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보이지 않을 때, 먼저 간 이의 발자국은 희망이자 용기이자 길이 된다. 이름도 꿈도 지워진 채 오직 ‘여성’이어야만 했던 시대에도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길 두려워하지 않으며, 호기롭게 발자국을 남긴 ‘여성’들이 있었다. 2022년을 사는 여성 6인이 먼저 간 그들에게 글을 띄웠다. 용감한 밤에 만나기를 바라며.

차미리사

조선 여인의 기백,
차미리사

1879~1955|조선 여성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운동가이자 교육자.|1919년 종교교회에 여자 야학 강습소를 설치.|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전국순회강연단을 만들어 계몽 강연 실시.|1921년 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인 근화여학교 설립 및 교장 취임.

 

선생님에 대해 알게 된 건 덕성여자대학교 브랜딩 관련 자문 회의에 참여한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1920년대에 조선의 부녀자들을 위한 야학을 열고, 나중에 덕성의 전신이 되는 근화여학교를 만든 분이죠. 문맹인 여성들에게 글도 가르쳤지만 경제적 독립과 직업 없이는 여성해방이 불가능하다며 기술 교육을 강조하신 부분에 특히 공감이 갔습니다. 20세기 초반의 조선, 1879년생인 선생님이 주로 활동한 시공간은 근대화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얼마나 커다란 압력 속에 요동쳤을까요. 그 속에서 여성의 해방이라는 이상을 조금씩 실현해간 선생님의 삶을 상상해봅니다.

미리사(美理士)라는 선생님의 이름은 마리아, 활란(헬렌)처럼 ‘멜리사’를 음차해서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고요. 그런데 의아한 것은 가톨릭이 아닌 기독교 세례를 받았음에도 굳이 세례명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50대까지 남편의 성을 따라 ‘김미리사’라는 이름을 쓰셨죠. 열일곱에 결혼한 남편이 3년 만에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는데도 말입니다. 나중에 평전을 읽고 자연스럽게 의문이 풀렸습니다. 가난한 양반가에서 줄줄이 자식 다섯을 잃은 뒤 늦게 태어난 선생님의 본래 이름이 ‘섭섭이’였다니… 백번 바꿔 마땅한 이름입니다. 사실 저희 세대에도 딸 이름을 지으면서 내심 아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노골적이고도 원초적인 이름 ‘섭섭이’의 충격이 가시지 않는 건 선생님이 살았던 진취적인 삶과의 간극이 아찔해서겠지요. 어땠을까요? 가족에게 이름을 불릴 때마다 자신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이 아닌지부터 돌아보게 되는 삶이란 말입니다.

선생님에게 자기 이름을 새로 붙이는 행위는 아마도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의와 통했을 거예요.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이 상징하는 가부장제 전통안의 숨 막히는 속박을 떠나 스스로 정한 방식으로 살겠다는 결정 말이죠. 그렇게 정해진 활동명 ‘김미리사’는 ‘차섭섭’에서 가장 멀리 탈주한 이름이 아니었을까요? 물리적 삶의 궤적이 태어난 서울 아현동에서 아주 멀어져, 중국을 거쳐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서 공부하고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11년의 유학 생활을 거친 선생님은 1912년, 서른넷의 나이로 조선 땅에 귀국합니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 주권을 잃은 고국으로 돌아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겠다는 결단이었죠. 선생님의 소명, 가장 중요한 그 일이 바로 청년 여성의 교육이었습니다. 네, 여성 역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구하고 가정을 꾸릴 기반이 절실한, 청년의 절반이죠. 21세기의 한국 정치에서는 가끔 출산의 의무를 지는 여성과 자립의 지원을 받아야 할 청년이 따로 있는 양 취급하지만 말입니다.

