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look 언룩

‘잊히고 사라지는 것’을 얼룩이라 부르고, 이를 기억할 수 있는 작업을 선보이는 창작 집단. 음악을 만드는 이승윤, 전유동, 조희원과 시를 짓는 최지인, 에세이를 쓰는 양주안, 기획과 디자인을 맡은 박화수로 이루어져 있다. 2019년, 서울문화재단의 창작 활동 지원 사업에 신청하기 위해 결성했다. 각자 활로를 찾던 시기에 이승윤이 주변 창작자들을 모으며 6명의 멤버가 구성되었고 현재 박화수, 양주안, 최지인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개인 작업을 통해 서로 영감을 주고받고, 창작자로서 고민을 나누며 ‘얼룩이 무늬가 되는 순간들’을 꾸준히 만들어가는 중이다.

 

이승윤 니트 스웨터, 셔츠, 팬츠 모두 비욘드클로젯(Beyond Closet), 슈즈 컨버스(Converse), 이어링 판도라 (Pandora), 링 불가리(Bulgari).

최지인 재킷, 셔츠, 팬츠 모두 마르니(Marni), 슈즈 반스(Vans), 시계 불가리(Bulgari).

(왼)이승윤의<폐허가 된다 해도>지난해 11월에 공개한 첫 정규 앨범. 마지막 트랙에 자리한 ‘흩어진 꿈을 모아서’는 고등학생 때 만든 곡으로 조희원, 전유동, 최지인, 양주안, 박화수가 코러스에 목소리를 더했다. (오)최지인의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 올해 신동엽문학상 시 부문에 선정된 시집으로 이승윤이 추천사를 썼다. 이 책에 실린 시 ‘동시대 문학’은 ‘얼룩; 잊히고 / 사라지는 건 우리다’라는 연으로 시작된다.

 

잊힌 시간, 사라진 공간, 소외된 사람을 얼룩에 비유한 점이 인상 깊어요. 얼룩을 눈여겨보게 된 계기가 있나요?

지인 우린 스스로를 얼룩으로 여겼어요. 각자 부단히 창작 활동을 해왔지만, 알아보는 이들이 많지 않다고 느꼈거든요.

승윤 빛을 발하지 못한 시간이 길었는데도 계속해서 창작해가던 시점에 6명이 모였어요. 그래서 정서에 비슷한 결이 있고요. 저마다의 방식으로 얼룩을 다루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얼룩이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고, 서울문화재단 창작 활동 지원 사업에 신청할 때도 대의명분으로 제격이라고 생각했어요.(웃음)

유동 그 대의명분이 좋았던 건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에요.

지인 결과적으로는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언룩이란 이름 아래 함께하고 있어요.

 

6명의 예술가가 함께할 때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주안 여러 분야의 예술가가 모였기에 작업 형태는 다르지만, 창작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은 유사한 것 같아요. 그 감정들을 멤버들이 알아준다는 게 큰 힘이 돼요.

승윤 우리가 30대 초·중반의 또래라는 것도 장점이에요. 동시대를 살아가는 창작자들이 나눈 견해를 각자의 작업으로 되가져가는 시간이 좋더라고요.

희원 마음이 맞는 또래 창작자를 만나는 일이 흔치 않거든요.

지인 예전에 승윤 씨가 한 인터뷰에서 언룩에 대해 ‘친구 공동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정확한 표현인 것 같아요. 서로의 곁을 내어주니까요.

유동 맞아요.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시선과 믿음이 있다는 걸 알아요.

 

믿음의 기반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요?

승윤 각자 본인이 얼룩이라는 걸 인지하지만, 그렇다고 얼룩이 아닌 세상을 악에 받친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그곳만을 선망하진 않아요. 삶을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친구들이라 처음부터 믿음이 갔어요.

주안 시간이 그 믿음을 더욱 돈독히 다져준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을 만나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면 결국에는 그가 곁에 남거나 떠나가기 마련이잖아요. 언룩 멤버들은 지금 가까이에 남아 있어요.

화수 전 함께한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어요. 낯을 가리는 편이라 초반에는 어색했지만,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점점 마음을 열게 되었어요.

지인 일하는 태도의 영향도 있었어요. 협업할 때 드러나는 예술에 대한 의지와 열정에서 자극을 받고, 믿음도 키울 수 있었어요.

