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 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
<소리도 없이>는 아이러니하다.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시체를 처리하고,
유괴와 납치에 가담하는 태인과 창복은
누구보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맡은 바를 해낸다.
오랜 파트너로서 서로의 삶을 살피기도 한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잔인한 범죄가 일어나는
그들의 동네는 따뜻하고 정겹게 보인다.
이야기는 끝내 두 사람이 행하는 범죄와
따뜻한 성정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않고,
아이러니를 해소하지 않은 채 마무리된다.
누군가는 범죄물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드라마라 말하는 이들 사이에서
홍의정 감독은 어떤 답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질문을 하는 쪽을 선택했다.
영화를 보면서 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었는지,
그 판단의 과정이 무결하다 말할 수 있는지,
당신은 괴물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소리도 없이>는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남는 마음의 짐으로부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영화다.
영화 <소리도 없이>가 세상에 나온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작품에 대한 마음은 어떤 형태로 남아 있나? 좀 놀랐다. 벌써 1년이구나. 너무 오랜 시간 준비했던 작업이라 그런지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이 거의 안 든다. 영화를 만들면서 느꼈던 흥분과 감사함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걸 봐서는 이 작업이 내게 굉장히 중요하고 큰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남을 뿐이다.
준비할 때도 이 느낌이 이어질 거란 예감이 있었을까? 작업할 때는 절박해서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물론 현장에서 즐거운 순간이 많았기 때문에 이걸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마음이란 게 ‘어떻게든 가지고 있어야지’라고 작정한다고 남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선명하고 자세한 기억이 남아 있는 건 내게도 드문 일이다.
현장에서 느꼈던 즐거움이나 흥분은 어떤 것에서 기인한 감정인가? 시나리오를 썼을 때 어떤 식으로 만들 거란 계획은 있지만, 사실 배우가 캐릭터를 본인의 것으로 만들기 전까진 완벽히 결과를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 현장에서 배우들이 내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신기하고 재미있는 새로운 것을 정말 많이 보여줬다. 그들의 연기를 가까이에서 첫 관객으로 보는 짜릿함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신인 감독이다 보니 하고 싶은 걸 유연하지 않은 방법으로 요구할 때도 있었는데, 그런 것도 다들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곤 했다. 그런 순간들이 모두 행복했고, 즐거웠다.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상과 백상예술대상, 그리고 판타지아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이 이어졌다. 인생의 운을 여기에 다 쓴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리도 없이>가 가져다준 좋은 일이 많았다. 수상 역시 그중 하나고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상에 집중하진 않는다.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나. 이 사건은 후배를 응원해주는 마음 정도로 받아들이려 한다.
수상 소감 중 ‘이 황당한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갔을 때 시나리오를 하나도 바꾸지 말고 같이 가자고 해주신 두 대표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그 말을 듣고 이 영화의 황당함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사실 나는 황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황당하게 보이려 작정한 것도 없었고. 그런데 이 시나리오를 가지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피드백을 들으면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게 꽤 다수의 사람들에게 불편하거나 부담되는 주제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수정을 요구받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고, 그래서 시나리오 그대로 가자는 제작자를 만났을 때 ‘이분은 취향이 독특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제로 초고와 완성본을 비교하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많은 버전을 만들었다. 지금 제작자 전에 이야기에 관심을 주신 분들 중 어떤 분들은 영화에 조직폭력배가 나오기 때문에 전형적인 조폭영화로 수정되기를 바랐고, 반대로 아이들이 나오기 때문에 가족 드라마가 되길 바라는 분도 있었다. 그러나 상업적이지 않은 이야기의 주제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수정해도 그분들이 원하는 결론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처음 버전이 맞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서 수십 번의 수정고를 만들었고 결국 예상한 대로 처음에 썼던 버전으로 돌아왔다. 먼 길을 돌아온 셈이다.
80번의 수정을 거치면서도 놓칠 수 없었던 이 영화의 고집스러운 점은 무엇이었나? 단순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 영화의 정체성이라 할 만한 부분이 엔딩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엔딩 부분에 초희가 들릴 듯 말듯한 작은 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데, 그 부분을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영화를 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보길 원하는 이들의 바람이었다. 그렇지만 주제 중 하나가 보는 이들에게 가치판단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에 엔딩만큼은 절대 바꿀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고집이라면, 범죄에 가담하는 태인과 창복이 마치 평범한 회사원처럼 맡은 바를 열심히 해나가는 부분도 중요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살면서 소비자가 되는 동시에 잠재적인 범죄의 방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해왔다. 예를 들면 소비의 과정에서 노동 착취나 환경 파괴가 있을 수 있는데, 그게 피부에 닿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면서 도덕적으로 잘 살고 있다는 환상을 가질 때가 있지 않나. 그 아이러니를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태인과 창복을 성실한 인물로 그렸고, 이들이 친근하게 보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밝고 화사한 톤을 유지했다.