“전 조선 1천만 여성은 다 내게로 오너라! 김미리사한테로 오너라!” 선생님은 모든 강연을 이렇게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냅다 1천만 여성을 호명부터 하고 보는 기백이 너무 멋져요. 그리고 말뿐 아니라 정말로 선생님은 전국의 여성들을 직접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여자교육회’를 조직해 서울에서 여러 차례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어 성공시킨 뒤 전국 순회강연에 나선 것입니다.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20명의 강연단 일행은 철도와 자동차, 선박, 나귀로 이동하며 84일 동안 67개 지역에서 강연을 합니다. 평안도를 거쳐 신의주까지 올라갔다가 충청도와 전라도를 지나 제주까지, 다시 육지로 올라와서는 경상도와 강원도를 따라 북으로, 함경도 끝 회령에까지 이르는 대장정이었죠. 학교 강당이나 예배당을 빌린 강연은 지역별로 몇 백 명에서 2천 명 이상까지 청중을 모으면서 성황을 이뤘다고 합니다. 1920년 7월 9일부터 9월 29일까지 강연단의 이동 경로와 날짜를 기록해놓은 지도를 보면, 흡사 하루 이동하고 이틀 공연하며 전국 투어 콘서트를 여는 록 밴드의 여정 같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의 강단에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연주, 가창 등의 음악 공연이 포함되었다고도 하고요. 서울에서 온 엘리트 여성들이 음악과 연설을 들려주고, 여성의 실력 양성을 통한 자활을 주장하는 이 부흥회 같은 모임은 말하자면 백 년 전 여자들만의 <쇼미더머니> 아니었을까요? 흰옷 대신 물들인 옷을 입어 세탁으로부터 해방되자, 조혼과 축첩의 구습을 타파해 결혼 제도에 고통받는 여성들을 보호하자는 등, 지금으로서는 너무 당연한 연설 내용을 보면 어느 시대나 페미니즘은 개인의 일상으로부터 출발함을 실감합니다. 연설 가운데 놀라운 것은 ‘여성들도 얼굴을 드러내놓고 자유롭게 외출하자’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요, 백년 전만 해도 점잖은 부녀자들은 드물게 외출할 때조차 눈만 내놓는 장옷을 뒤집어써야 했고, 복식의 변화와 함께 쓰개치마가 사라진 후에도 양산이나 삿갓으로 남자들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죠. 이슬람 여성들의 부르카나 니캅이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근대 도시의 성장과 더불어 거리를 관조하며 사색하는 플라뇌르(도시 산책자) 개념이 대두했다고 하는데, 조선의 여성들은 오직 자신의 발끝만을 내려다볼 뿐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여성들은 비난을 받습니다. 이름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여성들은 더 쉽게 표적이 되죠. 근화여학교에도 ‘기생퇴물이 많이 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소박데기 여학교’라는 별명이 나돌았다고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악플 같은 이런 이야기를 선생님은 대범하게 일축하셨다고 하죠.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한 사람일수록 환영한다’면서요. 이처럼 환경과 계급을 상관하지 않고 모든 여성에게 열려 있던 선생님이지만 동의할 수 없는 신념도 있었어요. 조선 여자의 정조관이 순결하고 고상하다며 높이 평가하신 부분입니다. 바로 한 세대 뒤의 신여성 나혜석이 자유연애를 옹호하면서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성을 둘러싼 윤리의 통념이 격변하는 시기였죠. 학생들의 중매도 적극적으로 서셨다는 걸 보면 선생님은 결혼 제도에 대해 상당히 온건하고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혹시 생각해보셨나요? 선생님 자신이 자유롭게 뜻을 펼치며 살 수 있었던 것도 스무 살부터 남편이 없었던 덕분은 아닐지…. 아아, 제가 그만 외람된 말씀을 드렸군요.

차미리사 선생님의 시대로부터 한 세기가 흘렀습니다. 다행히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누구보다 학문적 성취도 전문 기술의 역량도 뛰어납니다. 다만 채용에서 불이익을 받으며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될 뿐이죠. 장옷 없이 밤거리를 활보할 수는 있으나 희롱이나 성추행, 성폭력에서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선생님, 세상을 바꾸는 것이 정말로 준비된 개인의 역량일까요? 그렇다면 이보다 얼마나 더 어떻게 준비 할 수 있을까요? 이토록 잘 교육받은 2천만 대한민국 여성들을 보시면,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소식을 들으면 선생님은 기뻐하실지 더 큰 근심에 빠지실지 모르겠습니다. 황선우(작가)

 

 

 

한나

어느 순간에도
그 자신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나 아렌트

1906~1975.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 이론가. |1933년 나치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파리로 이주.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으로 이주.|나치 독일의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모든 사람이 당연하고 평범하게 행하는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악의 평범성’ 개념을 제시.

 

고백하자면, 나는 당신이 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이 일생을 통해 구축한 정치철학 이론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는 것은 저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 관한 보고서, 악의 평범성 정도랄까요. 그럼에도 내가 만나보지 못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불현듯 당신의 이름이 떠올랐고, 왜 내가 당신을 떠올렸는지를 오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검색을 통해 나는 당신 생의 궤적에 대한 정보를 압축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1906~1975. 독일 출신의 유대인 정치철학자라고, 현대의 정보는 당신을 정의하고 있네요. 그리고 내가 존재하지 않았고 당신이 존재했던 그 시대의 이야기를 당신에 대한 그래픽 노블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을 읽으며 조금은 짐작해보았습니다. 전쟁과 혐오와 수용소와 탈출과 학살과 그에 대한 심판과, 그리고 그 속에서도 의식과 자유와 진리 같은 것을 향해 치열하게 부대끼던 그 시절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1975년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몇 년 후에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여자아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과 나는 한순간도 동시대에 존재하지 않았지요. 실내 온도가 쾌적하게 맞춰진 사무실의 책상에 앉아 편안한 향의 차를 마시며, 당신이 살았던 20세기 초반의 시대를 상상하는 것은 멀고 아득합니다.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한 17세의 당신이 꿈에 부풀어 눈동자를 반짝이며 한껏 들이마셨을 교정의 투명한 공기를 상상합니다. 자신만만한 당신의 이마 위로 반짝 빛났을 오후의 햇살을 그려봅니다.

