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걸레 청소기

김하나(작가)
: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말하기>

2021년은 내게 혹독했다. 올 초에는 여러 해 동안 애정을 갖고 일해온 일터에서 이해하기 힘든 일을 겪었다. 일종의 모멸감을 느꼈는데, 이런 감정을 품은 채 일을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마음이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나는 평생에 걸친 애증의 관계였는데, 아버지의 죽음 전후로 까맣게 잊고 있던 사건과 감정들이 불쑥불쑥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와 나를 뒤흔들었다. 아버지에 얽힌 온갖 감정이 슬픔과 함께 영원히 풀지 못할 매듭이 되어 내 안 어딘가에 단단히 묶이는 것만 같았다. 이어서 가까운 친구와 지인들의 반려동물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늘 삶 곁에 있었겠으나, 올해만큼 그 사실을 피부로 느낀 적은 없었다. 여름쯤에는 우리 첫째 고양이 ‘하쿠’가 신부전 2기 진단을 받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게 2021년은 혹독했다. 모멸감과 해결되지 않은 감정과 슬픔, 상실감이 뒤섞여 내 안에서 곪는 것 같았다. 불면과 악몽이 번갈아 오갔다. 우울감으로 한동안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다. 내면이 쑥대밭일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도 좀 반듯하고 깨끗하면 좋겠는데, 청소 담당인 내가 고장 나버렸으니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 집의 역할 분담에 대해 잠시 언급해야겠다. 나는 동거인 황선우 작가와 함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냈다. 집에서 둘이 각각 맡는 역할은 꽤 정확히 나뉘어 있어서, 황선우 작가는 요리를 담당하고 나는 청소를 책임진다. 거기서 생기는 여러 에피소드를 책에 쓴 터라 독자들은 나는 ‘도비’라고 부르게 되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집 요정 말이다. 한번은 SNS에 장마철 꿉꿉한 바닥을 청소하는 데 유용한 아이템 조합을 소개한 적이 있다. ‘러버메이드 리빌 스프레이 밀대에 바이오 크린콜을 넣어서 닦으면 최고’라고. 그랬더니 이 내용이 수천 회 공유되고 온갖 카페로 퍼날라지면서 이 청소 도구 조합에 ‘도비 세트’라는 별명이 생기더니 급기야 검색 엔진에서 ‘도비 세트’가 자동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내 SNS 계정으로 깨끗하고 뽀송해진 바닥 인증샷과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나는 청소 도구까지 히트시키는 청소 요정이 된 것이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배달의 민족일 뿐 아니라 청소의 민족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영화의 등장인물이 밖에서 신고 들어온 신발을 신은 채 침대에 누우면 위생에 신경이 쓰여 잠시 영화에 대한 집중력을 잃게 된다. 다이슨 무선청소기사업부 부사장은 “조사 결과,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청소를 가장 자주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한국은 혁신의 주기가 짧습니다. 한국인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동기부여가 잘 돼 있습니다”라고도 말했다. 고가의 다이슨 무선청소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곳일뿐더러 새로운 모델로 교체하는 주기도 짧다. 청소의 민족인 만큼 청소 기기의 발전에도 민감한 것이다. 집 요정 도비인 나도 다이슨 제품을 가지고 있다. 직접 밀고 다녀야 하는 다이슨 외에 LG 로보킹 로봇청소기도 사용한다. 고양이 세 마리가 뿜어대는 털을 이 두 기기로 빨아들인 뒤 앞서 말한 도비 세트로 바닥을 닦으면 집이 반짝반짝해진다. 문제는 2021년에 찾아온 내 마음의 혼란이 이 모든 청소 도구를 작동 불가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동거인이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한계가 있었고, 그도 바빴다. 고양이 털과 먼지가 뭉쳐 돌아다니는 걸 보면서도 몸을 일으켜 청소를 시작하기가 힘들었다. 무거운 다이슨 청소기를 드는 것만 떠올려도 한숨이 나왔다. 로봇청소기는 켜두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자꾸만 거실의 의자 다리를 타고 올라 굉음을 내며 걸리고, 세워둔 기타를 쓰러뜨리거나 빨래 건조대를 밀고 다녔다. 잘 쓰던 밀대 걸레는 힘에 부쳤고, 걸레를 떼어 빠는 일이 한없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SNS에서 누군가 자신의 물걸레 청소기가 유용하다며 기특해하는 글을 보았다. 복잡한 의자 다리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바닥을 제법 잘 닦는다는 것이다. 다이슨 부사장의 말처럼 ‘새로운 기술에 대한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는’ 한국인답게 쾌속으로 주문했다. 그렇게 ‘에브리봇 엣지’를 만나게 되었다. 가벼운 타원형 몸체 아래 동그란 물걸레 두 개가 달린 단순한 구조였다. 물을 채우고 스위치를 켜니 열심히 바닥을 문지르며 돌아다녔다. 아무것도 쓰러뜨리지 않았고, 조용했다.