 

박화수 터틀넥 티엠오(TMO), 원피스 롱샴 (Longchamp), 부츠 렉켄(Rekken), 로즈 골드 네크리스와 브레이슬릿 불가리(Bulgari), 진주 네크리스 위아몬즈(weamondz), 이어링 허라디 (Heradi), 시계 살바토레 페라가모 (Salvatore Ferragamo).

전유동 수트와 셔츠 아더(ADER), 슈즈 손신발 (SONSHINBAL), 링 까롯(Karot).

(왼)박화수의 ‘One Take Demo’ 포스터 전유동이 한 달간 춘천에 머물며 작업한 곡들을 처음으로 선보인 공연 ‘One Take Demo’를 위해 디자인했다. 이 공연에서 최지인이 연출을, 양주안이 사회를 맡았다. (오)전유동의 <이소> 지난해 11월에 선보인 EP. 혼잡한 세상으로 기꺼이 몸을 던질 준비가 된 둥지 속 아기 새의 이야기를 다룬 수록곡 ‘이소’를 듣고, 박화수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얻었다.

 

멤버들과 어떤 협업을 하고 있어요?

지인 ‘음악가의 음악’이 대표적이에요. 음악가를 인터뷰하고, 그의 공연 ‘스폿 투 라이프(Spot To Life)’를 기획해 선보이는 프로젝트예요.

희원 주안 씨가 중심이 되어 인터뷰 질문지를 정리하는데, 저와 유동 씨도 참여해요. 음악가의 입장을 생각하며 저라면 어떤 질문을 받고 싶은지, 혹시 실례가 되는 질문은 없는지 조언하죠.

주안 이 프로젝트를 통해 관심이 가는 음악가를 소개하고 있어요. 우리 중 음악을 하는 멤버들도 인터뷰이로 함께했고요. 특히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승윤 씨와 ‘스폿 투 라이프’의 무대에 오른 순간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친구가 아닌 음악가와 에세이스트, 예술가 대 예술가로 무대에 오르니 여운이 오래가더라고요.

지인 이 프로젝트를 통해 친구를 인터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예술이라는 영역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다른 매체 인터뷰보다 깊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승윤 제가 ‘음악가의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당시에 멤버들과 “음악가가 음악 이야기를 할 채널이 없다”는 대화를 자주 나눴어요. 수면 아래에서 좋은 창작물을 만드는 음악가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창작자의 마음을 잘 알고 있으니 멤버끼리도 서로의 작업에 힘을 보태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지인 그럼요. 서로 진심으로 응원하고, 우리의 모든 작업을 사랑해요. 멤버들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축하의 말을 적어 언룩의 SNS를 통해 공개하고 있어요. 그게 저명한 인물의 추천사보다 소중하게 느껴져요.

주안 우리의 대화가 음악이나 책에 담기는 걸 지켜보니 흥미롭더라고요.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작품을 미리 확인하는 기분도 남다르고요.

유동 피드백할 때 할 말은 하는 편인데, 멤버들의 역량에 놀랄 때가 되게 많아요. 요즘 주안 씨가 첫 에세이 발간을 준비 중이니 나중에 다 같이 읽어야죠. 지인아, 아직 원고를 안 보여줬어요?

주안 지인 씨랑 둘이서만 간단히 합평을 했거든요. 다른 멤버에게는 좀 더 정리해 보여줄게요.

승윤 작품을 띄엄띄엄 냅시다. 다작하지 말고요.

지인 다작하는 건 승윤 씨죠.

화수 그런데 축하의 말은 희원 씨한테 제일 많이 썼어요. 싱글을 자주 냈거든요.

 

화수 씨도 언룩에서 디자인을 맡아 여러 창작물을 선보였어요. 멤버를 위한 디자인 작업을 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나요?

화수 멤버마다 어울리는 컨셉트로 디자인하는 편이에요. 이를테면 지인 씨는 클래식한 분위기, 희원 씨는 유머와 재치, 유동 씨는 자연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작업해요.

희원 언룩으로서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각 멤버에게 알맞은 디자인을 선물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해요.

화수 사실 전 스스로 예술가라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멤버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느낄 때도 있고요. 제 작업에 대한 확신이 없지만, 창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이들의 작업을 솔직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제 작업을 할 원동력을 얻을 수 있어요.

 

양주안 니트 카디건, 티셔츠, 팬츠 모두 아더 (ADER), 슈즈 쏘유레슈어(SO.U:LESURES).

조희원 재킷, 티셔츠, 팬츠 모두 아더(ADER), 네크리스 페르테(Xte).