당신에 대한 책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에서는 당신 일생을 세 번의 탈출로 정의합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핍박 받던 독일에서의 탈출,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수용소에서의 탈출,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의 탈출 말이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삶에서 세 번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무수한 탈출을 봅니다. 똑똑하고 거침없는 어린 유대인 아이에게 가해진 속박으로부터의 탈출, 눈먼 사랑으로부터의 탈출,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의 거친 얼굴에 대해 기꺼이 말하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가해지는 차가운 눈빛들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무엇보다 으레 순종적일 것을, 사회가 원하는 답만을 곱게 내어놓을 것을 기대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부터의 탈출 말입니다.

“너무 똑똑했고, 너무 빨랐으며, 너무 의기양양했고, 너무나 유대인다우면서도 유대인답지 못했던 사람, 너무 사랑이 넘치고, 증오가 넘쳤으며, 너무 남자 같은 반면, 충분히 남자답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책에는 쓰여 있네요. 이 모순 가득한 문장 속에서 펄펄 살아 숨 쉬는 당신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보라색 시가 연기를 내뿜으며 당대 지식인들의 눈길을 한 몸에 사로잡았던 당당하고 매력적인 당신은 정말 멋지지만, 그보다 더 멋진 것은 이가 득실거리는 더러운 수용소에서도, 생사의 경계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망명길에서도 당신은 당신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 읽고 쓰고 말했다는 사실, 오직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모든 상황에서 기어이 스스로 탈출구를 찾아냈다는 사실이 오래도록 당신의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세기를 넘어 바야흐로 21세기에 이르러, 인류는 아마도 당신과 동료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게 변화했습니다. 그때는 모르던 많은 것들이 규명되었고, 새로 발견되었으며, 뒤죽박죽이던 논란 중 상당 부분은 정리 되었습니다. 가상현실과 우주 세계를 오가며 인류는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지만, 어느 날 당신이 골똘한 눈빛으로 과연 정말로 인류는 변화했느냐고 묻는다면 어쩐지 선뜻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난 시대에 어떻게 한 독재자의 선동으로 전쟁이 발발하거나, 광기의 차별과 혐오로 사람을 가두고 죽일 수 있었는가라고 지금의 우리는 어이없어하지만, 그 긴 비극의 역사를 넘어온 우리가, 지금 그 비이성과 부정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회의적입니다. 여전한 권력과 차별과 혐오가 이름과 얼굴을 달리해 보다 치밀해진 형태로 우리의 삶에 도사리고 있지 않다고 차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나는 자주 말문이 막힙니다. 하고자 하는 말들을 세상에 내어놓는 것이 두렵습니다. 견고하고 치밀하게 시대가 짜놓은 관념과 사고방식에 가로막혀 내 목소리가 행여 파열음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논란에 휘말리게 되지 않을까 나는 종종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자주 입을 틀어막고, 침묵의 경험들은 습관이 되어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기능조차 잃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꼭 한번은 주저하게 되고, 꼭 한번은 마른침을 삼켜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재판에서 당신이 내어놓은 ‘악의 평범성’으로 인해 당신은 다시금 논란과 비난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와 같은 논란이 일어날 것을 당신도 알고 있었을 테지요. 그때 당신은 두려웠습니까? 나처럼 한번은 주저하고 한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습니까? 어쩐지 그 반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신이 치열하게 당신 자신으로서 고민하고 찾아낸 결론 앞에 반짝 눈빛을 빛냈을 테지요. 진리에 대한 자부심과 열망으로 당신은 아마, 비난조차 기꺼웠을 테지요.

스스로 생각하기를, 스스로의 생각을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결국 어떤 광기의 시대에서도 나를 나답게 만들고,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남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엉망진창의 세상에서도 인류라는 가련한 집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멀리 당신의 삶을 더듬으며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차마 말문이 막힐 때마다, 그만 생각하기를 멈추고 침묵의 안온함 뒤로 몸을 숨기고 싶을 때마다 한번은 한나 아렌트, 당신의 이름을불러야겠습니다. 당신만큼 뜨겁거나 호기롭지 못하더라도, 먼 시대의 당신의 이름에 기대 조금은 용기 같은 것을 내어보려고도 합니다.

당신을 알고,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안녕히. 그곳에도 안녕이라는 것이 있다면.… 부디, 안녕하시기를. 정명원(대구지방검찰청 서부지청 부부장검사 겸 작가)

 

박완서

대문호,
슈퍼 페미니스트,
박완서

1931~2011. |한국의 소설가.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6.25전쟁이 발발하며 중퇴. |결혼 후 전업주부로 생활하다 40세이던 1970년에 장편소설 <나목>이 여상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되어 등단. |전쟁, 분단, 물질만능주의, 여성 억압 등을 비판하는 작품을 남김.