흡입식 청소기가 다가오면 화들짝 달아나는 고양이들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평온히 누워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로 꽤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인공지능과 GPS를 사용해 집 안의 맵을 그리고 앱으로 제어가 가능한 기기들의 스마트한 성능과 대비되는 아날로그적 단순성이 주는 직관적 쾌감이 있었다. 스위치를 누르면 바로 두 개의 물걸레가 바퀴처럼 돌면서 일단 배를 밀며 돌아다니고 본다. 부딪히면 돌아서서 나아간다. 컴퓨터처럼 머리를 굴리는 느낌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점을 답답해할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이 투명하고 천진한 작동 방식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물걸레 청소기를 작동하려면 우선 먼지를 제거해야 한다. 나는 에브리봇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켜 먼지를 훔쳤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귀찮은 마음을 이기고 먼지를 제거한 뒤 에브리봇을 켜면, 반질반질 물걸레 자국을 남기며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녀석을 보면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집 안이 깨끗해지고 있다는 감각은 너무도 감미로웠다.

무엇보다도 바닥 청소를 열심히 도와주는 이 작은 기계가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의지가 되던지. 거의 매일 에브리봇을 사용하면서 나는 조금씩 더 몸을 움직였고, 그러자 아주 조금씩 마음도 나아졌다. 불면과 악몽이 서서히 물러갔고, 이제는 씩씩하게 고양이들을 돌보며 집 요정 도비답게 살게 되었다. 아픈 마음이 물걸레 청소기 덕에 나아졌다는 말은 아무래도 좀 이상하다. 그러나 누구나 한번씩 삶에서 바닥을 칠 때, 그 바닥이 깨끗하다면 조금은 더 나을 것이다.

 

 

마른오징어와 마요네즈

이설(배우)
: 영화 <흐르다> <방법: 재차의>, 드라마 <어느 날>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본 후 힐러리 스왱크 언니처럼 근육질의 파워 우먼이 되고 싶었다. 그래, 체육관을 찾았다. 세상에나. 그곳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관장님이 계셨다. 이것은 운명인가. 나 이러다 시합까지 나가게 되는 거 아닐까?
꿈도 큰 나는 파리도 못 때려잡을 펀치만 픽픽 날려대다 호통만 대차게 듣고 단백질을 잘 챙겨 먹으라는 가르침에 단백질 음식에 대해 알아봤다. 역시 닭 가슴살인가. 그런데 닭 가슴살은 맛이 없는데? 소고기는 너무 비싸. 돼지고기는… 김치찌개에 든 게 제일 맛있지. 생선 구워 먹을까? 냄새가… 많이 나려나? 일단 마트에 가자. 나는 마트로 갔다. 생선과 정육 코너를 기웃거리는데 그 중앙에 마른오징어가 있었다. 고단백 영양 간식, 타우린 풍부, 온 가족 주전부리, 동해안에서 오늘 아침에 올라온 해풍에 말린 마른오징어. 이거다. 한 봉지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두 마리를 마요네즈 반 통과 함께 혼자서 다 먹었다. 이건 뭐 오징어를 먹은 건지 마요네즈를 먹은 건지. 괜찮아, 난 다이어트 하는 게 아니니까. 하하하 하는데 코로나19가 터졌다.
3개월 등록하고 코로나19 확진자 증가로 1개월 반 쉬고 다시 등록하고 출장 때문에 2개월을 쉬었는데도 팬데믹 시대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힐러리 스왱크가 되겠다던 나의 꿈은 <백엔의 사랑>을 보며 ‘안도 사쿠라가 되고 싶다’로 바뀌었고, 코로나19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다. 체육관에 나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2021년이 되었고, 운동을 시작하면서도 마른오징어만큼은 그냥 계속 먹었다. 찔리는 마음에 마요네즈는 저지방으로 바꿨다. 단백질 때문에 시작된 마른오징어와 마요네즈 먹기는 어느 순간 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게 그렇게 맛있느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세상에 맛있는 건 아주 많다. 그냥 나는 이걸 씹으며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아졌다.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이라 항상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데 마른오징어를 마요네즈에 푹 찍어 꼭꼭 씹다 보면 내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야구 선수들이 긴장을 풀기 위해 껌을 씹는다던데 그런 원리일까? 지금은 일이 끝나고 집에 가면 석쇠에다 오징어부터 굽는다. 거의 2년을 구워 먹다 보니 이제 덜 오그라들고 냄새 적게 피우며 굽는 요령도 생겼다. 늘 많이 짜서 남던 마요네즈도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을 만큼만 쭉 짜낸다.

