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더고스트(Show Me the Ghost)
개봉 2021.09.09.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코미디, 공포
국가 한국
러닝타임 83분
20년 지기 동갑내기 절친 ‘예지’와 ‘호두’는 보증금 2천만원에 월세 33만원짜리 집을 마련한다. 착한 가격에 깔끔한 방을 얻었다는 기쁨도 잠시, 집에 귀신이 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귀신보다 무서운 서울 물가 앞에 무너지고 만 이들은 집을 나가는 대신 직접 귀신을 퇴치하기로 마음먹고 셀프 퇴마를 진행한다. 연이은 취업 실패와 그로 인한 생활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겪게 된 주거 문제까지. <쇼미더고스트> 속 청춘들을 둘러싼 환경은 가히 절망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우정과 연대는 환난을 딛고 일어설 발판이 되어주었다. 부족함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해내고자 몸부림친 결과는 작은 성취로 돌아왔고,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할 열쇠가 되었다. 건강한 에너지를 가진 인물들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위로를 건넨 김은경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옴니버스 단편 영화 <황금시대> 이후 12년만에 <쇼미더고스트>로 돌아왔다. 그간의 공백기간을 어떻게 보냈나?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나리오 구상부터 촬영, 편집까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길게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꾸준히 작업을 해오다가도 극심한 패배감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래서 한동안 영화를 잠시 그만뒀었다. 그때 느꼈던 건 영화에만 매달리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하던 내 모습이 분명 건강하지 않다는 거였다. 그래서 다른 일로 시선을 돌렸다. 대학원에서 통합예술치료를 공부하며 연극과 영화를 통한 치료를 접했는데, 아픔과 상처를 극으로 표현하며 치유받는 과정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개인의 상처가 작품으로 승화되며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를 치유하는 에너지로 거듭나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예술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받기 위한 영화에만 매달려있던 나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된 거다. 영화 창작이라는 험난한 여정을 이어가며 맞닥뜨리는 불안과 상처도 언젠가는 작품 속에서 빛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그렇게 다시 작업을 시작했고, <쇼미더고스트>를 만들었다.
단편영화 <망막>, <오르골>부터, 2006년 개봉한 <어느날 갑자기 세번째 이야기-D-day>까지, 영화를 처음 만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호러 장르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있는 그림자에 관심이 많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튀어나와 우리를 사로잡는 어두운 그림자는 무섭지만 매혹적이다. ‘호러’는 나에게 있어 그림자와의 서사를 가장 극적으로, 그 어떤 장르보다도 호들갑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 장르다.(웃음) 촬영, 미술, 편집, 사운드 등 온갖 영화적 기술이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으니까. 과거에는 억압되어 있던 그림자에 사로잡혔을 때 느껴지는 공포감에 집중했지만, 점점 그림자와 어떻게 화해하는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쇼미더고스트>는 그 출발점에 있는 영화다.
무의식 속 그림자와의 ‘갈등’에서 ‘화해’로 시선을 돌리게 된 계기가 있었나? 영화 작업을 하면서 늘 ‘성취감’에 대해 고민했다. 빠른 시간 안에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없으니 성취감을 동력 삼아 나아가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한 편을 만들어 내는 일이 너무나 힘들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진짜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이뤄내는 작은 성취감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생각을 바꾸니 더 건강하게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인생의 고비를 겪은 청춘들이 함께 힘을 모아 작지만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루어 내는 이야기를 하게 된 것도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공포에 코미디를 버무린 소동극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면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청년들의 모습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반된 성격을 가진 두 장르를 결합하는데 있어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었나? 처음에는 코미디와 공포가 서로 보완해 줄 수 있는 장르 조합이라 생각했다. 물론 큰 착각이었지.(웃음) 웃기거나 무섭거나, 둘 중 하나만 제대로 해내는 것도 어려운데 두 가지 모두를 해내야 했으니 쉽지 않았다. 두 장르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려 했다. 그 가운데 절대 놓치지 않으려 했던 건 원혼에 대한 예의다. 억울한 원혼이 공포의 수단으로만 전시되거나,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표현되지 않기를 바랐다.