안녕하세요. 글을 쓰고 음악을 하는 오지은이라고 합니다. 감히 선생님께 편지를 띄웁니다.

저는 에세이 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에세이를 많이 읽기도 하는데 선생님의 에세이는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좋아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끝내주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고, 독창적이고, 깊고, 예리하고, 매섭고(타인에게도 본인에게도), 동시에 따뜻하고, 소박합니다. 그리고 생활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 뿌리가 굵고도 멋진 모습이라 탄성이 나옵니다. 선생님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독자의 작고도 좁은 견해입니다.

남이 차려주는 밥을 먹고, 남이 세탁하고 다려준 옷을 입고, 남이 청소한 방에 앉아서 하는 사유가 보잘것없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지구의 문학, 철학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장면이 그렇게 나왔겠지요. 그런데 가끔 마음 한구석이 싸해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속세를 떠나 산에서 오래 지냈다는 자연인의 인터뷰를 보다가 매번 그의 아내가 김치를 담가 산으로 올라온다는 말을 들을 때의 싸함 같은 것이요. 너무 많이 갔나요?

사실 이러나저러나 그냥 자기 작업을 잘하면 되겠지요. 각자의 상황과 각자의 입장과 각자의 고충과 각자의 최선이 있을 테니까요. 어떻게 해야 진짜고, 어떻게 해야 진정한 가치가 있고, 그런 말은 함부로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이런 화는 나이가 들수록 식어가고, 점점 담담해질 줄 알았는데, 더 커져서 놀라는 요즘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박완서 선생님은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멋대로 하는 생각입니다만.

1970년 마흔 살의 나이로 등단한 사람. 그때 이미 다섯 아이의 엄마였던 사람. 여류 작가라는 말이 당연하게 쓰이고,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을 의심 없이 하던 시절입니다. 아마도 문학계는 지금보다 훨씬 권위적이고 엄숙했겠지요. 예술성이라는 기준도 특정 성별의 특정 정서 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지 않았을까요. 대학의 남녀 비율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의 문화 예술계는 선생님을 어떤 프레임으로 보았을까요. 선생님을 오랫동안 수식하던 마흔, 주부, 다섯 아이의 엄마라는 말은 선생님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과연 좋은 영향을 끼쳤을까요. 아니면 방해가 되었을까요.

마음산책에서 나온 <박완서의 말>은 선생님이 1990년대에 하신 인터뷰를 주로 모은 책입니다. 당시의 선생님은 작품 활동을 하신 지 20년이 넘은 60대 작가였습니다. 베스트셀러는 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문학상도 많이 타셨습니다. 판매 부수와 상으로 작가의 성과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약간의 지표가 되어주기는 합니다. 여하튼 선생님은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거장입니다. 하지만 인터뷰어들이 선생님께 한 질문 중 몇 개는 상당히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답은 더욱 놀라웠습니다.

한 인터뷰어는 선생님의 작품이 여성주의적이라고 하면서 남자 주인공이 지독히 현실성 없게 그려진다고 말했습니다. 나쁘고 악하게 그려진다고요. 선생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아닙니다. 극히 평범합니다.” 등장인물 중 여자는 괜찮은 사람으로, 남자는 그렇지 않은 쪽으로 몰고 간다는 말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요, 미안합니다.(웃음)”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말하며, 이런 경향은 여성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인터뷰어의 폭력적인 (제 생각입니다) 말엔 이렇게 답하십니다. “왜 여성 작가인 경우에 그렇다고 하세요?”

대가의 쿨하고 위트 있는 순간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속이 좁아서 그런지 자꾸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런 질문을 20년 넘게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갈수록 작품에 대해서 더 깊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매번 1단계에서 다시 출발하는 느낌. 당신은 여자다, 당신은 주부다, 그래서 당신의 세계는 좁다, 잣대는 비틀려 있다는 말을 정정하고, 또 정정해야 하는 상황. 여성 예술가들은 아주 어려운 두 개의 시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너는 여자니까 그런 걸 만들지?” “아니요 저는 그냥 사람입니다.” “너는 대체 이런 얘기를 왜 계속 해?” “저는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두 대답이 모순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앞의 질문이 애초에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선생님은 ‘대중적인 것은 예술적이지 않다’라는 말이 태연하게 쓰이던 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앞선 길에 ‘박완서’가’ 없는 ‘최초의 박완서’에게는 얼마나 무례한 질문이 쏟아졌을까요. 선생님이 서울대학교 문과대에 입학했던 해에는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은 중퇴를 합니다. 그리고 60대의 선생님에게 어떤 인터뷰어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먼저 등단한 동기들을 질투하지 않았나요?” “아니, 안 그랬어요, 전혀.”

