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는 2020년과 2021년 사이 발표한 작품을 묶은 소설집입니다. 출간을 기점으로 지나온 시간이 새삼 새롭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책이 나온 지 한 달 정도 지났는데, 뭔가를 새롭게 받아들이기에는 그 시간이 조금 짧게 느껴져서 더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팬데믹이 시작될 무렵부터 쓴 이야기인데, 지난 2~3년 동안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고 내내 집에서만 지냈어요. 고립된 시간 동안 생활을 성실히 돌보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나온 걸 보니 그래도 열심히 썼구나, 놀지 않았구나 싶어요.
소설을 쓰고 책을 묶으며 이전에는 인식하지 않았던 걸 깨닫게 되기도 하죠? 쓰기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몇가지 있죠. 소설 중 <초파리 돌보기>는 저로서는 꽤 큰 변화인 셈이에요. 이전에는 해피엔드를 싫어했어요. 거짓 희망을 뿌리는 거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초파리 돌보기>를 해피엔드로 마무리하면서 소설을 쓰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고민을 하게 됐어요. 다른 가능성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 거죠. 소설적 입장이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그 사람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소설보다 우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새롭게 하게 됐어요.
이번 소설집에 수록한 작품 중 유독 작가가 화자인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유가 있었나요? 첫 소설집 《눈과 사람과 눈사람》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글 쓰는 사람을 화자로 내세우지 않았어요. 글 쓰는 이야기보다는 사는 이야기를 더 하고 싶었으니까요. 한데 몇 년 사이 출판 산업과 문단 내에 여러 사건이 있었잖아요. 문단 내 성폭력, 불공정 행위, 표절 사건 등을 보며 쓴다는 게 뭘까, 쓴다는 게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고민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글 쓰는 사람을 이야기 속으로 들이기 시작했어요. 문화 예술계에서 콘텐츠를 만들고 글을 쓰는 행위가 삶과 직접적으로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지에 대한 고민이 화자 설정과 이어진 것 같아요.
소설 <그만두는 사람들>에서 ‘나’와 ‘혜리’가 주고받는 메일, <초파리 돌보기>에서 ‘원영’이 ‘지유’에게 소설의 아이디어를 풀어놓는 척 전하는 이야기들, <단영>에서 ‘아란’과 ‘능원’이 밤에 나누는 대화 등에서 보듯 인물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 혹은 중대한 경험을 말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들어주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데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런 상호작용은 결국 소설가가 이야기를 쓰는 행위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 안에서 이뤄지는 인물들의 상호작용이 소설 바깥까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은 분명히 있었어요. 아픔을 지닌 역사는 가시화되지 못한 채 존재하다 다음 세대에 가시화된다고 하잖아요. 어떤 사건이나 경험을 겪은 당시에는 이야기하지 못하다가 자식에게만 겨우 전해 뒤늦게 역사적인 이야기가 드러난다고요. 제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 사람을 찾지 못했던 거죠. 우리가 살아가며 의외로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고 타인의 말도 잘 듣지 않는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깊은 고민을 나누는 사람이 누가 있지? 하고 돌아보면…. 반면에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 속 인물의 고민을 마치 자기 일처럼 여기고 고민한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져요. 시대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동시대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장르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이 그러길 바라고요.
소설집 해설에서도 언급되었듯 이번 소설들에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의 면면이 섬세하게 드러납니다. ‘-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두고 다 가면이고 가짜라고 단정하지 않는 태도가 느껴져서 좋았고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개인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일상에서 역할 때문에 부딪치고 소모되기도 하잖아요. 다들 그렇듯이 저 역시 작가, 친구, 딸, 동생 등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거든요. 그중에는 내가 선택한 적 없는데 주어지거나 강요당하는 것도 있어요. 보통 나와 타인, 사회가 만나는 접점에서 부딪치는 것 같아요. 작가라는 역할 역시 마찬가지예요. 저는 논리 정연하게 말하는 걸 어려워하기 때문에 천천히 글을 쓰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어느 자리에서는 작가로서 말을 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 그때는 말을 잘해야 할 것 같으니까 어렵지만 또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수행을 해요.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다른 사람을 연기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어떤 ‘척’을 하면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들이 있고, 일그러진다 해도 이건 못 하겠다 싶은 말도 있어요. 이 과정에서 계속 선택하고 거부하고 부딪치는 거죠. 근데 이건 저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지는 역할을 거듭 수행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익숙해지기도 하잖아요. 그럼 그것은 나일까요? 그건 그 사람이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거듭 수행하다 보니까 이게 ‘나’가 됐다고 믿는 사람이 있겠죠. 예를 들면 <초파리 돌보기>에서 원영은 엄마라는 역할을 수행하다가 ‘나는 엄마가 됐고, 그 역할이 내 인생의 전부고, 그게 다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한편으로는 ‘그게 아닌데’ 하며 부대낄 수 있고요. 누가 어떤 나를 ‘나’로 믿어가게 되는지, 그 과정에서 나 자신, 혹은 세계와 어떤 부딪침이 있는지가 중요하겠죠.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의 ‘나’처럼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마음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는 복잡한 레이어를 지닌 인물과 상황도 등장합니다. 평소 작가가 주변 인물이나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이 궁금합니다. 요 몇 년 사이 인물이나 사건을 실제로 목격한 적이 거의 없더라고요. 사건이라곤 온라인으로 접한 게 다인 것 같아요. 근데 온라인 세상은 다니던 길로만 계속 다니게 되잖아요. 즐겨찾기에 있는 세상에만 가게 되고요. 카톡도 늘 나누는 사람하고 나누고요. 불현듯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들만 만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다니는 길만 다니고,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만 좋아할 때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같은 이유로 나를 그렇게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근데 저는 이해받고 싶거든요.(웃음) 내가 그러하듯 상대방도 나를 편협하게 생각하면 싫겠죠. 그래서 한쪽만 보기보다 더 헷갈려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적어도 ‘이건 이거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려고요.
