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릿 우먼 파이터
유지혜(작가) 책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나는 봄이 지난 후부터 슬금슬금 내 방으로 기어들었다. 가을까지 완성해야 할 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의 짧은 휴가를 빼고는 계절은 창문 사이로 지나갔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스스로를 극단으로 밀어붙여야만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올해의 몇 달은 꽤 버거웠다. 위로가 되는 건 따뜻한 물줄기뿐이라 나는 샤워기 아래서 자주 울었다.
지칠 때쯤 장안의 화제이던 춤 경연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얼마 전 종영한 <스트릿 우먼 파이터>였다. 첫인상은 화려했다. 진한 화장에 자기주장이 강한 의상들. 하지만 음악이 나오면 다른 게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춤이 시작되는 순간 눈빛, 표정, 움직임에만 눈길이 갔다. 춤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들은 탁월했다. 춤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절정이었다. 쉬는 시간도 없다. 모든 걸 몇 분 안에 남김없이 소진하는 것이다. 게다가 저게 다 즉흥이라니. 대체 연습을 얼마나 한 거야. 놓치면 돌아오지 않을 순간 위에서, 그마저도 박자를 쪼개 어깨와 발목, 무릎에 싣고, 자신감과 표정까지 연기하면서. 우물쭈물, 의기소침은 춤의 세계에는 존재할 수 없는 단어다. 춤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자신감으로 더 빛났다. 그들은 따로 빼놓은 마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춤을 췄다. 꼭 그 무대가 마지막이라도 되는 양.
나는 춤에 푹 빠졌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질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책을 읽으면 나도 해내야 한다는 마음에 존경과 조바심이 섞이지만, 못해도 상관없는 일은 즐길 수 있다. 나와 그들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오히려 위로가 된다. 따라 할 수 없는 신비롭고 먼 세상은 휴식이 될 수 있다. 글만 쓰다 보면 글이 필요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글과는 반대로 몸으로 쏟아내는 장면을 보니 희열이 느껴졌다. “무대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라는 댄서들의 말에 전율이 올랐다.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했다. 처음에는 나도 쉽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거울 속 내 꼴은 우스꽝스러웠다. 야구 모자도 써보고 아이라인도 그려봤지만 도움이 안 됐다. 나는 오랜만에 긴장과 부담감을 내려놓은 채 깔깔거렸다. 몸을 움직이면 스트레스가 확 풀렸다. 나는 매일 조금씩 춤을 췄다. 또 까먹고 노트북 앞에 굳은 채 앉아 있어도 화요일 밤만 되면 춤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프로를 보면서 도저히 춤을 까먹을 수 없는 거다. 그 대신 나 자신을 까먹는다. 내 생각과 일을 까먹어버렸다. 몸을 가볍게 흔드는 것만으로도 불안은 나와 멀어졌다. 나는 불안감이 아닌 안도감에 가끔씩 울었다. 목적 없는 행위는 자연스레 내 기분과 영혼을 드높였다.
사실 거기까지만 해도 고마웠다. 그들 덕분에 일상이 조금 경쾌해졌으니. 그런데 회가 거듭될수록 춤이 아닌 그 춤을 추는 사람들에게 위로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강인한 춤 뒤의 그들은 여리고 귀여웠다. 방송 초반에는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의 눈물이 화면을 채웠다. 눈빛을 쏘고 압도적인 표정을 취하던 그들은 어느 순간 아름답게 무너졌다. 그들은 감동해서 울거나 속상해서 울었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그들보다 더 많이 울었다. 주목받지 못하거나 오해받는 시간을 견뎌온 그녀들의 이야기가 꼭 나의 이야기 같았다.
그 눈물은 지난 노력들에서 흘러왔다. 기약 없는 지난한 시절에서 왔다. 화려한 무대 뒤에 고정되었던 사람들. 우리는 마침내 그들이 버텨온 시간에 주목하게 되었다. 한 번도 주목받지 못했던 그녀들에게 빛이 비춰졌다. 대중의 관심 아래 그들의 미래는 이제 땡볕이었다. 뒤의 뒤에서 앞의 앞으로. 역전 드라마다.