선생님의 위트 아래에는 혹시 잿더미가 쌓여 있었을까요. 화가 타오르고, 끄고, 다시 타오르고,또 끄고, 그걸 반복하며 두껍게 쌓인 잿더미가요. 그런데 선생님은 저의 영웅답게 도통 안전하게 답하질 않습니다. 쿠션어를 쓰지도 않습니다. 요즘 보는 인터뷰보다 선생님이 훨씬 용감하고 급진적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기득권을 쥔 쪽은 깨어날 필요가 없는 거고요. 남자가 기득권자인 건 확실하지 않습니까? 정권을 쥔 쪽이 그냥 내놓는 법은 없었잖습니까? 결국 빼앗지 않으면 안 되고…(후략)” “독재 치하에서 민주화 투쟁이 활발히 일어나는 것처럼, 지금 여성들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성적 편견에 대해 저항하는 건 이해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 방법이 투박해 보일지라도.” 마치 2022년에 91년생이 하는 인터뷰를 보는 것 같습니다. 1990년대에 31년생이 한 인터뷰인데요.

만약 선생님에게 이 편지가 전해진다면 지루한 얘기를 잘도 길게 써놨다고 하품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매서운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한국인, 대문호, 여성, 페미니스트(선생님은 매번 아니라고 하셨지만) 박완서가 있어서 그냥 한국인 여성 어쩌고인 저는 참 기쁩니다. 결국 선생님께 페미니스트라는 호칭을 붙인 절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너무 그러신걸요.

먼 곳에서 평안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글 오지은( 뮤지션 겸 작가)

 

앤 섹스턴

매일 새로운 이름으로
탄생할 시인, 앤 섹스턴

1928~1974.|미국의 시인.|정신 질환을 앓던 중 1974년 스스로 목숨을 끊음.|성, 죄의식, 자살 등 당시 금기시하던 소재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여성의 관점에서 본 임신, 결혼, 육체 등 작품에 여성적인 주제를 과감하게 도입함.

 

“여자는 여자의 어머니이다. 이게 중요한 것이다.”(<가정주부>)

오래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내가 오래도록 그에 대해서 생각하겠구나, 하는 것을요. 앤 섹스턴(1928~1974) 당신은 20세기 미국의 시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했지요.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국 왕립문학협회 회원이었으며 하버드 대학교 ‘피 베타 카파 클럽’ 최초의 여성 명예회원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시인으로 활동한 14년 동안 생전에 여덟 권, 사후에 세 권의 시집을 내고 내내 독자들의 관심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음 시집 출간과 관련한 미팅을 하고 돌아온 날 밤, 차고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지요. 어머니가 준 모피 코트를 입고 반지는 모두 뺀 채였습니다.

작가들이 자신의 삶을, 감정을, 트라우마와 상처를 글쓰기로 그대로 폭발시키며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물론 그런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글이 출발해 완성이라는 과녁을 맞혔다면 그건 작가의 실제 삶을 잘 비껴갔기 때문일 거예요. 쓰는 사람은 늘 자기 폭로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고백이라는 글쓰기의 가장 큰 원동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지요. 미치지 않기 위해 애쓰고 때로는 기꺼이 미치기 위해 나 자신을 순응시키는 것. 작가로서의 그 행위는 언제나 어렵고 위험하고 낯설게 느껴져요.

내가 읽은 당신의 첫 시는 ‘당신, 마틴 선생님’이고 그것은 당신이 스물여섯 나이인 1956년 우울증 치료를 위해 정신병원에 입원한 얘기를 다루고 있어요. “나는야 이 여름 호텔의 여왕” ,“아침 내내 모카신을 만들죠”라고 노래하며 “내가 아직도 길을 잃고 있나요?” 하고 물을 때 나는 앞으로 내내 대화할 수 있는 텍스트를 만났다고 생각했어요.

미국의 중산층 신화 아래 고통받고 억압당했던 당신은 어쩌면 그 시대의 병증을 제대로 앓았는지도 모릅니다. 완전한 여성이라면 그림 같은 집을 완벽하게 사수하는 가정주부가 되어야 했죠. 거기에는 물론 출산의 완수와 양육자로서의 희생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 패권 국가가 된 미국은 가족주의와 가부장제를 통해 더 강력한 힘을 욕망했지요. 그 욕망에는 여성의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민자들의 자리도 없었을 겁니다. 빈자의 자리는 있었을까요?

정신과 주치의의 권유를 받고 병증을 극복하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한 당신은 처음부터 다른 작가들과는 완전히 다른 용감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머리가 당신을 시로 이끈 것이 아니었지요. 사회적 성공의 수단도 아니었을 겁니다. 아파서 펜을 들고, 살고 싶어서 행을 이어 써나갔겠지요. 그렇게 해서 여성의 성적 욕망이, 좌절이, 생리와 낙태가, 냉혹한 어머니와 딸의 분노가, 자살 충동과 정신분열이 시의 세계로 흘러들어옵니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그 소재들은 당시 미국 시단에 일대 충격을 주었지요.

