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The Pregnant Tree and the Goblin)
개봉 2022.01.27.
등급 15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판타지
국가 한국
러닝타임 115분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의 중심에는 의정부의 미군 기지촌에서 40여 년간 살아온 노년의 여성, ‘박인순’이 있다. 그이는 매일 아침 정성스레 목욕하고, 도로 위를 씩씩하게 걸어 다니며 폐지를 줍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며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비장하게 맞서는 그이 앞에 어느 날 저승사자들이 등장한다. 저승사자들은 이승을 떠도는 유령들을 저승으로 데려가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인순은 자신만의 이야기로 그들에게 맞서기로 한다.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판타지 요소를 더한 다큐멘터리라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극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장르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김동령 애초에 장르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만들다 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에 적합한 형식이 생겼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사실 미군 기지촌과 그 안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많은 매체에서 다뤄온 소재예요. 진부한 이야기만 계속 생산한다는 게 문제죠. 제가 2000년대 초반 무렵 기지촌에 처음 발을 들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기지촌을 같은 프레임 안에서만 다루려 하고 있어요. 저희는 같은 담론을 끊임없이 우려먹는 사이클에서 벗어나 기지촌을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의 본질에도 의문을 갖게 된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어쩌면 일종의 환상일 수 있겠다고 판단한 거죠.

장르 구분을 떠나 새로운 시선으로 기지촌을 담음으로써 그 환상을 깨뜨려보고자 한 것이고요. 김동령 맞아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인순 언니와 함께 영화를 만들어온 경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박경태 감독은 2003년 <나와 부엉이>에 그림을 그리는 언니의 일상을 담았고, 저희의 전작 <거미의 땅>에도 언니가 출연해요. 오랜 시간 언니와 영화 작업을 함께하는 동안 눈에 보이는 것, 증명 가능한 사실에 집착할 필요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함께한 배우들의 캐스팅 과정도 궁금합니다. 전문 배우가 아닌 박인순과 호흡을 맞춰 연기해야 하는 만큼 섭외 단계에서 특별히 고려한 부분이 있었을 것 같아요. 김동령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박인순이라는 기지촌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고, 실제 인순 언니가 출연하기 때문에 저희가 원하는 배우의 조건은 좀 독특했어요. 뛰어난 연기력보다 박인순이라는 여성을 존중하며 그분의 삶 속으로 들어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인 게 더 중요했으니까요. 저희는 시나리오 없이 작업하기 때문에 배우들이 언니와 어떤 케미를 보여주는지에 따라 장면의 완성도가 달라졌어요. 그래서 오히려 현장에서 자신의 연기에 몰입하는 스타일이 아닌 배우를 원했죠. 오디션에서도 최근에 어떤 꿈을 꿨는지, 화투를 칠 수 있는지 같은 특이한 질문들을 했던 것 같아요. 배우이기 이전에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었거든요.

 특히 대학원생과 저승사자를 연기한 배우 김아해에게 눈길이 갔어요. 필모그래피를 보니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가 첫 작품이더군요. 김동령 아해 씨는 제가 좋아하는 중성적인 얼굴을 갖고 있어요. 매우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배우죠. 아해 씨를 포함한 모든 배우는 캐스팅된 후에 역할이 정해졌어요. 영화에 출연한 모든 가 인순 언니와 친해질 수 있도록 따로 시간을 가졌는데, 각자 다른 스타일로 재미있는 관계를 맺어가는 걸 보면서 그에 맞게 배역을 정했습니다.

 

김동령 박경태 감독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박인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컷

김동령 박경태 감독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박인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컷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라는 제목은 어떻게 만들어졌나요? 김동령 인순 언니가 그린 그림의 제목에서 가져왔어요. 언니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그림을 그렸다고 해요. <거미의 땅> 촬영 때도 쉬는 시간에 상자 조각에 그림을 그리시기에 무엇을 그린 것인지 여쭤봤더니 “이거?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야!”라고 대답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죠. ‘아, 이건 우리 다음 영화의 제목이다!’(웃음) 저승사자, 귀신, 시체를 싣고 가는 가마 등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들도 언니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존재들을 재현한 거예요.