누구나 뒷모습에 위로받는 법. 어쩌면 우리는 타인의 성취보다는, 그 이면의 고통을 더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보장된 성공은 공감은커녕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버텨온 이들의 성공은 희망과 위안, 그리고 용기까지 준다. 그러나 ‘하면 무조건 된다’가 아니라 ‘계속 하면 언젠가 된다’는, 꾸준함이라는 조건이 붙은 성공이다. 결국 치열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이뤄낸 시원한 성공. 나와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녀들은 이미 이야기와 실력이 충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춤은 이전과는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번째 춤이었다. 그들은 이전의 고생을 다 만회할 만큼 비상했다. 주인공이 된 채 새 춤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댄서들은 훨씬 더 유명해졌다. 누군가의 성공이 그토록 기뻤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어떤 미움이나 질투도 섞이지 않은 깨끗한 박수를 받았다. 그런 사람들은 성공해도 되니까, 그런 사람들이 잘돼야 하니까. 나는 그들의 활약에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나도 사연 있는 춤을 추고 싶어졌다. 나의 글로.
스트릿 우먼 파이터. 길 위에서, 언제나 과정에 머물며, 춤으로 세상과 싸우는 여자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끝까지 지켜온 마음. 그에 따른 떠들썩한 결실. 씩씩함, 섹시함, 사랑스러움이 모두 담긴 아주 길고 끈질긴 춤. 그녀들은 올해 나의 구원자였다. 춤의 마음을 따라 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어딘가에 닿겠지, 하고 생각했다. 니체의 말처럼, 더 멀리가 아니라, 높게, 더 높게.
내추럴 와인
유지성(dj 겸 프리랜서 에디터)
맥주로 시작해 피트 향이 적당히 도는 위스키로 흥을 돋운 뒤 위스키소다로 마무리. 보통의 밤을 그렇게 보냈다. 좀 더 신나면 중간중간 스트레이트로 한두 잔 더 하기도 했다. 코로나19가 닥치기 전 주말 밤이면 음악을 틀러 다녔고, 믹스 세트의 기승전결만큼 몸의 온도를 조절했다. 과하게 취하면 흐트러지고, 맨정신으로 음악을 틀면 별로 재미가 없었다. 댄스 플로어 위의 사람들 정도는 아니라도 적당한 취기가 유지될 때 더 알찬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댄스 플로어가 멈췄다. 2년이 지났다. 2021년은 2020년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가끔 일하러 가든 놀러 가든 클럽보다 바가 익숙해졌고, 그마저도 밤 10시에 문을 닫았다. 취기의 ‘기승전결’을 만들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한두 시간 놀자고 속도를 올려 머리끝까지 취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주말을 보내는 것 또한 무료했다.
밤 10시에 모두 해산하면 집에 가는 길에 와인을 한 병씩 샀다. ‘2라운드’를 개시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시간이었다. 한 병을 통째로 골라야 하니 좀 더 유심히 보게 됐다. 와인 리스트는 대개 맥주나 위스키 리스트보다 친절해서 품종과 더불어 이 와인이 어떤 맛을 내는지 구체적으로 명시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어렵지만 조금씩 흥미가 생겼다.
코로나19 전에도 종종 와인을 마시긴 했다. 위스키나 맥주처럼 취향이 구체적인 건 아니었다. 대표적인 포도 품종을 몇 가지 외워두는 정도. 취향은 결국 제한된 예산 안에서 최고의 선택을 하기 위한 관심이고, 나는 와인에 그럴 만큼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적당한 값에 산 와인은 그저 적당할 뿐이었다. 맛을 음계로 표현하면 ‘도-레’쯤에 그쳤다. 달다가 떫게 끝난다. 산미가 올라오다가 쌉쌀하게 마무리된다.
올해는 달랐다. 수시로 와인 리스트가 바뀌지만 그 과감한 선택마저 신뢰할 만한 가게가 생겼고, 주말마다 새로운 와인에 하나씩 도전했다. 단골 가게가 생긴다는 건 서로의 호불호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넓은 무지의 과녁이 점점 좁혀지던 어느 날, 복잡한 인상의 내추럴 와인을 만났다. 애시드하게 열려 상큼한 과일 향이 났다가, 타닌의 떫은맛이 가볍게 돌고 피니시의 여운을 남기며 천천히 사라졌다. 온도에 따른 변화를 확인하는 즐거움까지, 한 잔으로 기승전결을 만드는 ‘도-레-미-파-솔’의 세계가 거기에 있었다.