내가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건 그런데 왜 당신의 시에서 이 모든 것이 상냥하고 명랑하게 느껴지는가입니다. “나는 여자로 사는 일이 지긋지긋해/ 숟가락이 지긋지긋하고 주전자가 지긋지긋하고/ (…) 물건들의 젠더가 지긋지긋해.”(‘천사와 사귀기’>) 하며 당신이 삶의 염증을 노래할 때에도 왜 위트와 생기는 유지되며 “나는 홀린 마녀, 밖으로 싸돌아다녔지/ 검은 대기에 출몰하고, 밤엔 더 용감하지. (…) 나는 그런 여자 과”(‘그런 여자 과(科)’)라고 할 때 왜 당신은 세계의 위선과 보수성 너머로 자유롭고 리드미컬하게 뛰놀고 있는 듯 그려지는가 하는 점이에요. 나는 그 발걸음을 실제 눈으로 본 것 같았죠. 당신이 말했듯 그것은 당신의 시가 진실된 고백에서 나오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자신의 불행에 대한 분명한 성찰과 자기 입장이 있지요.

당신의 작품이 그 당시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평단의 평가는 인색한 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날것의 고백이 심지어 역겹다고 말한 동료도 있었다고요. 제한되고 인정된 욕망만이 여성들에게 허용되고 시적 표현 역시 어떤 규율의 모범 아래 평가되던 시절, 집단적 연대와 행동을 촉구하는 선언적 시들이 페미니즘의 징후로 조명받던 시절, 종종 당신은 오해받거나 잊혔지요. 하지만 다행히 오늘에 와서 당신의 고백은 ‘앓는 자’들을 자신의 고통을 통해 대변했던 작품으로, 분열된 자아 앞에 혼란스러워하고 죽음 충동과 싸우면서도 창작을 놓지 않았던 한 예술가의 투쟁기이자 인간사의 내밀한 상처를 들여다보게 하는 시적 기록으로 다시 읽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기억에서 당신의 마지막은 차고에 있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세상을 떠날 즈음 남긴 시, ‘그 사랑을 죽이며’에서처럼 당신은 여전히 밤을 일구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춤을 추고 있지요. 붉게 차려입고 타오르고 있으며 “고독이라는/ 제트 기류”를 떠나서 “단 한 송이 붉은 장미처럼 날고 있”습니다.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면 당신의 시를 읽는 여성들은 당연히 더 용감해질 수 있을 겁니다. “네가 있는 거기서 네 자신의 자신을 사랑하”(‘더블 이미지’)라는, 당신이 딸을 위해 남긴 시의 문장을 품고 우리는 어제와는 다른 더 진전된 날을 맞을 거예요. 그렇게 계속될 내일에 용기와 기쁨과 그리고 당신의 이름을 적어놓으며, 우리 용감한 밤에 다시 만나요. 글 김금희 (작가)

 

이희호

성평등 민주사회를 꿈꾼
페미니스트, 이희호

1922~2019.|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배우자.|6.25전쟁 도중 피란 생활을 하다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어 여성운동을 시작.|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 여성문제연구원 간사,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한국 여성운동의 초석을 다짐.

 

이희호 선생님 안녕하세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는 게 영 낯선 일은 아니실 거라는 생각을 하며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저는 장혜영이라고 합니다. 올해 서른여섯 살의 여성인 저는 대한민국 제21대 국회의 정의당 소속 비례대표 국회의원입니다. 편지 첫머리에서 선생님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습니다. 사람들은 고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이신 선생님을 보통 ‘여사님’이라고 칭하지만 ‘여성’을 강조하는 그 호칭이 못내 싫어 저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골랐습니다.