극중 20년 지기 친구 사이로 등장한 한승연, 김현목 배우의 합이 눈에 띄었다. 주인공 예지와 호두 역에 각 배우를 캐스팅하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 관객들이 캐릭터의 성장을 보며 함께 뿌듯함을 느끼기를 원했다. 그래서 공감되는 캐릭터를 설계하려고 노력했고 캐스팅에도 공을 많이 들였다. 배우들의 전작도 중요했지만 특히 인터뷰를 많이 참고했다. 삶의 가치관과 태도가 연기에 반영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모습이 담긴 예능 프로그램도 최대한 많이 찾아보면서 실제 말투나 분위기가 캐릭터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관찰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단연 한승연과 김현목 배우가 눈에 들어왔다. 한승연 배우의 귀여우면서도 단단하고, 엉뚱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 예지 역과 너무 잘 어울렸다. 김현목 배우의 예의 바른 태도와 따듯한 눈빛은 바로 호두를 떠올리게 했다.
촬영 현장에서 두 배우에게 특별히 강조했던 디렉팅이 있나? 두 배우 모두 굉장히 영리하다. 나보다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그래서 특별한 디렉팅을 하기 보다 배우들의 의견을 많이 존중하려 했다. 한승연 배우는 알록달록한 색깔을 가진 배우다. 기쁠 때는 더 기쁘게, 슬플 때는 더 슬프게. 감정의 색깔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김현목 배우는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 디테일에 강하다. 그렇게 파악한 캐릭터를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할 줄 아는 배우다.
“<쇼미더고스트> 속 인물들은 결코 절망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무기력한 모습 대신 어떻게든 해내려고 몸부림 친다.
이들이 작은 성취를 통해 나다운 방식으로, 건강한 방법으로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해내는 과정에 집중했으면 한다.”
영화에는 보증금 2천만원에 월세 33만원짜리 집을 어렵사리 구하고, 취업난을 겪으며 미래에 대한 막막함으로 좌절하는 현실 청년들의 모습이 녹아있다. 이들을 영화의 핵심 인물로 내세움으로써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나? 요즘 청년들에게는 취업난, 주거난, 생활고도 중요한 이슈지만, 사실 가장 위태로운 것은 자존감의 상실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자존감을 잃으면 열등감으로 무기력해지거나, 남의 고통을 통해 병적인 우월감 또는 쾌락을 얻으려 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쇼미더고스트> 속 인물들은 결코 절망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집에 귀신이 들어 한바탕 고생을 하면서도 살풀이 스타트업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예지,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유머와 긍정을 잃지 않는 호두. 무기력한 모습 대신 어떻게든 해내려고 몸부림치는 청춘들이다. 이들의 에너지 덕분에 영화는 현실의 무거운 이슈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내내 활기를 잃지 않는다. 중요한 건 이들이 이루어 낸 성과가 아니다. 작은 성취를 통해 나다운 방식으로, 건강한 방법으로,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해내는 과정에 집중했으면 한다.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해 볼까?’하며 일어서는 것. 건강한 에너지를 가진 청춘들이 영화를 명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영화 속 귀신은 스토킹 피해자인 여성이다. 오늘날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거론되는 소재를 코미디 호러 장르로 끌어들인 이유가 있나? 성범죄 이슈는 지금의 청춘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들의 고통에 함께 분노하고 아파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이 가진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해서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마음가짐이다. 영화도 이 생각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내는 인물이 피해자 ‘소희’라면, 그 목소리에 반응해 주는 인물이 ‘예지’다. 예지는 피해자가 당한 사고를 보며 무력함을 느끼지만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어떠한 장르로든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노력하는 것 자체로 중요한 일임을 말하고 싶었다.
“연대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전형적인 호러 영화와 비교했을 때, <쇼미더고스트>안의 여성 캐릭터에는 어떤 특징이 있을까?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인물로 표현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은 좌절의 순간에도 무언가를 생각해내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인물. 이는 주인공 ‘예지’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인 ‘소희’도 어떻게든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들고 싶었다. 서로 공감하고 연대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꼭 담기길 바랐다.
유독 기억에 남는 신을 꼽아보자면. 극 후반부에 예지와 호두, 기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울먹이는 장면이 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호두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예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괜찮아’라는 한 마디가 가장 중요한 대사다.
<쇼미더고스트>가 관객에게 어떻게 남길 바라나? 나에게 인생은 공포와 코미디가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미스터리와도 같다. 때로는 막막하고 불안한 현실에 숨이 막히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작은 기쁨이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쇼미더고스트> 역시 불안 속에서의 작은 성취를 얘기하고 있다. 인생의 고비와도 같은 순간에 놓여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가볍게 쉬어 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연대’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도 함께 전하고 싶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던 캐릭터들이 ‘우리 한 번 해볼까?’ 하며 한 걸음 내딛는 모습을 보며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