10시가 가까워지면 못내 아쉽던 주말 밤이 10시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 와인 유통사에 전화를 걸어 재고를 확인하고, 입고처와 재입고 시기를 확인하며 맘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음반이면 몰라도 술을 마시겠다고 그렇게까지 해본 적은 없었다. 위드 코로나 체제와 함께 밤이 길어졌다. 주말 일정이 다시금 빠르게 차기 시작했다. 이른 밤 두 손 무겁게 귀가하는 대신 바텐더에게 묻는다. 여기 (혹시) 와인도 있나요?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강유가람(감독) 영화 <우리는 매일매일> <이태원>
2020년 초부터 다큐멘터리 <우리는 매일매일>의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다. 배급을 함께하기로 한 KT&G 상상마당 시네마 영화사업부는 코로나19 상황으로 극장도 휴관 중이니 개봉을 미루자고 했다. 초조해하면서 1년여의 시간을 기다린 끝에 나는 결국 KT&G 상상마당 시네마가 영화사업부 직원들을 정리해고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함께하기로 했던 직원들의 안위도 걱정이었지만, 영화의 배급이 난망해지자 답답한 마음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2021년 초 배급사 인디스토리를 만났다. 개봉 지원 사업에 여러 번 탈락한 후 수많은 사람이 마음을 모아준 소셜 펀딩으로 간신히 개봉 비용을 마련하고, 극적으로 개봉에 성공했다. 6월쯤 백신 접종도 시작되고 극장에도 조금씩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개봉한 지 1주 차가 지난 상황에서 갑자기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다시 상향되었다. 계획했던 관객과의 대화 행사는 계속 뒤로 밀리거나 취소되었다. 울고 싶었다. 큰 성공을 바라지도 않고, 실패에도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뜻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을 겪다 보니 마음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그즈음 요조 작가의 에세이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었다. 박연준 시인의 작업에서 따왔다는 이 제목을 처음 봤을 땐 실패를 사랑까지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이 주는 기묘한 위로가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도 작업을 하고 있는 거겠지 하는 마음을 먹게 해주는 것 같은.
이 에세이는 따라 하고 싶지만 따라 할 수 없는 위트와 반짝임으로 가득 찬 문장들로 네가 뭘 하든 괜찮다고 말해주는 느낌을 준다. 작가가 성산일출봉에 올라가면서 하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자. 부드럽게, 허벅지가 터지지 않게’라는 다짐은 내게도 자연스럽게 전이된다. 그래 뭐 까짓 거 좀 천천히 가면 되지. 무기력해 일어나기 힘든 아침이지만, 트위터에 접속하고 말초신경에 자극을 주면 잠은 깰 것이다. 일단 일어나면 하루가 시작되긴 할 테고, 그럼 어떻게든 하루가 갈 것이라는 미지근하지만 확실한 위로.
그리고 이 에세이는 그 위로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감정을 갖게 한다.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책 첫머리에 쓰인 이 문장을 곱씹으며 책을 읽고 나면,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용기마저도 생기는 것 같다. 마지막 글 ‘오래 살아남기’는 소심해 보이지만 절대 소심하지 않은 낙관주의의 표현이다. 코로나19로 변한 삶 속에서도 ‘어쩌면 인간은 소소한 좋음과 끔찍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아주 오래 살아나갈 거’라는 믿음이 내 등을 툭툭 두드려주는 것 같기도 했다. 영화가 개봉하면서 요조 작가와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이 책은 내게 더 큰 위로가 되어 남았다.
‘나는 나의 남은 인생을 내 주변의 멋진 사람들을 흉내 내면서 살고 싶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우리는 매일매일>의 씩씩한 친구들을 흉내 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매일>의 개봉을 씩씩하게 마무리했고, 지금도 공동체 상영으로 꾸준히 관객을 만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오래, 꾸준하게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