(왼)양주안의 ‘음악가의 음악’ 소책자 ‘음악가의 음악’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한 인터뷰를 담았다. 복다진과 숨비 등 자신만의 색을 표현하며 살아가는 음악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오)조희원의 <Untitled>작사와 작곡부터 일부 악기의 연주, 믹싱과 마스터링, 커버 작업까지 직접 참여한 싱글. 녹음 장소 중 ‘승윤이 형 작업실’이 있다.

 

승윤 씨가 지인 씨의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의 추천사를 썼죠. ‘우리는 평소 서로의 모든 말에, 모든 삶의 방향성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있어요.

승윤 멤버마다 가지각색의 가치관을 갖고 있거든요. 그래서 견해를 첨예하게 드러내며 대립각을 세우기도 해요.

화수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와 가치관이 확연히 다르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했다면 이상하게 여길 말이라도, 멤버들이 하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승윤 궤변을 마음껏 늘어놓을 수 있는 거죠. 섣불리 오해하지 않으니까요. 멤버들의 됨됨이를 알고, 그래서 계속 응원하며 사랑할 수 있어요.

주안 서로의 모든 말과 삶의 방향성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 이야기에는 동의해요.

유동 느슨한 연대, 끈끈한 관계를 이룬 셈이에요.

 

언룩의 멤버이자 한 명의 예술가로 살아가며 삶에 생긴 변화가 있나요?

지인 궁금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주안 저를 똑바로 마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 굉장히 싫어하는 내면의 어떤 모습들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그 과정이 녹록지 않지만,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만족스러운 문장을 쓸 수 있더라고요. 저뿐 아니라 타인도 입체적인 면을 지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사람을 대할 때도 도움이 되고요.

주안 저를 똑바로 마주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스스로 굉장히 싫어하는 내면의 어떤 모습들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그 과정이 녹록지 않지만,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만족스러운 문장을 쓸 수 있더라고요. 저뿐 아니라 타인도 입체적인 면을 지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사람을 대할 때도 도움이 되고요.

희원 저도 비슷해요. 나이가 들어도 성과가 없으면 음악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죠. 그럼에도 꾸준히 창작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어요. ‘아직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 제 삶의 가장 큰 변화예요.

승윤 변화를 맞이했다기보다는 예술이란 여정을 통해 꾸준히 대화를 나누는 중이에요. 나, 동료, 친구를 비롯한 주변 존재와 나눈 말들이 제 삶에 남았어요.

화수 언룩이 만들어질 때 탄생한 말들을 지금도 자주 써요. 얼룩이 무늬가 되듯, 사라지는 것을 계속 기억하면 잊히지 않는다고요. 처음엔 그저 멋있는 문장이라고만 느꼈는데, 거듭 말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의미가 제 삶에 자연스레 들어왔어요.

지인 우리가 언룩으로 거창한 걸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말로는 누군가를 위로한다고 할 수 있지만, 단 한 명이라도 진정으로 치유하는 게 가능할까 싶거든요. 그럼에도 제가 쓰는 이유는 시가 저를 살게 하기 때문이에요. 예술을 통해 마음의 심연으로부터 나오고,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할 수 있어요.

 

앞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지켜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각자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유동 성실. 희원 열심히 활동하며 멋진 결과물을 계속 만드는 것.

주안 오래 함께하며 창작자로서의 욕망을 서로 자극하면 좋겠어요.

승윤 여러 의도를 만나고, 그 의도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려 해요. 마치 언룩처럼요.

지인 낯선 것들과 관계 맺기.

화수 저 자신이나 사회가 지우려고 하는 얼룩들을 부단히 호명할 거예요.

 

 


 

 

W/O F. 우프

시각 매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6명의 작가, 곽예인, 김보람, 성재윤, 홍지영, 황선미, 황아림으로 구성된 창작 그룹. 우프라는 이름은 ‘Without Frame’의 약자로, 프레임에서 벗어나 기존의 관습을 허물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자의 정체성을 들여다보며 그간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것, 발화되지 못한 것, 언어로 지칭하지 못한 것에 주목한다.

 

황아림 원피스 미스치프(Mischief), 부츠 레이첼 콕스 (Rachel Cox), 네크리스와 이어 커프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글로시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곽예인 니트 크롭트 톱 글로니(Glowny), 절개 데님 팬츠 와이씨에치(YCH), 슈즈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이어커프 포트레이트 리포트(Portrait Report).

 

우프의 시작이 궁금해요. 어떻게 6명이 모여 하나의 잡지를 만들게 됐어요?

