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외치는 퍼포먼스 팀 ‘레츠피스(Let’s Peace)’와 10대 청소년들이 1년간의 여행에 나섰다. 목포를 시작으로 천안, 밀양,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넘어 베를린, 다시 서울, 그리고 북한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보이는 철원까지. 선과 벽을 허물고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며, 평화의 실체를 찾아가는 이들의 여정은 흐르는 계절과 반대로 갈수록 맑고 해사해진다. 그리고 끝내 이 여정은 평화라는 단어에 담긴 엄중한 의미는 내려놓고 각자의 작은 평화를 찾게 만든다. 너무나 맑고 경쾌해서 도무지 응원하지 않을 수 없는 청년들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시간, 박소현 감독과 송영윤 감독은 다큐멘터리 <사막을 건너 호수를 지나>에 그 길을 담았다.
우선 평화 여행을 이끈 레츠피스와 만난 계기부터 묻고 싶습니다. 박소현 제가 11년 전에 여행을 테마로 공부하고 연대하는 대안학교 로드스꼴라의 길별(길잡이 별의 준말로 이 학교에서 교사를 지칭하는 단어)이었어요. 그때 제자 중 일부가 지금 로드스꼴라의 길별이 되었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꾸린 프로젝트 팀이 레츠피스예요. 이들이 제게 10대 청소년을 데리고 떠나는 여정을 기록해달라고 요청한 게 이 영화의 시작이었죠.
영상을 기록하는 것을 넘어 영화화한 데에는 또 다른 의도나 기획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되는데요. 박소현 제가 반공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거든요. 저와 같은 세대 사람들은 알 텐데, 초등학교 때 반공 포스터를 그렸어요. 시간이 좀 지나서 평화와 통일을 말하던 때에도 그게 주입된 거지, 일상과 닿아 있다고 여겨지진 않았고요. 그런데 1990년대생으로 이뤄진 레츠피스 팀원들은 반대로 평화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들이 분단을 바라보는 관점과 이들이 그리는 평화상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렇게 영화로 확장하게 됐어요.
그리고 송영윤 감독님이 합류했고요. 송영윤 박소현 감독님의 전작을 워낙 좋아하고, 또 제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큰 고민 없이 여정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촬영에 대한 부담과 책임이 컸겠지만, 한편으론 유라시아를 기차로 횡단하는 여행에 대한 설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고 경험하며 얻는 것에 대한 기대와 두근거림이 있잖아요. 송영윤 박소현 감독님은 로드스꼴라에 있을 때 이미 한 번 경험하셨는데, 저는 처음이었어요. 출발 전날 잠도 못 잤죠.(웃음) 경험하기 전부터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지금도 창밖 풍경이나 기차 소리가 선명히 기억나요. 사실 우리나라 같은 분단된 작은 반도국가에서는 며칠 동안 기차에서 지내면서 지역과 나라의 경계를 넘는 경험은 할 수 없잖아요. 이 경험을 통해 제 시각이 넓어졌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어요. 그리고 넓은 관점은 제 작업으로도 이어지더라고요. 사실 모든 작업의 시작점은 의심 그리고 호기심이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저한테도 많이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요즘도 저희끼리 또 가고 싶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박소현 그냥 저희끼리요. 촬영이 아니라.(웃음)
영화를 보면서 마치 누군가의 다이어리 혹은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 들었어요. 구성을 몇 개의 챕터로 나누고, 각 챕터가 시작될 때마다 제목과 여정의 목적지가 표시된 지도가 나와요. 중간중간 감상이나 생각이 드러나는 글도 등장하고요. 어떤 의도를 담은 구성인가요? 박소현 실제로 이 영화가 책처럼 읽혔으면 하는 의도가 있어요.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글들은 이들이 여행을 다녀와서 엮은 에세이집에서 발췌한 것이고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구성을 짜게 되었어요.
