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을 출간한 지 한 달이 가까워집니다. 반응이 무척 좋아요. 새롭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있나요? 출간하고 일주일 동안은 변화가 없었어요. 앞으로도 계속 이러지 싶어 ‘앗, 철수다. 철수. 빨리 다른 일 찾자.’ 하면서 바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거든요. 근데 그러고 나서 엄청나게 바빠지는 거예요. 이 책으로 인해 온갖 일이 일어나고, 또 하고 있어요. 오늘 같은 일도 그렇고요. 태풍의 눈 안에 있는 것 같아서 정확히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살면서 이렇게 바쁜 적이 처음이어서. 다만 걱정거리가, 걱정의 종목이 변했다는 느낌은 들어요.
쓰는 사람으로써 할 법한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거죠? 맞아요. 출간 직후 ‘이제 진짜 뭐 하면서 먹고살지?’ 하고 고민했다면 지금은 쓰는 일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렇게까지 쓰고 싶은 사람인가, 그렇다면 무엇을 쓰고 싶은 사람인가, 그렇게까지 알려지고 싶은 사람인가, 어떤 태도로 이 일을 해야 하나 같은 질문을 하게 됐어요. 당사자로서 지금의 상황을 봤을 때는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 인생을 마치 남의 인생 보듯 하면 ‘그래도 책 한 권 낸 것 치고는 계속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해봐’, ‘더 해볼 만하지 않아?’ 하고 말해줄 거 같거든요.
당연히 계속 해볼 일이죠. 계속 써주세요.(웃음) 출가를 선언하고 홀연히 사라진 아빠에 대해 쓴 ‘파더스 어드벤처’나 ‘모녀전철’을 읽는 동안은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내가 이 사람의 인생을 읽고 있어도 되나 싶기도 했고요. 가공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일에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삶을 글로 옮겨보려는 시도는 언제 처음 했어요? 살면서 10대 때가 가장 힘들었는데 당시에 ‘어딘글방’에서 글을 썼어요. 또래들에게 따돌림당하고, 부정당하고 배제되었던 경험에 대해 주로 썼던 것 같아요. ‘왜 사람들은 다 나를 싫어할까’,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가 주제였죠. 도저히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고, 사실 글로도 제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긴 했는데요. 용기와 각오가 필요했다기보다 어디에라도 털어놓고 싶어서 쓰지 않았나 싶어요. 남에게 이야기한다는 마음으로 쓴 건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무지에서 나온 용기죠. 엄청나게 뜨거운 분노를 덜어내고 싶어서 종이 위에 옮겼더니 종이가 다 타버리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불이 활활 타오르는데 그 한가운데서 막 뛰어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쓰는 족족 실패하는 글이었어요. 나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나로부터 단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는 글이었죠.
자전적인 이야기라 해도 영화나 소설 등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나면 창작자가 그 이야기에서 멀리 떨어지는 체험을 한다고 하잖아요. 양다솔 작가 역시 글로 옮기고 책으로 엮는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한 발 벗어났음을 느끼기도 했나요? 그걸 목적으로 썼고, 이 책에 실린 글 대부분이 저를 위해 쓴 글인데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걸 쉽게 떨쳐낼 수 없는 것 같아요. 딴짓을 못 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때 찾아온 감정과 느낌에 엄청나게 집중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글과 비슷한 함량의 서사로 일장 연설을 해서 승화하든, 글로 쓰든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매듭을 지어야, 머리를 쪽 짓듯 꽉 묶고 나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제 글을 제일 많이 읽는 것 같아요. 읽으면서 자주 울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무언가 씻겨 내려가는 것 같고요. 좋은 기억, 슬픈 기억 할 것 없이 이걸 여기 두고 가야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그다음을 향할 수 있을 테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외장하드에 옮겨놓고 나면 어느 순간 전혀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고, 그사이 어떤 것이 새로 생겨나고, 동시에 나로부터의 기분 좋은 소외가 만들어질 거라고 기대했어요. 실제로 그랬고요. 내 기억 속에만 있을 때는 온전히 나만의 것이지만, 이제 누구의 것도 될 수 있고, 완전히 다른 모양이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무도 읽지 않는다고 해도 쓸 수 있는 거죠.
그 솔직함 때문일까요. 이 책은 다 읽고 나면 글쓴이와 굉장히 친밀해지는 경험을 하게 해요. 모든 에세이가 이런 경험을 주진 않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는지 묻기도 하는데요. 내가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다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에세이는 자신에 대해 아무렇게나 쓸 수 있잖아요. 내가 그때 지독히 별로인 사람이었는데, 마치 그런 적 없다는 듯 편집할 수 있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포장할 수도 있고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이 책에 제가 조금 거만하고 재수 없게 나오는 장면들이 있는데, 그것까지 다 써야만 재미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제가 웃긴 거죠. 난 도대체 왜 그럴까 하면서.(웃음) 이 책에서 가장 웃긴 사람도 저고, 이상한 사람도 저예요.