예인 황예지 작가의 사진 수업에서 처음 만났어요.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스터디 그룹을 만든 게 시작이었죠.

지영 하나의 창작물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다만 우리의 사진 작업만 담지 말고, 새로운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보자고요. 그래서 관심 있던 분야인 퀴어나 섹슈얼리티를 연구해온 미학자나 작가에게 글을 청탁했어요. 기쁘게도 흔쾌히 수락해주었고요. 필진을 꾸렸으니 무조건 결과물을 만들어야 했죠. 5명의 우프 소속 작가와 6명의 외부 작가가 글, 사진, 디자인 등 각자의 방식으로 작업했고 그것을 한데 모아 잡지를 출간했어요.

 

왜 주제를 ‘슬픈 구멍’으로 정했어요?

아림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을 만한 개념이 필요했어요. 비슷한 분야에 관심이 있지만, 작업하는 세부 주제는 달랐거든요. 우리가 가진 공통적인 감정인 ‘슬픈’과 은유를 더할 수 있는 단어인 ‘구멍’을 결합해 주제를 정하고, 그 안에서 작업을 발전시켜 나갔죠.

재윤 ‘구멍’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어요. 물리적인 구멍일 수도 있고, 여성의 성기나 감시 카메라, 깊은 우울감을 의미할 수도 있죠.

예인 ‘슬픈’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오래 고민했어요. ‘이미 퀴어를 슬프게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리가 또 슬프다고 얘기해야 할까?’ 싶었죠.

지영 사회가 여성의 감정적인 말하기를 제한해온 것에 대해서도 고민했어요. 하지만 이 사회에 사는 퀴어 당사자로서, 그 감정에서 떨어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었어요. 슬픔은 슬픔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걸 슬픔이라고 말하는 것도 용기라고 생각해 주제를 정했어요.

 

각자의 슬픔을 가지고 구멍을 들여다보는 과정은 어땠어요?

선미 주제를 정한 뒤 구멍에 대해 오래 얘기를 나눴어요. 그렇게 각자 작업 주제를 찾아갔죠. 저는 깊게 팬 눈동자가 생각났어요. 커밍아웃 했을 때 저를 바라보던 흔들리는 눈동자 같은 거요. 폭력적이었던 아우팅의 경험도 떠올랐고요. 이건 혼자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고, 나만의 경험도 아닐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익명의 인터뷰 작업을 하고 얼굴 없는 초상을 찍었죠.

보람 지금껏 억압됐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어요. 나를 억압하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 고민해보니 제 경우에는 부모님이나 종교에서 왔다는 생각에 이를 소재로 사진을 찍었어요.

아림 저는 사진을 찍고 그걸 재료로 그래픽디자인을 했어요. 당시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세계가 멸망한 뒤 새롭게 도래할 세상에 서 있는 제 모습을 만들었어요. 슬픈 구멍이라는 파괴적인 감각에도 부합한다고 생각했고요.

 

김보람 코트와 톱 미스치프(Mischief), 팬츠와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황선미 데님 재킷과 스커트 아워레가시 (Our Legacy), 부츠 메종마레 (Maison Marais), 톱과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작품들을 하나의 책으로 묶을 때 외부 필진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재윤 우리는 이미지 위주로 얘기 하니까 그걸 뒷받침해줄 글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이 분야에 대해 정확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분들을 필진으로 섭외했죠. 글을 읽으며 내 작업이나 생각도 명쾌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지영 영화를 통해 구멍의 음습함에 대해 사유한 글을 비롯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준 외부 필진 덕분에 사유가 확장되기도 했고요.

 

돌이켜보면 첫 번째 잡지를 만드는 일은 우프에게 어떤 작업이었나요?

선미 늘 우리가 작업하는 모습이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만드는 내내 한 명씩 휘청거리기도 했거든요.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다 같이 험난하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었죠.

지영 바퀴 하나가 구르지 않으면 나머지가 끌고 가는 느낌으로. 엉망진창이지만 절대 멈추지 않는.(웃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집단이라는 게 느껴져요.

아림 서로에게 마음을 연 계기가 있어요. 작년 여름 옥상에서 복숭아를 먹으며 본인의 취향에 대해 깊은 얘기를 나눈 적이 있거든요. 검열되지 않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믿음도 생겼죠. 그래서 첫 번째 잡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섹슈얼리티를 다룬 책을 만들기 위해선 서로를 아는 게 중요하잖아요. 데면데면할 때는 깊은 이야기를 공유하지 못하니까요.

