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시대를 맞이하며, 온 스크린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최초로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Over The Top)을 품었다. OTT에서 방영 예정인 화제의 드라마 시리즈를 선보이는 ‘온 스크린’ 섹션을 신설한 것. 감독과 배우를 비롯한 영화계의 주요 스태프가 영화와 OTT 드라마 현장을 자유롭게 오가며 일하는 최근 한국 영화 산업의 현주소를 기민하게 반영하는 한편, 영화 매체의 확장된 흐름과 가치 역시 적극 포용하려는 의도다. 이미 201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넷플릭스가 제작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2018)에 3개 부문의 상을 쥐여주면서 그 위상을 인정한 것을 고려하면, 부산국제영화제가 드라마 시리즈에 발 빠르게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전통적인 극장 개봉작뿐 아니라 OTT 시리즈물까지 포괄한 것은 시의적절한 판단이다. 세계적으로 온 스크린과 유사한 섹션을 운영하는 선도적인 영화제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토론토 국제영화제 등 소수에 불과하다.
올해 온 스크린의 초청작은 3편으로, 연상호 감독의 <지옥>, 김진민 감독의 <마이 네임>, 아누차 분야와 타나와 조쉬 킴 감독의 <포비든>을 미리 만날 수 있다. <지옥>과 <마이 네임>은 넷플릭스 시리즈, <포비든>은 HBO ASIA의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다. <지옥>(6부작 중 3부작 상영)은 아시아 프리미어, <마이 네임>(8부작 중 3부작 상영)과 <포비든>(8부작 중 2부작 상영)은 월드 프리미어로 분류했다.
연상호와 최규석이 선보인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지옥>은 갑자기 나타난 천사의 형상이 지옥행을 선고하는 초자연 현상을 다룬다. 사회적 혼란을 틈타 부흥한 종교 단체 새진리회와 이들에 맞서 사건의 실체와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서로 충돌한다. K-좀비 열풍을 일으킨 <부산행>(2016), <반도>(2020)처럼 장르영화의 재미에 집중하는 연상호 감독이 원작 각본 집필에 이어 드라마 연출을 맡았다. 구원 같은 종교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동시에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장르물의 특징이 강화된 이야기다. 유아인, 박정민, 김현주, 원진아, 양익준 등 저마다 다른 독특한 개성을 지닌 연기자들이 호흡을 맞추면서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이 작품의 체크포인트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원작에 대한 충실도다. 인기 웹툰이니만큼 많은 이들이 이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작품이다. 반전이나 결론을 알고 있는 관객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원작을 충실하게 유지했을지 혹은 원작에 없는 새로운 요소를 끌어왔는지가 관건이다. 둘째, 웹툰의 판타지를 얼마나 CG와 특수효과로 구현해냈는지도 중요하다. 지옥으로 안내하는 사자들의 등장이나 지옥행을 선고받은 자들이 참혹한 모습으로 죽는 장면 등은 웹툰의 한계를 넘어 영상으로 시각적인 즐거움을 줄 수 있다. 참신한 소재나 장르적 쾌감으로 화제를 일으킬 수 있는 작품으로,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이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번째로 상영되며 BFI 런던국제영화제의 LFF 시리즈 스릴 부문에 초청되었다.