각자 가장 마음에 남는 챕터를 떠올린다면요? 송영윤 저는 ‘그대에게(동행)’ 챕터를 제일 좋아해요. 그게 영화의 마무리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고요. 우리 영화를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마음으로 보여줘야 할지 고민했을 때, 계속 동행이라는 말을 떠올렸어요. 여정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누군가 함께 떠날 땐, 나도 중요하지만 ‘나’와 다른 ‘너’도 되게 중요하잖아요. 각기 다른 마음과 행동이 모여서 하나의 작은 물결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 게 동행 챕터이지 않나 싶어요. 박소현 저는 ‘방황하는 그대에게’. 며칠간 기차를 타고 가면서 차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나와요. 그중 ‘백야토론’ 방에서 서로 고민을 상담해주는 대화가 참 좋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통일이나 평화 같은 대의적인 키워드에서 출발했지만, 결국은 각자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을 잠시나마 해소하기 위해, 그리고 실은 자신의 일상이 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떠난 여행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실제로 영화를 본 후 평화에 대한 생각이 가뿐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여정은 분단국가의 평화, 통일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속 평화를 찾는 길이 아닐까 싶었고요. 개개인의 평화가 우선되어야 모두의 평화를 이룰 수 있을 테니까요. 박소현 편집 과정에서 ‘영화 자체가 평화, 통일이라는 키워드에 갇혀서 다른 이야기가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실한 기조가 있었어요. 그래서 여행에 포커스를 맞추고 싶었고요.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도 사실 대의가 아니라 벽 너머의 땅으로 가고자 하는, 자유롭게 오가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이 컸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그런 식으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거창한 것을 내세우기보다 자연스럽고 가볍게 평화에 다가가고 싶었죠. 송영윤 평화라는 말은 수없이 들어봤지만 이게 어디에서 비롯되는 건지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이 여정이 눈에 보이지 않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거나 알아가는 과정에서 평화의 실체를 찾아가는 일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덧붙여 이 영화는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생각해요. 이 여정도, 저희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혼자서는 하지 못하던 일인데, 연대함으로써 힘이 생기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거니까요.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우리는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외롭고 들뜨고 슬프고 황홀했다’라는 소회를 담은 글이 인상 깊습니다. 두 분은 어떤 감상을 남기고 싶은가요? 박소현 들뜨고 힘들고 기쁘고 힘들고(웃음) 황홀했다. 송영윤 저는 그저 황홀했다고만 하겠습니다.(웃음)
1년간의 여행을 마친 레츠피스의 행보가 다른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도 등장해요.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를 응원하는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며 또 다른 평화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소현 그들이 1년간 이어진 프로젝트를 마치고 끝이 아니라 다른 현장으로 확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3년이 흐른 지금은 기후 위기와 관련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행동반경이 확장되었더라고요. 어떤 주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모습을 저도 지켜보는 중이에요. 송영윤 부조리한 상황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게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잖아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또 저렇게 투쟁을 하나 보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들은 다가가고 지지하는 것으로 외로운 사람에게 힘을 보태요. 그게 작지만 사회가 바뀌는 전조 증상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모두가 사회운동가가 될 필요는 없어요. 이들의 행동처럼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작은 움직임이 각자 추구해야 하는 평화의 방식이 아닐까 싶어요.
이 작품을 만들면서 생각한 평화, 그리고 바라는 평화의 모습은 어떤가요? 박소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고, 그래서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이런 것들이 차별과 혐오를 없애는 길이 아닐까 싶고, 같은 맥락에서 차별금지법도 제정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평화는 다양성이 존중받는 상황이거든요. 송영윤 요즘 ‘내가 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왜 영화를 만들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요. 그러니까 이런 마음인 것 같아요. 제가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만큼, 또 어딘가에선 평화롭지 못한 순간을 지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걸 제 나름의 방식으로 작업물로 만들고, 이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싶고, 그 마음이 모여서 세상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은 거죠. 이런 게 제가 추구하는 평화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요.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정을 시작하며 느낀 설렘과 떨림이 되살아날 것 같은데, 어떤 마음인가요? 박소현 2019년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한 후, 이듬해에 코로나19가 시작되고 남북 관계도 냉각되면서 좀 생뚱맞은 영화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경계를 넘어 기차로 여행을 하는 이야기인데, 경계가 다 닫힌 상황이니까요.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는 추세라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며칠 전부터 오미크론이 등장하고.(웃음) 그러면서 영화도 영화지만,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 싶더라고요. 또 다른 개념의 단절 상황을 마주하는 느낌이랄까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어쩌다 보니 정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가 되었네요. 그럼에도 분명 지금 필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박소현 2018년을 기록한 영화라 당시에 떠돌던 키워드 중 하나인 종전, 세월호, 촛불 혁명이 등장해요. 그래서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영화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어요. 지금은 다른 키워드들이 부유하는데, 지금 이 영화를 꺼내 보여주는 게 옳은가 싶었고요. 그런데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면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영화가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요. 지난 역사가 미래를 만들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