올해 여성의 날을 맞아 돌아가신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보라는 제안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신기하게도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선생님께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길이 남을 1세대 페미니스트이면서 동시에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동지이자 배우자로서 한국 정치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생님께라면 2022년의 대한민국에서 청년 여성 정치인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외로운 일인지를 털어놓아도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 나이였을 무렵인 1958년의 한국 정치 상황과 지금은 아주 다르지만 ‘여성 없는 정치’라는 점에서는 여전히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고작 19%에 불과한 대한민국 정치계에는 두 종류의 정치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정치인’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 정치인’입니다. 기자들은 제게 자꾸 ‘정치인으로서의 포부’가 아니라 ‘청년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포부’를 묻습니다. “중년 남성 의원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시나요?” 이렇게 되물으면 그들은 멋쩍은지 말을 돌립니다. 물론 세상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작고하시기 직전인 2018년, 정치권을 포함한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터져 나온 미투 운동 역시 그래도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증거의 하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 언론사와 한 인터뷰에서 미투에 관해 정말 가슴 아프고 화가 난다고 하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여성들이) 용기 있게 나서는 것을 보면 좋아요. 우리 땐 생각도 못 했어요. 대견하고 고마워요.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의 당부처럼 미투 운동 이후로도 우리 사회의 많은 여성이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지금껏 쌓여 있던 여성 인권과 성 평등에 관한 의제들에 관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 결과 불법 촬영이나 디지털 성폭력 근절, 낙태죄 폐지 같은 의제들은 짧은 시간 안에 참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서 ‘백래시’도 만만찮게 강해졌습니다. 5년 전만 하더라도 여러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지금 많은 사람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낙인처럼 사용합니다.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다짜고짜 ‘페미’로 몰아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험한 욕설과 비난, 협박을 늘어놓는 것을 마치 게임처럼 즐깁니다. 이런 폭력에 시달리다 또 한 명의 20대 여성이 최근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 인권 신장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설립한 여성가족부는 마치 오만 악의 근원인 양 온갖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이런 반여성적 분위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야당의 유력 대선 후보와 당대표는 대단한 공약이나 되는 듯이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 글자를 내걸었습니다. 2001년 여성가족부 출범 당시 김대중 대통령께서 “여성가족부의 탄생을 축하하지만 빨리 없어질수록 좋습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입니다. 이런 퇴행의 한복판에서 좌절감이 밀려올 때마다 저는 저보다 먼저 이 길을 가기 시작한 분들의 이야기를 찾아 읽습니다. 선생님의 자서전인 <동행: 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 역시 이 과정에서 만난 책입니다. 결코 일직선으로 진보하지 않는 역사의 거센 파도 앞에서도 꿋꿋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길로 나아갔던 선생님 같은 분들의 이야기는 큰 울림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자서전 대부분은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신 이후의 삶을 다루지만, 저는 선생님의 어린 시절과 결혼 전의 삶을 담은 1장이 참 좋습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여성으로 태어나 피지배 민족의 설움과 남존여비의 부당성을 동시에 겪으면서도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을 마음에 품고 결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야기, 해방 이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꿈꾸던 유학은커녕 피란길에 올라야 했을 때도 좌절하는 대신 임시수도 부산에서 여성운동의 꿈을 키우며 사람들을 도왔던 이야기를 읽으며 과연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싶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도 했습니다. 휴전협정 이후 마침내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수의 길 대신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을 둘 다 할 수 있다는 이유로 YWCA 총무로서 본격적인 여성운동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셨을 때가 딱 지금의 제 나이셨어요. ‘아내를 밟는 자 나라 밟는다’라는 당시의 구호는 지금 봐도 천재적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생님은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염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런 세상이 오기를 염원하기에 피로와 고독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하더라도 지금 가는 이 길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언젠가 선생님이 그러하셨듯 저 역시 지금 제가 겪는 이 모든 일이 갖는 진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지금 제가 쓰는 이 편지를 미래의 누군가가 읽으며 ‘이 사람도 무수히 번민했지만 앞선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위안과 용기를 얻으며 끝까지 앞으로 나아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이 세상을 있는 힘껏 살아주셔서, 그리고 그 이야기를 후대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생생히 남겨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시니 아마도 천국에 계시겠지요. 천국에서도 2022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축하하시나요? 왠지 선생님은 그러실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글 장혜영(정의당 국회의원)

리나 보 바르디

자유로운 열대의 모더니스트,
리나 보 바르디

1914~1992.|이탈리아 태생의 브라질 건축가.|건축의 사회문화적 가능성을 주장한 모더니스트.|상파울루 미술관, 세시 폼페이아(SESC), 유리의 집 등 독창적인 건축물을 남김.

유유히 떠 있는 콘크리트 건물 아래에서 벼룩시장이 열리고 있습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그 시원한 그늘 속으로 이끌리고, 아이들은 부서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장터를 가로지릅니다. 그곳은 1968년의 상파울루 미술관. 강렬한 햇빛에 빛나는 4개의 붉은색 기둥, 그 위에 74미터를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건물이 우아하게 지면에서 떠 있고, 건물 내부에는 아름다운 전시가, 그 아래에는 도시의 일상이 나란히 생명력을 반짝입니다. 2022년인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은 여전히 생소합니다. 리나 보 바르디, 당신이 설계한 이 건물은 어느덧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모더니즘 건축물이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2021년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은 당신에게 특별 황금사자상을 헌정했고, 올라퍼 엘리아손, 막스 마라, 노먼 포스터, 세지마 가즈요 등 수많은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당신에게 영감을 얻은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이토록 오늘날까지 많은 영감을 주는 여성, 20세기의 가장 중요하고 탁월한 표현력을 지닌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현재까지 연재 중인 디자인 출판물 <도무스>의 편집자, 큐레이터, 교육자 그리고 정치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20세기 초 당시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여성으로서 특히나 남성이 지배적인 건축계에 몸담고, 이탈리아에서 브라질로 이주해 이민자로서 그 사회에 헌신했습니다. 당신의 작업이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최근에야 재조명받게 된 것은 불운한 일입니다. 그건 모더니즘의 계보에서 여성들의 공헌이 배제되었던 탓일 뿐만 아니라, 지난 반세기 동안 브라질의 국가적 운명이 뒤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이름이 디자인 역사에서 가려져 있던 것만큼, 서유럽과 북미 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이 그 외의 지역을 향한 우리의 눈을 두껍게 가리고 있었음 또한 인정해야만 합니다. 여러모로 당신을 알게 되기까지, 겹겹이 쌓인 짙은 안개를 걷어내야만 했습니다.