보람 그렇지. 그날이 깊긴 했지.(웃음)

 

협업하는 동료이자 친한 친구인 셈이네요. 두 관계 사이의 간극은 어떻게 메우는 편인가요?

지영 방법을 찾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작업을 바라볼 땐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게 이 사람을 아껴주는 방법이라 생각해요. 우리가 길게 함께하기 위한 일이니까요.

보람 저는 팀원들의 피드백을 매우 신뢰하는 편이에요. 내가 헤매고 있을 때 친구들이 정확한 지점을 찔러준다는 걸 이젠 알거든요. 부정적인 피드백을 들었을 때 기분이 상한다기 보단 내가 정말 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죠.

예인 한 번 욕 먹고 집에서 눈물 쏟은 다음 정신 차리는 거죠.

지영 눈물 쏟을 동안은 위로 안 해줘요. 강하게 키워야지.(웃음)

 

함께할 때만 발현되는 힘도 있어요?

아림 첫 번째 잡지를 만들고 있을 때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채워지지 않는 게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어요. 교수님이나 동기들에게 받는 피드백도 물론 소중하지만, 작업으로써 내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외면받거나 반려당한 경험이 많거든요. 그런데 우프 안에서는 내 얘기가 담긴 작품을 꺼내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어요. 그게 커다란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재윤 공감해요. 내 작업이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공격당하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여기선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크게 얘기할 수 있게 되고요. 돌아올 곳이 있으니 멀리 나갈 수도 있어요. 안전한 상태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꾸준히 의견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려고 노력하니 작업하는 데도 큰 힘이 되죠.

 

성재윤 터틀넥과 데님 와이드 팬츠 메종마레 (Maison Marais), 슈즈 레이첼 콕스(Rachel Cox).

홍지영 크롭트 셔츠 와이씨에치(YCH), 미디스커트 미스치프(Mischief), 롱부츠 레이첼 콕스(Rachel Cox), 진주 네크리스 빈티지 헐리우드 (Vintage Hollywood), 이어 커프 포트레이트 리포트 (Portrait Report).

 

우프의 소개 글에서 본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동시대 시각 매체에는 배제와 차별이 존재한다. 소거된 이야기, 보이지 않는 이야기는 언제나 존재한다. 매끈하고 찬란하게 아름다운 사진들 속에서 우리는 집요하게 더럽고 치졸하고 의견이 분분한 것들을 찾으려 한다.” 우프가 깨고 싶은 기존의 관습은 무엇인가요?

지영 너무나도 많아요. 가부장제, 이성애 중심 사회 등을 하나하나 지칭할까도 고민했어요. 하지만 그러기엔 오해의 여지가 너무 많아요. 이성애 중심 사회라고 말했을 때 나와 타인의 인식이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우리가 집중하는 건 ‘어떤 것이 카메라에 계속 담겨왔는가, 어떤 것이 카메라에 담기지 못했는가’예요. 언어도 마찬가지고요. 우리에게 주어진 언어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 갈증을 해소하고자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만드는 지점도 있고요. 감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정확한 틀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기보단 그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어요.

 

우프가 기존의 관습을 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무엇인가요?

예인 누군가에겐 들리지 않던 이야기, 소거됐던 존재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 그 자체가 관습에 맞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묵음으로 처리 됐을 뿐이지 사라지지 않는 것이 많아요. 소리 나지 않는 곳에 계속 존재하는 사람이 있고요. ‘나 여기에 있어. 네가 안 보려고 해도 없는 게 아냐. 나 말고도 이런 것 되게 많아’라고 말하는 거죠.

아림 물리적인 폭력이 있는 반면에 조용한 폭력도 있잖아요. 싸우는 방법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강한 자세로 세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힘을 빼고 말하고 싶어요. 피해자로서의 경험이나 내가 가진 취약성을 작업으로 드러내며 얘기하는 거죠.

약함을 애써 강함으로 포장하지 않으려 해요. 그저 우리는 여기에 있다고, 너희가 무섭게 굴면 숨을 수도 있다고, 그렇지만 울면서도 말할 수 있다고. 이렇게 우리 자리에서 계속 싸우고 싶어요.

 

<Without Frame! Vol.1 슬픈 구멍> 지난 겨울에 발행한 첫 번째 잡지. ‘슬픈 구멍’을 주제로 몸, 욕망, 퀴어 등 섹슈얼리티 전반을 다룬다. 우프 소속 작가 김보람, 성재윤, 홍지영, 황아림, 황선미의 시각예술 작품을 수록했고, 곽예인은 편집 동인으로 함께했다. 감독 김보람과 사진가 황예지를 비롯한 외부 필진 6명의 글과 사진까지, 총 11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앞으로 우프는 어떤 행보를 보여줄 예정인가요?

