들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촬영 때 넉넉지 못한 보수를 감내해준 만큼, 모두에게 보답할 기쁜 순간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영화 선생님 대학 영화과 입학 당시의 나는 영화광과 거리가 멀어서, 다른 학우들에 비해 영화에 대한 식견이 매우 떨어졌다.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와 감독이 대부분이었고, 그 사실이 무척 부끄러웠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다소 강박적으로, 1천 편이라는 숫자에 집착해 영화를 가리지 않고 본 시기가 있었다. 결국 1천 편 근처에도 못 갔지만, 그 덕분에 내가 마음 깊이 좋아하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에릭 로메르, 아키 카우리스마키, 켄 로치, 홍상수, 차이밍량과 같은 감독들의 작품이다. 다분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이 감독들의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 영화의 뛰어난 완성도도 닮고 싶은 부분이지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부분은 그 감독들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다. 영화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나 진심을 측정할 기준은 없지만, 그런 태도가 작품에 드러난다고 믿는다. 또 그런 태도가 담긴 영화가 좋다. 부족하지만 내 영화에도 진심이 담겼다고 믿고 싶고, 만약 그렇다면 언제까지나 그 마음이 영화 안에 머물길 바란다. 언젠가 진심을 잃으면, 그땐 영화 만들기를 그만둘 생각이다.
윤서진 <초록밤>
cast 이태훈, 김민경, 강길우
세 들어 사는 집을 곧 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원형’의 가족은 어느 날 왕래가 없던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은 슬픔보다 본인들 몫의 부의금을 챙기기에 급급하다. 그 모습을 허탈하게 바라보던 원형의 가족은 장례를 마치고 할아버지의 집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시골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정리하던 그들은 그곳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여자를 마주한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몇 해 전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가족들과 할아버지의 시골집을 정리하면서 겪은 일이 내게 뚜렷한 잔상을 남겼다. 여러 기억의 조각이 모여 이상한 감정의 덩어리가 되었고, 그 감정을 알기 위해 지금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영화 속 감정 영화를 보고 나서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극영화의 범주 안에서 새로운 감정의 형태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사실 나는 어떤 큰 사건을 겪었을 때 바로 그 일로 인한 감정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주인공 원형의 가족 역시 큰 사건을 겪었지만 본인들의 감정을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 간에 서로 슬픔을 표현하지도 않을 테고. 그렇지만 그것 역시 어떤 형태의 감정이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태는 아닐 것이다. 무감각도 감각이고, 무감정도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표현되지 못한 감정일수록 시간이 지나며 더욱 날카롭고 선명해져 우리를 괴롭힐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미묘한 감정이 영화에서 느껴진다면 아주 기쁠 것 같다.
결정적 장면 모든 장면.(웃음)
고민과 사유의 시간 영화적인 요소를 영화에 어떻게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이 많았던 작품이다. 내면을 들여다보기보다는 표면을 포착하려고 노력했고, 그 표면의 물질들이 만나서 무궁무진한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배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초록밤>은 극영화지만 서사로만 층위를 쌓아 올리지 않고 배우들의 시선, 컷의 길이, 카메라의 미세한 움직임과 사운드의 공명 같은 영화적인 요소로 관객에게 말을 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잘 쌓고 배치할 것인지 여전히 고민 중이고, 그 고민은 앞으로도 쉬 끝날 것 같지 않다.
나의 영화 선생님 영화 촬영을 준비하며 유튜브에서 몇 해 전 박찬욱 감독님이 참여한 부산국제영화제 마스터 클래스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화를 만드는 마음가짐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감독님의 말이 당시 혼란스러운 내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영화를 준비하며 감독의 머릿속에서 모든 게 나왔지만 같이 일하는 크루들에 의해서 그것이 수정되고 변해가는 과정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함께 일하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면 영화 작업을 할 이유가 없다.” 회의할 때, 촬영 현장에서 항상 그 말을 생각했다. 내가 동료들을 믿을 때 그들도 나를 믿어주고 그 믿음의 힘이 모여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결국 영화는 감독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산업 예술이므로. 앞으로도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영화를 만들고 싶다.