영화 제목이 <소리도 없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말을 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태인을 떠올리게 된다. 원래 제목은 ‘우리는 소리도 없이 이렇게 괴물이 된다’였다. 그런데 너무 주제를 대놓고 얘기하는 것 같아, 그걸 어떻게 감출까 고민하다 ‘소리도 없이’만 남겼다. 많은 이들이 태인이 말이 없어서 지은 제목이라 생각하는데, 그렇게 이해해도 좋지만 원래 의도는 비틀어진 성장을 한 우리 모두가 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었는지, 그 판단의 과정이 무결하다 말할 수 있는지, 당신은 괴물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를 묻는 제목이기도 하다.
캐스팅에 관해 묻고 싶다. 영화를 보며 유아인 배우와 유재명 배우를 비롯한 모든 배우가 각자의 역할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선 태인은 시나리오 쓸 때부터 덜 성숙한, 소년의 모습을 가진 성인 남자라는 게 중요한 지점이었다. 그리고 창복은 범죄에 가담하는 일을 함에도 말 한 마디에 정겨움과 따뜻함이 묻어나서 관객들이 절대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길 바랐다. 이 조건을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유아인, 유재명 배우였다. 그렇지만 조금도 이들과 함께하게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배우면 좋겠다생각 했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나의 망상이 현실이 되었다. 사실 캐스팅이라 말할 순 없고, 내가 두 배우에게 오디션을 본 거나 다름없다.
(웃음) 그럼 역으로 오디션을 거쳐서 같이 작업할 수 있던 데에는 어떤 힘이 작용한 거라 생각하나? 아직도 미스터리다. 두 배우도 취향이 특이한가 보다, 하하. 아니면 신인 감독이 절실하게 뭔가를 해보려는 게 딱해 보였을 수도 있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고, 운이 많이 작용한 거라 생각한다.
첫 장편영화다. 이 사실이 영화를 만들 때 영향을 끼치기도 했을까? 첫 장편이라는 생각보다 이게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아마 첫 장편을 만드는 감독은 다 비슷한 심정일 거라 생각한다. 기적 같은 기회를 얻은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최대한 담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려는 간절함이 있었고, 동시에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 수 있겠다는 공포감도 컸다. 그 공포가 영향을 미쳤냐고 물어보면 그 정도는 아니고, 순간순간 생각이 나는 정도였다.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무심코 차기작에 대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 ‘써본 이야기는 많지만 제가 다음 것을 할 수 있을까요’라고 대답하면서 드는 마음 정도.
첫 장편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묻는다면,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여러 방향으로 볼 수 있겠다. 원하는 장면을 모두 담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럼에도 내 계획 밖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것들이 충격적이고 흥분되고 감사한 일이었기 때문에 심적인 만족도는 상당히 높다.
<소리도 없이>를 만들면서 새롭게 발견한 지점 중, 감독으로서 자신의 모습도 있었나? 나는 이런 감독이구나 하는 지점들. 집착과 고집이 세다는 것? 사실 저예산이라 테이크를 많이 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테이크마다 기대 이상의 연기가 나오니까, 한번 더 보고 싶은 욕망이 컸고 그걸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들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나는 그 쾌감을 참지 못하고 자꾸 더 보고 싶어 했다.
그 쾌감이 반대로 어려운 지점이기도 했을 것 같다. 어렵다고 하기엔 애매한 게 나는 무조건 보고 싶어했고, 주변 사람들이 막는 식이라 내가 고통받은 건 없었다. 하하. 물론 이쯤에서 끝내야 한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이를 인정받는 시간들도 있었다.이제 나아갈 길이 더 명확해졌다고 추측해도 될까? 감사한 이들 덕분에 이 영화를 만들면서 했던 고민들이 나만 하는 건 아니었다는 위로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길이 명확해졌다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단지 많은 이들에게 거절당했던 이야기가 단 몇 사람의 관심을 받아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경험으로 인해 ‘누군가는 있다’는 희망이 생기긴 했다. 원래 포기를 잘 안 하는 스타일이긴 한데, 버티는 시간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써도 누군가는 관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내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행보는 어떤 방식이길 바라나? 태인처럼 소리도 없이 나아가고 싶은지, 아니면 창복처럼 계속 이야기하며 나아가고 싶은지 묻고 싶다. 한 가지 방식을 택하기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가고 싶은 방향이 있다면, 불필요한 설명을 더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말했을 때 그게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