보람 ‘더러움’을 주제로 다음 호를 준비하고 있어요. 1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지면의 한계를 많이 느꼈거든요. 그걸 보완할 오프라인 행사와 온라인 전시도 준비 중이에요.

지영 1호에서 우리가 느낀 감정에 대해 말했다면, 이번엔 그 감정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말하려고요. 사회가 어떤 것을 더럽다고 규정하고 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구성되었길래 우리가 바깥쪽에 위치한 채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며 만들었어요.

재윤 퀴어 정체성뿐 아니라 노동이나 질병의 문제도 다뤘어요. 종 차별이나 혐오 동물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했고요.

예인 필진도 두 배로 섭외했어요. 재윤 필진 두 배!(웃음)

 

기대하고 있을게요. 마지막 질문이에요. 혐오와 배제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예술이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걸 의도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예술로서 발화되는 개인의 서사가 있잖아요. 그로 인해 드러나고 확장되는 게 있고요. 거기에 집중하며 작업하고 있어요.

예인 저도 비슷해요. 세상 속에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저는 바이섹슈얼이고, 사회에서 약점이라 일컬어지는 부분이 있어요. 동시에 그렇지 않은 지점도 있고요. 나와 교차하는 누군가에겐 나의 창작 행위가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미 그저 나를 믿고 이 태도를 유지하면서 지속하려고 해요. 우리의 발화가 어딘가에 닿으면 누군가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

 

 


 

 

AHA Collective 아하콜렉티브

동양화와 한국화에 대한 담론에서 출발한 전통 콘텐츠 기반의 창작 집단. 동양화를 전공한 시각예술가 김샛별, 박주애, 정혜리, 최지원이 ‘한국적’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현대의 여러 이슈와 연관 지어 미디어 아트 작업에 담아내고 있다. 2018년 전시 <의문의 K->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최근 플랫폼엘 머신룸에서 열린 다원 예술 전시 <0과 1의 페이징>을 기획했다. 시각예술, 음악, 기술 분야의 다른 창작자와 꾸준히 협업도 하고 있다.

 

최지원 화이트 톱과 그레이 롱스커트 윤세(Yunse), 셔츠 머스트고온(Must-go-on), 블랙 부츠, 이어링,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정혜리 크롭트 재킷과 슬랙스 민아송(Minasong), 블랙 힐 바이비엘(byv:aile).

 

먼저 아하콜렉티브라는 팀이 아닌 개인 작업에 대해 묻고 싶어요.

지원 팀 소개에 익숙해서 저에 대해 말하는 게 조금 어색하네요.(웃음) 전 회화와 다원 예술에 관심이 많아요.

주애 3D 모델링과 게임 관련 작업을 좋아해요.

혜리 시각 매체를 활용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둔 작업을 이어오고 있어요.

샛별 첨단 기술을 배워 시각예술에 활용하고 있어요. 컴퓨터 프로그램, 엔지니어링 등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는 일을 주로 담당하죠. 각 멤버의 역할이 명확히 나뉘어 있진 않아요. 프로젝트마다 각자의 능력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죠.

 

4명의 시각예술가가 모여 아하콜렉티브를 결성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혜리 4명 다 동양화 공부를 오래 했어요. 같은 시기에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녔죠.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나니 동양화를 다른 방식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동기 3명에게 연락했고, 그게 아하콜렉티브의 시작이었어요. 처음엔 동양적이나 한국적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스터디가 중심이었는데, 이후 우리끼리 작품을 만들고 전시에도 참여하면서 한 팀으로 활동하게 되었어요.

 

여러 동기 중 지금의 멤버들이 모이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혜리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에 일단 저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이어야 했어요.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 그다지 친하지 않았어요.(웃음)

주애 혜리 씨가 어느 날 갑자기 저한테 밥을 같이 먹자고 했어요. 가벼운 마음으로 나갔는데, 한국적 콘텐츠에 관심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평소 흥미를 느끼던 분야라 한 번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지원 저도요. 혼자 회화 작업을 하던 때라 혜리 씨의 제안이 무척 반가웠어요. 협업이 제 개인 작업에도 동력이 되어줄 거라 생각했고요.