김미영 <절해고도>
cast 박종환, 이연, 강경헌
과거 청년조각가상을 받았던 ‘윤철’은 40대가 된 지금, 상업 조각가 겸 인테리어 업자로 살고 있다. 이혼 후 대학강사 ‘영지’와 동거 중이며 딸 ‘지나’는 전처와 살면서 미대 입시를 준비 중이다. 어느 날 윤철은 지나의 일로 학교에 불려가고, 그곳에서 만난 지나의 친구 ‘연희’에게 지나한테 대신 사과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한편 지나는 미대 입시 준비를 관두고 출가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지나 문제로 고민하던 시기에 동거 중인 영지마저 떠나겠다고 통고한다. 윤철의 마음에 온갖 상념이 휘몰아친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무엇을 더 알 수 있게 될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영화 속 감정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감정들. 무엇인지 헤아릴 수도 없는 가운데 자신을 뒤흔들었던 감정과 그 감정을 비로소 거리를 두고 보게 된 순간들이 이 영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결정적 장면 아빠가 딸의 거처를 찾아오는데, 딸이 찬물에 빨래를 하고 있다. 딸이 아빠가 가져온 종이봉투 안을 들여다보는 동안, 아빠는 딸의 자리에 앉아 무념무상에 들어 열심히 그 빨래를 대신 한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어딘가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우리 자신을 본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이 영화에 어울리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영화에서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지만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영화가 무엇으로 채워져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끝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다.
나의 영화 선생님 시기마다 다시 보게 되는 영화들이 스승이 되었다. 이 영화를 만들던 시기에는 미야케 쇼 감독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행복한 라짜로>, 임권택 감독의 <안개마을> 등이 그러했다. 기대를 안고 살아갈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첫째 가상의 천국, 둘째 마음의 지옥, 셋째 나 아닌 것들의 발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배웠다.
김경래 <올 겨울에 찍을 영화>
CAST 정승민, 박가영, 이유하, 전세원
시나리오작가 ‘경민’은 마음에 드는 주인공의 이름을 찾을 때까지 탈고하지 못하는 징크스가 있다. 그동안 주인공 이름은 전 여자친구 ‘영원’이 지어주었는데, 그녀와 헤어진 뒤 징크스가 다시 찾아왔다. 경민은 새로운 영화 시나리오 마감일이 다가오자 영원을 찾아가 주인공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며 시나리오 내용을 설명한다. 결혼을 앞둔 연인이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에게 안면 인식 장애가 생겨서 여자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영원은 경민과 하루를 보내며 이야기를 듣고, 주인공에 대해 점점 윤곽이 잡히는 동시에 예전의 일을 떠올린다. 하루가 끝나기 전 경민은 영원에게 다시 만나고 싶다고 고백한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매년 한두 차례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찾아온다. 그 후에 시나리오 구조와 핵심 이미지를 구상하고 뼈대가 잡히면 정승민 작가와 함께 살을 붙인다. 보통 이런 방식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이번 영화도 지난가을에 올겨울에 영화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예전에 메모해둔 주인공 이름에 징크스가 있는 시나리오작가와 헤어진 연인의 사랑 이야기가 새로운 구상과 잘 맞는다고 판단해 시작하게 됐다.
영화 속 감정 내가 만들었지만, 관객이 느낄 감정을 정의 내린다는 것이 참 어렵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제안하고 싶은 것은 가장 편한 자세로 집에 있는 물건들을 보며 하나씩 기억을 떠올려보라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기억과 추억은 ‘과거를 떠올린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지만, 개인마다 두 단어를 사용하는 기준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같은 과거를 갖고 있어도 누구는 기억하고 누구는 추억한다. 이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고민과 사유의 시간 생업과 영화 만드는 작업을 병행하다 보니 한정된 예산으로 정해진 시간 안에 장편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선 효율성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 시나리오의 초고부터 탈고까지 이야기 구조와 캐릭터 감정의 압축 과정을 계속 반복해야 한다. 이 압축의 과정에서 가장 많은 고민을 했다.
