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셔츠와 크로셰 베스트 모두 메종마레(Maison Marais), 로라이즈 데님 쇼츠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슈즈, 니삭스, 액세서리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아이. 열두 살 소녀 ‘명은’(문승아)에게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하나 있다. 엄마 ‘경희’(장선)와 아빠 ‘성호’(강길우)가 시장에서 일을 한다는 것. 이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 명은은 ‘가짜 가족’을 만들어 담임선생님 ‘애란’(임선우)과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그렇게 그가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는 점점 커져간다. 이를 깨뜨린 건 ‘글쓰기 대회에서 상 받는 방법은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쓰는 것’이라는 전학 온 친구의 말. 이후 가족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원고지에 오롯이 옮기는 경험을 한 명은은 ‘거짓말’과 ‘솔직함’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성장통이라는 언덕을 스스로 넘는다. 이 이야기를 그린 영화 <비밀의 언덕>을 스크린에 올린 이지은 감독과 명은을 연기한 문승아 배우는 알고 있다. 우리 모두 명은처럼 각자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성장통을 수없이 겪는다는 사실을, 그 아픔을 의연하게 마주하다 보면 어느새 한층 성숙한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비밀의 언덕>이 7월 12일에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로 베를린 국제영화제와 무주산골영화제 등에서 호평받았죠. 개봉을 맞은 기분은 사뭇 다를 듯한데 어땠나요? 이지은 개봉을 앞두고 있을 때 오늘 촬영장 분위기처럼 파이팅이 넘쳤어요. 아낌없는 사랑을 준 이 영화를 더 많은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어 홍보 활동을 열심히 했죠. 문승아 저도 학교 친구들한테 개봉 소식을 전하고 다녔어요. 복도를 돌아다니며 포스터를 나눠 주기도 했고요. 빨리 애들이랑 같이 <비밀의 언덕>을 보러 가고 싶어요.

두 분은 이 영화를 계기로 처음 만난 순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요? 이지은 승아 배우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오디션을 보고, 1년 후 촬영을 시작했으니 3년의 시간이 흘렀네요. 분홍색 플리스 재킷을 입은 승아 배우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구수하게 ‘헤헤’ 웃던 모습이 기억나요. 문승아 그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어요. 친구들을 만나는 대신 오디션을 보러 가는데 날씨가 엄청 추웠단 말이에요. 실내에 들어오니 따뜻하길래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게 웃은 거예요.(웃음) 이지은 바로 이 웃음! 이런 모습이 제 마음을 녹였어요. 문승아 감독님한테 제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네요.(웃음)

이지은 감독님은 <비밀의 언덕>이 첫 장편영화이니만큼 준비 과정에 많은 공을 들였을 것 같아요. 문승아 배우에게 주연을 맡긴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지은 명은 역을 맡는 배우는 연기력은 물론이고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이끌며 관객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오디션 당시 승아 배우가 힘을 덜어낸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데, 몰입이 확 되더라고요. 캐스팅 후 촬영이 시작되기 전까지 승아 배우를 자주 만났어요. 감독과 배우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승아의 매력을 파악했고, 이를 영화에 반영했죠. 이를테면 고민에 빠진 승아의 얼굴을 기억해두고, 명은이가 선생님 앞에서 골똘히 생각하는 장면에 담아내려 하는 식으로요. 문승아 전 감독님이 자꾸 만나자고 하시길래 오디션이 안 끝난 줄 알았어요.(웃음)

 

슬리브리스 셔츠와 스커트 모두 코스(COS), 데님 재킷 토템(Toteme).

 

문승아 배우는 영화 <소리도 없이>와 <흩어진 밤>을 통해 일찍이 대중에게 자신을 알린 적 이 있죠. <비밀의 언덕>에는 왜 함께하고 싶었어요? 문승아 스토리 자체도 좋았지만, 진짜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데는 감독님의 역할이 컸어요. 다정한 분이라 제가 한결 편하게 대할 수 있어서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거든요. 현장에서도 마음 가는 대로 연기하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좋았어요.

배우에게 다양한 시도를 해볼 기회를 주셨군요. 이지은 즉흥연기를 할 때 왜 좋았어? 문승아 처음에는 감독님의 요청으로 해본 것뿐이었는데, 할수록 좋아지더라고요. 점점 잘할 수 있게 된 것 같고요. 명은이가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어울려 노는 장면, 돈가스를 먹을 때 포크로 “건배!” 하는 장면은 거의 다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어요.

의견이 상충한 장면이 있다면요? 이지은 명은이가 엄마와 말다툼을 한 후 쓰레기봉투를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이요. 전 명은이가 봉투를 편 채 팔랑팔랑 흔들며 걸어가기를 바랐어요. 명은이의 힘겨운 마음을 봉투로 표현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승아 배우가 옆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더라고요. “보통 이렇게 안 가져가는데….” 문승아 원래 쓰레기봉투를 사면 접힌 상태로 받아서 그대로 가져가잖아요. 감독님한테 제 생각을 말씀드렸더니 “그래? 그럼 승아가 한번 해볼까?” 하셨어요. 이지은 제가 작품의 전체적인 컨셉트를 생각했다면, 승아 배우는 명은이라는 인물에게 더 집중한 거죠. 결국 접은 봉투로 촬영한 버전을 영화에 넣었어요.

배우의 혜안이 빛을 발한 장면이네요.(웃음) 한편 이번 영화가 배우에게 안긴 어려움도 있었을 거라 짐작해요. 태어나기 10여 년 전인 1996년에 펼쳐지는 일을 그린 작품이니까요. 문승아 먼 옛날처럼 느껴지진 않았어요. 대본을 읽은 엄마가 당시를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거든요. 1990년대가 배경이라 신기했던 것 중 하나는 칠판이에요. 혹시 전자 칠판 아세요? 요즘은 전자 칠판이나 화이트보드를 사용하는 학교가 대부분인데, 분필로 글씨를 쓰는 칠판을 이번에 처음 봤어요.