샛별 전 혜리 씨가 팀을 구상할 때부터 줄곧 옆에 있었어요. 처음 한자리에 모여 대화하던 날, 동양화 전공자로서 기본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있으니 말이 잘 통하더군요. 우리가 형형색색의 물고기 같았어요. 생김새, 먹이, 살아가는 방식 등이 제각각 다르지만 바다라는 광활한 터전은 같은 셈이죠.

혜리 각자 헤엄쳐 나아가려는 곳이 워낙 달라 초반엔 걱정이 앞섰어요. 아하콜렉티브를 준비하며 생각해둔 대략적인 방향도 있었으니까요.

 

초반의 방향성과 현재의 지향점이 많이 다른가요?

혜리 생각보다 다르지 않아요. 길 위에 있을 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크게 벗어나진 않았더라고요.

 

혼자가 아닌 팀으로 함께할 때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주애 서로를 보완해준다는 것. 이를테면 전 무모할 만큼 도전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편인데, 멤버들의 섬세한 시선이 더해져 재미있는 결과물이 탄생해요.

혜리 혼자 작업할 땐 여러 가지를 동시에 신경 써야 하니 집중하고 싶은 것에 온 힘을 다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런데 4명이 함께하면 필요한 부분이 자연스럽게 채워지더라고요. 자신의 자리를 찾아 협업하는 방식에 익숙해졌어요.

이젠 척 하면 척이죠. 각자 아하콜렉티브라는 자동차의 바퀴에 윤활유를 칠해주니 삐거덕거리면서도 전진할 수 있어요.

지원 긴장이 감도는 작업실 분위기가 함께 있으면 한결 가벼워진다는 점도 좋아요. 달콤한 간식 같은 순간이 많아 더 즐겁게 작업할 수 있죠. 혜리 같이 있을 때 작업과 일상의 경계가 사라지더라고요. 일하러 만난 김에 생일 파티를 하거나, 놀러 가서도 작업에 대해 토론하는 식이에요.

 

좋은 동료이자 친구인 셈이네요. 아하콜렉티브의 교집합에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주애 흥미로운 질문이네요.(웃음)

샛별 여집합을 찾는 편이 더 빠를 거예요. 겹치는 게 진짜 없거든요.

지원 교집합이 없으면 자주 부딪치기 마련이잖아요. 오히려 충돌을 통해 영감을 얻거나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기도 해요.

주애 그래서 변수의 등장을 반기죠.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아하콜렉티브만의 방법이 있어요?

샛별 한 명씩 그림을 그려요.

주애 ‘컵’이 주제라면, 멤버마다 다른 크기와 형태로 그리는 거죠. 각자의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완성되면 ‘설득 올림픽’이 시작돼요.

혜리 말로만 의견을 관철하면 실제로 구현했을 때 결과물이 예상과 다른 경우가 많더라고요. 시행착오를 거치며 우리만의 조율 방식을 찾았어요.

 

김샛별 벨트 원피스 준지(Juun.J), 워커 에잇 바이 육스(8 by YOOX), 링과 진주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박주애 레더 셔츠 머스트고온(Must-go-on), 블랙 5부 팬츠 메이크 어 토스트(Make A Toast), 힐 바이비엘(byv:aile).

 

아하콜렉티브는 전통문화 콘텐츠와 현시대 이슈의 연결점을 다루는 창작 집단이죠. 이에 주목한 계기가 있었나요?

주애 아하콜렉티브의 ‘아하(AHA)’가 ‘예술을 싫어하는 예술가(Artists who Hate Art)’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거든요. 동양화에 대해 공부하며 토론할 때, 이론적인 말만 하거나 시각적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식의 대화가 자주 오갔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었죠. 그래서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현대의 대중이 받아들일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요.

샛별 예를 들자면,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조선시대의 궁중 회화 ‘일월오봉도’를 보며 현대의 권력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당시 이 작품이 걸려 있는 경복궁 앞 광화문광장에서 시위가 한창 일어나고 있었거든요. 이에 착안해 사운드 인터랙션 형태의 작품인 ‘일월오봉’을 만들었어요.

주애 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는 목적 중 하나가 전통의 동시대적 해석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잘 전달하는 것이에요.

샛별 현대의 디지털 매체를 적극 활용하는 거죠.

주애 최근에는 빔 프로젝터와 조명을 자주 쓰고, 영상을 건물의 외벽 등에 투사하는 ‘프로젝션 매핑’ 기술도 접목해요.

지원 매체를 가리지 않는 편이에요. 주제에 따라 알맞은 도구와 방식을 고르죠.

