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산을 오를 때
김혜진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중편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이 있다.
제5회 중앙장편문학상,
제36회 신동엽문학상,
제4회 이호철통일로문학상 특별상,
제28회 대산문학상, 2021년
2022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여기 맞아? 이 산이야? 인터넷에서 본 거랑은 좀 다르네.”
멀리 등산로 초입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그가 물었고 그녀가 답했다.
“그러게. 많이 다르네.”
두 사람이 인터넷에서 봤던 산은 야트막했지만 울창했고, 아담했지만 아늑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등산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 앞에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산의 모습은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한 사람이 등산을 제안했고, 다른 한 사람이 동의했으므로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각부터 채비를 하고 이곳까지 왔다는 걸 두 사람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이제 두 사람은 후회가 차오르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모른 척하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할까, 그만두자고 할까. 두 사람은 서로의 입에서 자신이 기다리는 말이 나오기를 바라며 느린 걸음으로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축축하고 쌀쌀한 어둠 속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맑은 날일지, 흐린 날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겨우내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연초록 빛깔이 어른거리고 있었지만 아직은 봄이라고 할 수 없었다. 갑자기 비가 내리고, 눈이 퍼붓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질 수 있었다. 지금은 모든 게 불확실한 계절이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안내 지도를 살펴보았고, 운동기구가 비치된 운동장을 지났다. 테니스장을 지나고 나무 덱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자 첫 번째 갈림길이 나왔다.
“이쪽은 아닌 거 같아.”
그녀가 커다란 돌들이 박힌 가파른 길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쪽으로는 아무도 안 가는데?”
그는 반대쪽 길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아니라고 말한 길은 그래도 길이라는 걸 알아볼 정도였지만 반대쪽 길은 길인지, 길이 아닌지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완만한 경사는 오르기 쉬워 보였으나 나무와 돌 같은 지형물이 없어 황무지 언덕 같았다.
“그래도 이쪽은 너무 오르막이야. 어차피 어디로든 올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저 길로 가자.”
두 사람은 길게 실랑이를 벌이는 대신 그녀가 선택한 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비탈진 길을 오르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앞서 걷던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의 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그녀가 그의 배낭을 힘껏 붙잡았다. 언덕을 넘어서자 한동안은 평평한 능선 길이 이어졌다.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그녀가 물으면 그가 답했다.
“왜 못 가. 가고도 남지. 아주 높은 산도 아니잖아. 저기 보이지? 사람들 올라가잖아.”
그의 말처럼 산은 아주 높은 편이 아니었고, 길이 험하지도 않았다. 짧으면 한 시간, 길어도 두 시간이면 정상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한숨을 돌린 뒤 다시 출발했다. 땀에 젖은 옷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고 시원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자그마해지는 도심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곧게 나아가다가 구불구불해지고 다시 가팔라지는 길을 따라 계속 이어졌다. 앞서 걷는 그의 뒷모습이 그녀에겐 잠깐씩 낯설었고, 언뜻 스치는 그녀의 옆얼굴이 그에게 생소하게 다가올 때가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그것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두 번째 갈림길 앞에 섰을 때 그는 이번만큼은 그녀의 결정에 따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가 선택한 황무지 언덕길은 등산로가 아니어서 능선 길이 끝나는 지점부터 한참을 헤맨 탓이었다.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한 탓에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저쪽으로 가자. 저리로 가면 처음 그 길과 연결될 거야.”
그가 말했고 그녀가 답했다.
“어차피 길은 다 이어져 있어. 이 길로 쭉 올라갔다가 내려오면 돼.”
그는 그녀와 말다툼을 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기억하는 그녀의 잘못된 결정들. 그 결정으로 인해 허비해야 했던 시간들. 그는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다. 공격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길로 다녀야 한다는 법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녀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렇게 쏘아붙였고, 그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매사 상상력을 발휘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의 기준과 규칙을 당연한 듯 따르면서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수시로 상대의 잘못만을 들먹이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와 그녀는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두 사람은 각자 선택한 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산은 한순간도 너그럽지 않았다. 언제나 무장한 듯 평온한 표정을 고수하는 누군가의 진짜 얼굴을 비로소 대면하는 기분이었다. 한 걸음도 수월하게 내디딜 수 없었고,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한기가 일었다. 우거진 나무 수풀 사이에서 뭔가 어른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산에는 두 사람이 짐작했던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산은 오로지 두 사람이 상상하지 않은 것들로만 이뤄진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등산을 하겠다고 했을까. 왜 하필이면 그 사람과 여기를 온 걸까. 어쩌자고 이런 어리석은 일을 벌인 걸까.”
한동안 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그런 후회였다. 그러나 인적이 뜸해지고, 방향감각이 옅어지고, 좁고 가파른 길이 끝도 없이 이어지자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됐다. 그때마다 후회 아래 숨죽이고 있던 걱정과 미안함이 조용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쯤이야?”
먼저 전화를 한 건 그녀였다.
“여기? 모르겠네. 길이 나올 줄 알았는데, 계속 같은 자리만 헤매고 있나 봐.”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경험이란 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흔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중략) 그럼에도 이 산을 함께 오르는 자신들에게는
모든 것이 두 번은 반복되지 않는, 단 한 번뿐인 순간이라는 것을.”
지친 듯한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바람 소리와 새소리, 말소리 같은 소음들이 따라왔다. 그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건 아니지?”
그녀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물었고, 그러고 나자 허술하고 부주의한 성격 탓에 그가 아슬아슬하게 피해왔던 과거의 위험천만한 상황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뭐가 보여? 일단 다시 와. 아까 거기에서 다시 만나.”
그녀는 그렇게 소리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헤어진 지점에서 다시 만났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고, 그제야 안심이 되었는데, 두 사람 모두 그것에 대해 말하진 않았다. 두 사람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고구마를 나눠 먹었다. 그런 후엔 곧장 산에서 내려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흐렸던 날씨가 개고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지금껏 퉁명스럽고 불친절하게만 보였던 산의 모습이 조금씩 호의적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때마침 똑같은 등산복을 입고 산을 내려오던 노부부가 두 사람 곁을 지나쳤다. 왜소한 체구였지만 걸음걸이는 다부지고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정상에서 오세요?”
그녀는 그렇게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로운 미소까지 머금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순간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것이 의문인지, 존경인지, 동경인지, 그녀는 종잡을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볼래?”
그렇게 제안한 건 그였다.
“이 길로?”
그녀는 그렇게 되물으며 이 산에 오자고 말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녀는 산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더 가야 정상에 닿을 수 있을지, 그곳에 이르는 동안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마침내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어떤 모습일지, 그녀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지금 산을 오르며 겪는 일들이 특별한 추억으로 남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기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특별하게 여기는 경험이란 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흔한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국 등산이라는 건 산을 오르는 행위이고, 그러므로 상상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산을 함께 오르는 자신들에게는 모든 것이 두 번은 반복되지 않는, 단 한 번뿐인 순간이라는 것을.
“안 힘들어? 괜찮아?”
그는 몇 걸음 앞서 걷다가 자주 그녀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괜찮지. 얼른 올라가자.”
그녀는 그때마다 큰 소리로 대답했고, 걸음을 빨리했다. 정상은 멀지 않아 보였고, 금방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