신기하다. 뭔가를 꾸준히 하다 보면 크든 작든 무언가가 반드시 남는다. 그렇게 예고 없이 생긴 나의 잉여 시간을 나는 마른오징어와 함께 보냈다. 내년이면 서른인데 나의 20대 끄트머리를 대부분 집에서 보내며 불안감에 잠 못 이룰 때도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낮이고 밤이고 오징어를 구워 먹었다. 그 덕분에 단단해진 턱 근육만큼이나 내 마음도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조금씩 야물어가고 있(을 것이)다. 주변의 인생 선배들은 겨우 서른이라고 하지만 나에겐 벌써 서른이다. 스물이 되기 전엔 어른이 된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었는데, 어른이 되어 장차 서른까지 될 지금의 나는 기대되기는커녕 왠지 달아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마른오징어를 잘 굽게 되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긴장될 때마다 마른오징어를 씹으면 되니까. 홈런을 기다리며 껌을 씹는 타자처럼 나는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서른을 기다린다.

내년엔 밖에서 생활하는 날이 많아지기를, 다시 체육관에 나가 파이터의 길에 이완된 몸과 마음으로 한걸음 더 다가서기를 바라며 결코 싸지 않은 마른오징어 값을 벌기 위해 나는 지금 목포로 출장을 와 있다. 이제 막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어제 사온 마른오징어를 처음 사본 마요네즈에 찍어 먹을 예정이다. 2021년도 끝나간다. 다들 평안하고 무탈하게 남은 한 해를 잘 보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은 누군가 마른오징어와 마요네즈를 먹었다고 한다면 더없이 기쁠 것 같다. 메리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 그리고 굿바이 코로나(제발).

 

 

 

작은방 창문

강윤정
(문학편집자, 편집자, 유튜브 채널 <편집자K> 운영자)

또 한 해 감염병을 의식하며 살았다. 마스크를 끼고 대화하는 거나 방문한 곳에 기록을 남기는 일은 이전보다 자연스러워졌지만, 이게 다 뭘까 하는 무력감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다. 자유로운 외출, 자유로운 만남, 자유로운 대화의 ‘자유’가 정책적으로 조율되고 ‘단계화’되면서 자연스레 그 모두가 줄었다. 생활의 범위도, 관계의 범위도 좁아졌다. 가능한 한 집에 머물렀고 많은 시간 창밖을 내다보며 지냈다. 돌이켜보면 그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창밖 보기라는 단순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내 마음을 더 나빠지지 않게 했다는 것을 지금은 알 수 있다. 이 풍경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게, 바이러스가 동식물에게까지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내가 사는 곳은 아파트 2층이다. 창에 가지가 닿을 듯 말 듯 큼지막한 벚나무가 가까이 있고, 그 너머로는 공원 산책로가 내려다보인다. 접촉해서는 안 되는 당신과 나 사이에 벚나무, 그리고 유리창. 여기서는 괜찮다. 여기에 서서 당신을 바라보는 건 안전하다. 우리가 서로에게 폐가 되지 않는 자리에서 나는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감각. 언젠가 우리가 다시 서로에게 닿으리라는, 연결되리라는 희망. 벚나무는 한자리에 선 채 매일 조금씩 달라졌다. 차례차례 꽃을 피우고 꽃잎을 흩날려 떨구고 잎으로 무성해졌다. 자기 한 몸으로 오롯이 계절을 대표하듯, 나무는 담대하고 여유롭고 그 모든 과정에 익숙해 보였다. 시간이 흐르고 모두 순리대로 흐를 거라는, 막연하지만 분명한 위로가 되는, 차근차근한 나무의 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으면 반려묘 둘이 번갈아 내 곁에 머물렀다. 심사가 복잡한 나와 달리 그들은 초연한 얼굴로 나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은 창으로 해가 들면 그 아래 몸을 뉘였고, 가까운 가지에 새가 앉으면 귀와 수염에 힘을 실어 새에 집중했다. ‘행복은 인간에게는 만들어낸 상태인 반면 고양이에게는 타고난 조건’이라고 한 건 영국의 사상가 존 그레이였던가. 요컨대 투명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창 안팎에서 자기 모습 그대로 충분해 보이는 존재들에 기대어 흘러온 한 해였다. 에너지를 남용하지 않고, 군더더기인 감정들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히 호흡하고, 계절의 변화를 누리는 일은 좁아진 범위 안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며. 다가오는 날들, 어떤 ‘자유’가 나를 기다리고 있든 조금 더 의연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