온라인의 활동 반경은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시야와 연결돼 있을 것 같아요. 소설 곳곳에서 산업재해, 부실시공, 부동산 문제 등 사회적 이슈가 거론됩니다. 작가가 이야기의 재료로 쓰게 되는 일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나요? 사회 이슈라고 여기기보다 그저 내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자취하면서 이사를 많이 다니고 그 과정에서 집도 많이 고쳤거든요. 부동산 이야기는 지난해에 주택 청약 제도를 처음으로 알게 됐는데 청약 가산점에 대해 살펴보다가 화가 많이 나서.(웃음) 화가 난 상태에서도 마감은 해야 하잖아요. 일단 화난 일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산업재해도 그렇고요. 가까운 곳,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와 연결되는 거잖아요. 결국 내가 살면서 경험하고 느끼는 것들이 소설이 될 가능성이 높고 30대, 미혼 여성, 프리랜서라는 제 위치와도 관련이 깊을 것 같아요.
“내가 좋아하고 흠모하면서 많은 작품은 인간이 품은 진실이라거나 각자의 입장 같은 것을 끈질기게 탐구할 때 빛을 냈다. 나는 이미 그런 빛에 매료되어 있었다.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였다.”(<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임솔아 작가는 문학의 빛과 현실의 어두운 그림자 사이 낙차를 어떻게 느끼고 혹은 견디고 있을까 하고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낙차를 크게 못 느끼고 살았던 것 같아요. 청소년기에 문학을 처음 알고아주 깊이 매료돼 그 세계 안에서 첨벙대며 살았어요. 그러다 2016년 이후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을 보며 낙차를 인지하기 시작했어요. 동시에 팬데믹 상황이 길어지면서 생계 걱정도 하게 되고요. ‘문학의 세계는 아름다워’ 하며 살다가 여러 폐해를 겪으니 그 세계가 무너지고 주변을 둘러보게 된 거죠. 30대 중반의 나는 이런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고 뒤늦게 느낀 거예요. 내가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 빠져 있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주식 투자를 하고 있고.(웃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싶은 까마득한 느낌이 밀려왔어요. 지금도 그 낙차를 겪고 있지만 오히려 잘됐다 싶어요. 일찍이 문학은 현실 옆에 있어야지 판타지 영역에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판타지 세계에서 헤매고 있었나 봐요. 이제야 제대로 보겠구나 싶어요. 그게 문학과 더 가까워지는 거라 믿고요.
무엇을 보고, 느낄 때 쓰고 싶어지나요? 혹은 쓰는 과정에서 무엇이 없어야 쓸 수 있다고 보나요? ‘써야 한다’ 혹은 ‘쓸 수밖에 없다’라고 느끼면서 그저 써야 하는 때가 있어요. 누군가를 오랫동안 좋아하다가 마침내 좋아한다고 말할 때, 반대로 헤어져야 하는데 차마 헤어지지 못하고 몇 년을 질질 끌다가 드디어 ‘우리 헤어져’ 하고 돌아서는 순간처럼 그렇게 글을 쓰게 되는 때가 있어요. 더 이상 참지 못해서 터져 나오는 것처럼요. 또 ‘쓰고 싶다’고 느낄 때도 있어요. 보다 사랑스러운 감정이죠. 문득 길고양이가 나를 따라오면 멈춰서 말을 걸게 되잖아요. ‘안녕? 왜 나를 따라오니? 밥은 먹었니?’ 할 때처럼 작지만 특별한 순간을 만났을 때 ‘쓰고 싶다’는 마음에 가까워져요. 이 과정에서 없어야 하는 건 ‘소설을 쓴다’는 자각. 그 자각을 없애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해요. 거의 포기하는 심정이 돼야 없어지더라고요.
최근에 그런 작지만 특별한 순간은 언제였나요? 우리 강아지가 밖에 나가면 많이 웃고 되게 열심히 뛰어다녀요. 그럼 저도 맞춰서 같이 뛸 수밖에 없는데 워낙 오랜만에 뛰니까 뛰는 동안 퍼지는 신체감각이 어색하고, 몸은 삐거덕거리고 이상한 거예요. 그 순간 강아지를 보면 달리는 행위 자체에서 큰 쾌락을 느낀다는 게 고스란히 전해져요. 육체를 움직여 빨리 달리면서 큰 해방감과 기쁨을 맛보는 거죠. 그 기쁨이 뭘까 가만히 생각하면 저도 어린 시절에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놀이터에서 뺑뺑이나 그네를 탈 때 속도를 느끼며 온몸으로 바람을 맞던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하나씩 깨어나더라고요. 온라인 세계에서만 살다가 신체가 무뎌졌다는 걸 깨달을 때, 그럴 때 쓰고 싶다고 느껴요. 감각이 깨어나는 무언가를 쓰고 싶다고요. 오감이 느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