영화는 인순이 나체로 몸을 씻는 장면으로 시작하죠. 이 장면에는 어떤 의도가 담겨 있나요? 김동령 인순 언니는 아주 어린 시절 기지촌으로 팔려와 평생 미군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에 동원되셨어요. 하지만 결코 자신의 몸을 저주하거나 혐오하지 않아요. 귀하게 여기죠. 그분에게 목욕은 청결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몸을 이용해 살아온 사람으로서 안녕을 약속하는 일종의 의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더 숭고하게 다가온 것 같고요. 성매매는 여성의 육체를 극도로 물신화, 대상화하지만, 목욕을 할 때만큼은 육체가 오직 자신의 몸과 정신을 담고 있는 그릇이 돼요. 언니가 지난 세월의 상흔이 남은 몸을 뽀득뽀득 닦을 때 작은 화장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와 몸을 부드럽게 비추는데, 저는 이 장면이 렘브란트의 그림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교수와 함께 기지촌을 찾은 대학원생은 버려진 ‘어메이징 클럽’을 선점해 자신의 작업물을 만들 배경으로 삼으려고 해요. 이런 부분이 기지촌을 자신의 입맛대로 소비하려는 외부 취재원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기지촌 일대를 오랜 기간 가까이서 봐오며 겪은 일화들이 투영된 건가요? 박경태 맞아요. 기지촌에 머무는 동안 무언가를 취재하거나 얻어가려는 외부 사람들을 많이 관찰할 수 있었거든요. 저희 같은 작가를 비롯해 기자, 학자, 혹은 도움을 주기 위해 찾아오는 종교 단체 사람들까지. 찾아오는 이들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최소한의 시간을 투자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어 가기를 바라죠. 그러다 보니 비윤리적 방식을 취하는 경우도 많이 봤고요.

 

김동령 박경태 감독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박인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컷

인순은 담담한 표정으로 남편의 목을 베는가 하면 저승사자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트라우마를 가진 피해자가 아니라 비장한 욕망을 품은 인물로 그린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이 영화를 통해 박인순이라는 여성을 어떤 인물로 그리려 했나요? 김동령 인순 언니는 사회에서 원하는 피해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요. 변덕이 심하고, 화도 많이 내고, 때에 따라서는 탐욕적이거나 폭력적이기도 하니까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언니를 존중하는 것,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박인순을 담는 거였어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이곳저곳 떠돌며 잔인한 세상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던 언니는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에요. 대신 기지촌에 들어온 여성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 역시 늘 죽음 가까이에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아무도 없는 산에 들어가 걷다가 죽고 싶다’거나 ‘죽어서 독수리가 되어 나를 괴롭힌 사람들의 눈알을 파먹고 싶다’는 등 자신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거든요. 이런 말에 그리스 비극에서 볼 법한 삶과 죽음을 대하는 비장한 태도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런 얘기를 할 때도 귀엽다는 게 인순 언니의 매력이지만요.

저승사자는 명부에 이름이 없어 저승으로 가지 못하는 기지촌 여자들에게 ‘진실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진실한 이야기란 무엇이었을까요? 박경태 사람들은 복잡하거나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요. ‘비참한 배경을 가진 여성이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것’처럼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안전하다고 느끼니까요. 저승사자들이 원하는 진실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겠죠. 기승전결이 있는 동시에 쉽게 납득이 되는 이야기. 그걸 진실하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김동령 박경태 감독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박인순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 스틸컷

두 분 모두 기지촌 여성 공동체에서 활동하다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지촌을 조명하는 과정은 그 공간에 담긴 적나라한 아픔을 계속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할 텐데요. 이 지난한 작업을 꾸준히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요? 박경태 기지촌을 사회문제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었다면 벌써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 같아요. 저희에게 기지촌은 대한민국 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심연이나 크랙 같은 곳이에요.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과거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영화적으로도 도전적인 곳이고요. 물론 끊임없이 아픔과 고통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에 힘들 수밖에 없어요. 그럴 땐 잠시 도망가기도 해요. 인순 아주머니가 주는 웃음과 결코 가볍지 않은 경쾌함에서 힘을 얻기도 하고요.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길 바라나요? 박경태 극장을 기반으로 한 영화 산업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영화를 개봉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지 새삼 실감하고 있어요.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는 장면이나 주제를 분석하려는 의도나 생각 없이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혹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으로 봐야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꼭 극장에서 보길 추천해요. 거인과도 같은 한 여성의 삶을 들여다볼 흔치 않은 기회니까요. 극장을 가득 채울 만큼 크고 강력한 그분의 에너지를 받아 가시기를 바라요.

두 분의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요? 박경태 몇 년 전 퇴역한 미군을 만나 그가 촬영한 8mm 필름을 기증받았어요. 50년 전 기지촌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더라고요. 다음 작품에서는 지금까지 아카이빙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지촌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