 

전통을 기반으로 하니 미디어 아트에 접근하는 방식이 사뭇 다를 듯해요.

혜리 맞아요. 동양화와 회화에 근본을 두고 있으니 독특한 지점이 생기죠. 미디어 아트의 기술적인 면을 공부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여요.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이 첨단 기술을 동원한 작품을 선보여 이목을 끌었잖아요. 앞서 나가는 기술이 인문학적 메시지가 담긴 아하콜렉티브의 작품에 필요한 이유를 계속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하콜렉티브의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지원 요즘은 ‘현재성’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샛별 우리 또래인 1990년대생의 고민, 메타버스의 등장을 비롯한 디지털 세상의 변화 등에 주목하는 거죠. 다만 이에 대한 생각을 하나의 답으로 단정지어 말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지원 질문에서 우리만의 재치가 느껴지기를 바라고요.

 

이 팀의 의미를 무언가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샛별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호크룩스’요. 제 영혼의 일부를 아하콜렉티브에 나눠놓은 기분이에요.

혜리 호크 룩스, 동의합니다. 전 ‘멱살잡이’에 비유할게요. 내성적이고 우울한 면이 있는 제가 집 밖으로 나와 작업에 몰두하게 하거든요.

지원 일상의 대부분을 멤버들과 보내지만, 성향이 천양지차거든요. 우리가 핑퐁 하듯 나눈 대화가 새로운 자극을 주고, 정신이 바짝 들게 해요. 마치 ‘찬물 샤워’처럼요.

주애 이제 만날 때마다 찬물을 부어주어야겠네요.(웃음) 전 ‘건강식’을 꼽고 싶어요. 하고 싶은 것만 하던, 디저트만 즐기던 제 하루하루가 멤버들을 만난 후 더욱 건강해졌으니까요. 미술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요.

 

‘일월오봉_stream’(2021) ‘일월오봉도’를 재해석한 ‘일월오봉’의 연작으로, 현대 사회에서 권위가 드러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조형적으로 드러낸 가변 설치 작품이다.

‘영세제곱미터(0m³)’(2021) 현대인이 자주 마주하고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컴퓨터 운영체제의 홈 화면을 집에 비유한 미디어 설치 작품.

‘0과 1의 페이징’(2022) 타악기 그룹 ‘아우어 퍼쿠션’과 협업한 작품. 디지털 매체의 소통 방식과 타악기 악보가 지닌 유사성에 주목한다.

 

아하콜렉티브가 꿈꾸는 ‘우리’는 어떤 모습인가요?

샛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공하고 싶어요.(웃음) 4명의 여성 예술가가 모여 아하콜렉티브를 결성했을 때, 잠시 모였다가 흩어질 거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거든요.

주애 “아직도 해?”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우리끼리도 연말이 오면 서로 계속할 거냐고 물어봤어요.

혜리 ‘마의 3년’이라는 말이 있어요. 3년 이상 팀으로 활동하면 주변으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요. 현재 4년째 한 팀으로 활동 중인데, 앞으로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요. 우리의 영역을 미술에 한정 짓지 않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요.

 

예술가로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혜리 제가 멤버 중 미술을 제일 늦게 시작했거든요. 살아갈 만하면 예술에 매료되더라도 ‘이걸 꼭 해야겠다’라는 마음이 생기진 않는데, 숨통이 트이지 않을 땐 간절해지더라고요. 예술이 일종의 돌파구가 되어주었어요.

샛별 예술 이외의 것에 유혹당한 적이 없어요. 언제나 예술만 좋았고, 그렇게 살다 보니 이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어요.

주애 전 샛별 씨와 반대예요. 이것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다양한 일을 찾아보았죠. 다른 일을 해도 살아갈 수는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예술만큼 만족스럽지 않더라고요.

지원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든 생각인데, 예술이 직업은 아니잖아요. 모두가 각자의 삶에서 저마다의 예술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예술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생 가까이에 함께하는 존재인 것 같아요.

 

예술과 함께 나아가며 잃지 않으려는 가치가 있다면요?

샛별 때마침 최근에 꽂힌 것이 있거든요. 다 같이 말할까요? 하나, 둘, 셋!

전원 진정성!

지원 진정성은 진리나 진실처럼 어떤 기준을 토대로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없잖아요.

혜리 정답을 정하지 않는 우리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가치이기도 하고요.

주애 무언가에 좌우되지 않는, 진정성 있는 태도로 꾸준히 창작하고 싶어요. 그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