등장인물에 대한 정밀한 묘사도 좋았습니다. 특히 ‘달팽이 이야기’의 다정한 묘사가 아름다워요. 누군가를 섬세하게 그리는 태도는 실제 삶의 태도와 닮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양다솔 작가가 반하게 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던가요? 어떤 사람을 기어코 사랑하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낯선 사람을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한데 낯선 사람을 한두 번 보고 얻을 수 있는 정보라는 것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얻은 정보로는 그 사람에 대해 오판을 내릴 확률이 높잖아요. 그런 제 오해와 오판을 당사자가 계속 뒤집어주기를 바라거든요. 저의 단정을 뒤집어줬을 때 제가 진심으로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요. ‘달팽이 이야기’는 친구를 매우 사랑하는 눈으로 보고 쓴 글인데요. 별 뜻 없이 순수한 동기로 행동하는 사람을 좋아해요. 자기 자신은 충분히 잘 알지만, 타인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요. 그런 사람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들의 행동 패턴을 관찰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야생동물 관찰하듯이. 제가 반하게 되는 사람은 그렇지만 제 곁에서 오래 머무는, 함께 오래 사랑하는 친구들은 대체로 저보다 너그럽고 상냥하고 현명한 사람들이에요. 그런 사람들이라 저에게도 좋은 면이 있다는 걸 알아봐주기도 하고요.
책 곳곳에서 유머와 위트도 반짝입니다. 유머에서 자조도 큰 비율을 차지하고요. 한편으로는 웃기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이 사람이 왜 이토록 농담을 놓지 못할까 마음이 쓰이기도 했습니다. 작가로서는 굉장한 재능이지만 ‘일어나서 웃겨봐’ 안의 문장처럼 ‘할 말이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저 사람을 웃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서 농담이 마려운 사람인 거죠. 농담은 제가 가진 것 중 꼽을 만한 능력 같아요. 어릴 때는 내 가장 큰 상처를 마치 남의 일처럼 농담하듯 말해서 듣는 친구들이 제발 그만하라고 할 정도로 마음 아픈 농담을 많이 했어요. 이제는 슬픈 이야기는 슬프게 말해야 하는 때도 있다는 걸 알아가고 있어요. 슬프게 말한 뒤 그걸 농담으로 바꾸는 것과 애초에 슬픔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나의 슬픔이나 상처를 농담으로 에두르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힘을 키우고 싶어요. 이런 것들을 알고 느껴가며 내가 농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새삼 깨닫게 됐어요.
양다솔 작가에게 농담은 유독 다면적인 것이죠. 맞아요. 방어기제이자 삶의 큰 즐거움이에요. 밖에서 한없이 까불고 돌아온 날에는 오히려 힘이 나요. 농담이라는 것이 나로부터 일정 거리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작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으면 유효하지 않잖아요. 내게 이런 감각이 있다는 걸 이제 아니까 잘 갈고닦아서 내 무기로 사용하고 싶은 거예요. 재미라는 것이 엄청난 상위개념이잖아요. 내 유머가 어떻게 발현되는지, 어떻게 하면 재미있어지는지 그 과정을 더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보고 싶은 거죠. 그래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완벽히 재미있게 만들어보고 싶다고 느낄 때 그게 가능하길 바라요.
어떤 것에 같이 웃고, 웃지 않느냐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웃음의 기준에 가치관과 윤리관, 취향 등 많은 것이 담겨 있으니까요. 어떤 점에서는 작가 또한 조심하고 염려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하면서도 피곤해지는 농담이나 슬픔을 눙치기 위한 농담보다는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 무장 해제시킬 수 있는 농담에 대해 더 생각하게 돼요. 모든 말이 기록되고 박제되는 요즘 같은 때에 말하는 일이 두렵기도 한데요. 저 같은 까불이가 잘못 발 디뎠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갇히면 어떡하나 걱정되고요. 동시에 그래도 누군가는 열심히 까불어서 그 지평을 좀 넓혀야 하지 않나, 사람들에게 다른 농담을 제시해야 하지 않나 싶고요.
마무리할까요. 저를 가장 각성시킨 건 이 책의 첫 장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에요. 작가는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극진히 대접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매 끼니를 충실히 챙기고, 계절을 촘촘히 느끼려 노력하죠. 삶에 치이다 보면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이 나를 대접하는 일일 텐데요. 나를 대접하는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한다고 보나요? 어릴 때부터 내가 나를 챙기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챙겨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딱히 세상이 나를 대접해주는 것 같지도 않았고요. 내게 주어지는 시급이, 내가 살 수 있는 집의 모습이 그랬어요. 왜 사람들은 ‘잘 산다는 것이 뭘까?’에 대해 늘 생각하잖아요. ‘잘 산다’는 게 갈수록 말하기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 자기 삶과 마주하며 살고 있다고 봐요. 얼마나 극진하고 정직하게 자기 삶을 마주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지 아닌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 삶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구해야 하는 것이고, 내가 원하는 걸 펼칠 수 있게 하는 사람 역시 나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계속 나에 대해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 뭐 하고 싶니?’ 자문하면서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 ‘한번 해볼까’ 하고 내가 나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아무리 이상하고, 하찮고, 누군가에게는 가당치도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요. 그게 자신을 모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이 책이야말로 작가가 스스로를 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느낍니다. 책 마지막 장에 엄마에게 헌사하는 문장을 썼잖아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이제 작가가 다른 세계로 가는구나, 새 막이 시작되겠구나 직감했어요. 그래서 좋았고요. 감사합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엄마는 이 헌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우상 같은 소리 하네’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