나의 영화 선생님 소설가 정용준, 만화가 최현주. 20대 후반, 스스로 영화에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두려 한 적이 있다. 그 와중에 창작 욕구는 남아 있어서 소설과 만화를 배우기 위해 두 분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그때까지는 영화만 공부했는데, 소설과 애니메이션을 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다시 영화를 하게 된 일화가 있다. 정용준 선생님이 내가 만든 영화와 소설을 다 보시고는 종강 뒤풀이 때 “넌 다시 영화 해라. 소설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선명히 기억 난다.
이우동 <한 끗>
CAST 이우동, 오윤수, 이지훈, 이재혁, 김한결
형사 ‘도협’은 현직 국회의원 딸의 살해 용의자인 조현병 환자 ‘성균’을 검거해 2계급 특진과 함께 정보과로 발령을 받은 상태다. 팔에 깁스를 하고 있는 파트너 형사 ‘영미’는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다. 한편, 아끼던 딸을 잃은 국회의원은 성균을 죽이기 위해 사형제도를 부활시키려 한다. 방송사에 압력을 넣어 검거 현장과 현장 검증을 재연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보내면 사형제도를 부활시키라는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게 된 도협과 영미는 성균의 검거 현장을 재연하며 방송사 스태프들과 대치하게 된다. 리허설 과정에서 도협과 영미의 치부가 드러나고, 특종에 혈안이 된 방송 스태프들 탓에 현장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던 중 살인자 성균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DIRECTOR’S NOTE
이 영화의 시작점 ‘한마음의 집’이라는 조현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기관에서 조현병 환자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영상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병에 대한 지식이 없어 망설여지면서도, 글을 쓰는 작가로서 알지 못하는 대상에 호기심과 탐구심이 일어 작업을 시작했다. 시나리오 두 편을 완성해 한마음의 집 최동표 대표님에게 보여드렸고, 많은 논의 끝에 만든 영화가 <한 끗>이다.
영화 속 감정 심각한 주제를 해학적으로 다룬 블랙코미디를 좋아한다. 이 영화에서도 내가 생각한 주제를 해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러한 방법으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고 싶었다. 한편으론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괴물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할 수도, 힘을 가진 자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끝나버리는 엔딩에 비참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결정적 장면 극 후반부에 환풍기가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돌아가는 장면. 조현병 환자들은 환청을 듣지 않기 위해 향정신성 약물을 먹고 생활하는데, 약을 먹는 자신의 모습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고 한다.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차별 대우를 받기 때문이다. 극 중 조현병 환자인 성균은 환청을 들으면서도 이러한 이유로 약을 거부한다. 성균의 고통을 알 수 없었던 도협은 괴기스러운 환풍기 소리를 통해 성균이 겪는 환청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이렇게 환풍기 신은 조현병 환자가 겪는 고통을 체험하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로써 중요한 시퀀스이자 주제를 내포한 장면이기 때문에 관객이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 이 영화를 찍기 전에는 조현병 환자와 어울리거나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가끔 대중매체의 뉴스에서 조현병 환자가 연루된 사건을 접하는 것이 전부였다. 공교롭게도 내가 접한 뉴스는 대부분 ‘살인을 저지른 흉악한 살인범이 조현병을 앓고 있었다’는 식의 보도였다. 그러나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오히려 조현병 환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가 많다고 느꼈다. 환자들에게 임금을 일부러 적게 주거나 지불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폭력이나 폭언을 일삼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느끼고 깨달은 것을 영화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결국 인간은 질병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악할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다소 실험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기 위해 <한 끗>을 만들었다.
나의 영화 선생님 영화를 함께 만드는 동료들이 나의 선생님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혼자서 글을 쓰다 보면 아이디어가 한정적이고, 스토리가 엉성하거나 뻔한 전개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시나리오의 약점이나 보완할 지점에 대해 스스로 돌파구를 찾지 못할 때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럴 때마다 이들은 나에게 조언을 해주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한다. 때론 각자 견해가 달라 설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영화는 어김없이 깊이가 생기고 세련되게 다듬어진다. 넘쳐나는 영상물의 홍수 속에서 신선하고 새로운 영화를 창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한계를 뛰어넘어 신선한 영화를 완성하려면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가 종합적으로 어우러져야 한다. 그렇기에 더욱 주변 동료들이 소중하고, 영화 작업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그들에게 늘 고마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