언젠가 작곡가 존 케이지가 언급했듯, 당신의 작업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건축’의 표상입니다. 바닥에서 높이 들어 올려진 상파울루 미술관은, 그 아래 넓은 공간을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열어주었습니다. 건물 아래 빈 공간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즐거운 자유를 선사했습니다. 한편 미술관 내부에서 선보인 유리로 된 이젤은 그림을 벽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유리 이젤에 걸린 그림들은 벽으로부터 자유롭죠. 그림을 보는 이들 또한 벽을 따라 감상해야만 했던 미술관의 오랜 관습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당신은 제가 전시를 관람하는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 놓았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위트 있는 방식으로요. 건축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이토록 매혹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요.

이렇게 당신이 남긴 작업들을 되돌아보며, 저는 문득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건축가들의 엄격한 규정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요?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필립 존슨, 이 모더니즘의 세 거장이 창조한 주택들은 거주에 적합하지 않은, 단지 보여주기 식 집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이들의 주택은 그 안에 사는 사람보다는 건축의 구조와 형식에 관심이 많은 듯 보입니다. 결국 의뢰인에게는 금전적, 정신적 희생을 요구했으며, 대부분 긴 소송과 그에 따른 환멸과 고통으로 끝나곤 했죠. 이렇게 건축이란 자주 우리를 주눅 들게 했습니다. ‘건축’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무겁고 진지한지! 건축은 위대한 구조물로 군림하거나, 수학 교사 같은 엄격한 태도로 우리를 규정하고 가르치려 듭니다. 건축은 어려운 것, 잘 이해되지 않고 불친절한 것, 해석하기 힘든 것, 남의 종교처럼 멀고 문턱이 높은 언어로 우리를 소외시키는 것. 이런 인식은 건축가들의 지나친 자신감 혹은 일종의 우월감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건축가나 건축 자체가 신성하고 불변하는 존재라는 태도로 작업하지 않았어요. 지나치게 말끔한 디테일과 호화로운 마감을 구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조금은 투박하고 거친 물성으로, 그 지역에서 만들어진 재료와 그곳의 가공 방식으로, 사람들이 일상과 문화를 자유롭게 만들고 누릴 독특한 장소를 창조했습니다. 그것은 가장 솔직한 방법으로 지식인들과 오늘날의 건축가들이 가진 모든 문‘ 화적 우월 의식’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천재 건축가 한 명이 모든 공간의 기능을 단순히 예측하고 규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이 말한 문화적 우월 의식일 테고, 이런 터무니없는 규정들은 그동안 모더니즘 전반을 강하게 지배했습니다.

모더니즘 키즈인 저 역시 이미 이런 규정들에 중독돼버린 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메시지는 해독제처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건축가가 모든 공간을 기능적으로 규정하고, 모든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하다는 겸손한 자각에 웃으며 공감합니다. ‘세시 폼페이아(SESC)’에서 당신이 보여준 규정 없이 열린 공간들은, 익숙한 모더니즘과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그 안에는 고정된 벽이나 방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공간들에서 자유롭고 우연한 경험이 가능합니다. 어떤 벽은 부드러운 커튼으로 대체되기도 하고, 다양한 높이로 묘하게 프라이버시가 지켜진다고 느끼게 하죠. 천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은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뛰놀게 하고, 반면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공간은 눈앞의 무언가에 집중하게 합니다. 이 공간은 언제든 변화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건축은 어느새 환경이 되고, 오직 사람들에 의해서 완성되죠. 어디서든 앉거나 걷고, 책을 읽고, 만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언젠가 그 속에서 흘러가듯 걷고, 누군가를 마주치고, 걸터앉아 잠시 공상에 빠지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것은 건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자유로운 영토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자유로운 영토가 바로 당신의 이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뜨거운 열대의 도시에서 피어난 모더니즘. 당신은 사람, 물질, 시간, 날씨, 그리고 그 변화와 유동성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당신을 하나의 스타일이나 양식에 가두어 평가할 수 없는 이유도 그 자유로운 유연성에 있습니다. 당신의 건축은 고체이기보다는 액체처럼 흐르고, 마침표이기보다는 열린 물음표에 가깝습니다. 주목받지 못했던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에도, 그리고 지금도. 상파울루 미술관 아래 광장에서는 여전히 삶이 생동하고, 도시의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글 이나라(건축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