‘괴물이 되어도 좋다. 넌 내가 죽인다’라는 문구를 티저 포스터에 내세운 <마이 네임>은 넷플릭스 시리즈 화제작 <인간수업>(2020) 김진민 감독의 차기작이다. 여성 서사를 중심으로 한 강렬하고 매혹적인 액션 누아르로,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 조직에 들어간 ‘지우’(한소희)가 새로운 이름으로 경찰에 잠입한 후 마주하는 냉혹한 진실과 복수를 그린다. 불륜 드라마의 역사를 새롭게 쓴 <부부의 세계>(2020)의 여다경과 로맨스 드라마 <알고있지만,>(2012)의 유나비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배우 한소희는 <마이 네임>에서 색다른 모습을 선보인다. 공개된 포스터에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혈투를 끝낸 후 얼굴에 상처를 입고 피투성이 손으로 칼을 든 한소희가 도드라져 보인다. 복수를 위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액션과 몸부림,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몰입도 높은 김진민 감독의 연출, 맛깔스럽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보일 풍성한 드라마가 이 작품의 성공을 책임질 듯하다. 한소희를 위한, 한소희에 의한 이 작품에는 충무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박희순와 김상호 등도 출연한다. 한소희를 재발견할 <마이 네임>은 넷플릭스에서 10월 15일에 공개된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 <포비든>은 태국 출신의 아누차 분야와타나 감독과 한국계 미국인 조쉬 킴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았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는 2부작은 아누차 분야와타나가 연출한 부분으로 그는 <더 블루 아워>(2015), <마릴라: 이별의 꽃>(2017) 등을 연출했다. 특히 <마릴라: 이별의 꽃>으로 싱가포르와 태국 등 아시아 영화제에서 주목받았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지석상을 수상했다. 조쉬 킴 감독은 태국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성장영화 <체커게임에서 이기는 방법>(2015)으로 극영화에 데뷔했으며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아버지의 장례식을 위해 방콕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 마을로 향하는 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담은 <포비든>은 태국에서 배우 겸 가수로 활동 중인 크리스타나품 피불송그램을 필두로 태국 최고의 라이징 스타들이등장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태국 호러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감각적인 공포감을 선사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향후에도 OTT 작품의 다양성 확보에 더욱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온 스크린’이 머지않아 영화제에서 관객 친화적이며 가장 기대되는 섹션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보인다. writer 전종혁(영화평론가)
4인 감독의 추전작
4명의 감독이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기대해 마지않는 8편의 영화를 언급했다.
박선주 감독
<강변의 무코리타>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여정이라는 점에서
<카모메 식당> 등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특유의 느긋한 여유로움과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좋아해
<강변의 무코리타> 역시 기대하고 있다.
<수자쿠>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의 따뜻한 분위기에 반해서
그의 영화들을 찾아 하나씩 보던 때가 있었다.
<수자쿠>는 감독의 첫 장편영화다.
이야기를 쫓기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영화 속 풍경과 인물들을 바라보면
조금씩 스며드는 아름다운 영화다.
신준 감독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모녀’가 아닌 ‘두 여자’라는 제목부터 좋다.
근래 이토록 응집된 제목을 본 적 있나 싶다.
늘 가족이기에 아는 것과
가족이라서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공존하는데
그 끝이 서로를 예리하게 찌를 것 같다.
아파도 봐야겠다.
<붉은 석류>
스틸 컷을 보고 반했다.
주체적 여성의 선택을 다룬다는 설명에
잎 하나 없는 앙상하고 커다란 나무와
선택된 시간으로 카자흐스탄 특유의 공간감을 담는 배경까지.
김칫국을 마시자면,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정성을 다해 담은’
스틸 컷처럼 영화도 무척 기대된다.
남궁선 감독
<살람 봄베이!>
1989년 평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미라 네어 감독의 극영화 데뷔작.
감독은 확고한 다큐멘터리적 진실성에 기반을 둔
뉴 시네마적 태도로 인도의 거리에 뛰어들었다.
남성 동료들에 비해 이름이 덜 기억되는
여성 감독의 이 야심찬 데뷔작을
동시대에 만나지 못했던 내게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설렌다.
<성덕>
현시대 모든 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인
팬덤 문화의 여러 얼굴을 그 안에 몸담았던 이의
시각으로 담아낸다니 호기심이 생긴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소속감과 즐거움을 주는 팬 문화 안에서
우상화되는 대상이 그릇된 길을 갈 때
팬들이 결국 그 길을 따라가게 하는
인간적인 메커니즘이 궁금하다.
이 다큐멘터리에 담긴 풍경들이
현대를 이해하는 좋은 텍스트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최하나 감독
<살인자 말리나의 4막극>
‘인도네이사에서 온 독특한 동양 서부극’이라는
소개글만 봐도 강렬한 작품이다.
그런데 남자들의 위협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 하는
과부가 주인공이라니 더욱 궁금해진다.
제목이 ‘과부 말리나’가 아니라
‘살인자 말리나’라는 게 중요하다.
<기억의 땅>
전작 <번식기>의 섬뜩한 스틸 컷을 보고
킴퀴 부이 감독의 영화가 궁금해졌다.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정서가 있을 듯해 기대된다.
동남아시아 여성 감독들의 영화를 더 많이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