1990년대를 배경으로 설정한 의도가 궁금해요. 이지은 <비밀의 언덕>에서 중요한 소재는 ‘가정환경 조사서’예요. 그런데 선생님이 “네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시니?”라는 질문을 공개적으로 하기보다는 자습 시간에 한 명씩 불러 은근히 물어봤던 1990년대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하고싶었어요. 문승아 선생님과 일대일로 면담할 때, 다른 친구들이 조용히 엿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 아찔하겠죠.

명은도 아찔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어요. 시장에서 일하는 아빠와 엄마가 부끄러워 ‘가짜 부모님’까지 만들어낼 정도였잖아요. 그 당돌한 모습을 보며 “새로운 10대 캐릭터를 보고 싶었다”던 감독님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이지은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제 머릿속에 뜨거운 야망을 지닌, 어찌 보면 영악한 작은 아이가 하나 있었어요. 그 아이가 명은이라는 영화적 인물로 탄생한 것 같고요. 명은이처럼 무언가를 치밀하게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열두 살 소녀가 실제로 존재하긴 어렵겠죠. 영화를 본 관객이 명은이의 행동에 대해 ‘저렇게까지 해도 돼?’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전 명은이가 본인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행동을 했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다소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명은이의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녹여내려 했어요. 예를 들어 명은이가 거짓을 꾸며낼 때 귀여운 음악을 삽입해 분위기를 환기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죠.

 

이지은 니트 셔츠와 팬츠 모두 코스(COS). 문승아 반소매 니트 톱과 팬츠 모두 메종마레(Maison Marais), 버킷 햇 자크뮈스(Jacquemus).

 

가정환경으로 인한 명은의 복잡한 내면이 배우의 표정을 통해 잘 드러나서 좋았어요. 촬영을 마무리한 후 완성작을 봤을 때 만족스러웠던 명은의 표정이 있나요? 문승아 예고편에 명은이가 시장에서 엄마를 못 본 척하는 장면이 있어요. 모자를 눌러쓴 채 양손에 커다란 멸치젓 통을 들고 걸어오는 엄마를 발견하고는 벽 뒤로 숨어버리죠. 그 순간 명은이가 지은 표정이 마음에 들어요.

명은이 본인의 가족에 대해 처음으로 밝힌 건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고 싶어 글을 쓸 때였죠. 원고지를 솔직한 이야기로 채워가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문승아 마음이더 복잡했을 것 같아요. 대회에서 매번 좋은 성적을 거둔 친구가 ‘솔직한 글이 좋다’는 말을 했고, 본인도 이를 알고 있지만 솔직해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요. 명은이가 가족에 관한 글을 쓰면서 줄곧 외면했던 자신의 내면을 살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글쓰기가 성찰의 도구가 되어줬다고 볼 수 있겠어요. 이지은맞아요. 명은이는 글을 쓰기 시작한 후 대회 주제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연구하고 배워가잖아요. 이를 통해 명은이가 세상을 더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기를 바랐어요. 그러다 보면 환경이나 평화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님은 지키지 않았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확장되었던 시선이끝내 가족에게로, 나에게로 좁혀지는 거죠. 이 경험을 통해 명은이가 스스로 성장할 수 있었을 거라 믿어요.

영화는 명은의 성장기를 다루지만, 부모님과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서사도 충분히 조명합니다. 그래서 명은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보게 되었어요. 이지은제가 영화 속 인물을 구상할 때 제일 중요하게 여긴 원칙은 ‘인간을 미화하지 않을 것’이었어요. 사람은 장점과 단점을 같이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모든 인물에게 어느 정도 빈틈을 남기려 했죠. 애란을 이상적이지 않은, 덤벙거리고 이기적인 면이 있는 선생님으로 그리는 식으로요. 명은이의 삼촌 ‘진우’(곽진무)도 마찬가지예요. 명은이에게 좋은 삼촌이고 싶어 어엿한 직업을 가진 척하고, 마음속에 자신만의 꿈을 품고 있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그저 한심한 아들일 뿐이죠.

 

티셔츠와 크로셰 베스트 모두 메종마레(Maison Marais), 로라이즈 데님 쇼츠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슈즈, 니삭스, 액세서리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명은이 완벽하다고 여겼던 진우네 가정도 어떤 결함을 가지고 있어요. 이를 비롯한 여러 가정을 접하며, 가족이란 존재에 대한 명은의 생각에 변화가 생겼을 것 같아요. 만약 “저에게 가족은 물음표예요”라는 명은의 문장에서 물음표 대신 다른 문장부호를 넣는다면, 무엇을 쓰고 싶어요? 문승아 음… 일단 느낌표는 아니에요. 가족끼리는 미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자주 싸우지만 서로 감싸주려 하는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강하게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거든요. 그래도 한 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가족은 내 마음을 쉬게 하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가족을 쉼표에 비유하고 싶어요.

가족에 대해 고민하며 거짓말을 해보고, 솔직한 글도 써본 명은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이지은 그건 명은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들이라면 명은이의 상황에 본인을 대입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2023년의 명은이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2023년의 명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지은 잠시 편지를 써도 될까요?(웃음) ‘명은아, 안녕. 너를 생각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어. 너에게 “그때의 내 마음을 잘 표현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고, 네 사랑을 받고 싶어. 잘 살고 있기를 바라.’ (배우에게) 어때, 괜찮지? 문승아 9.5 점! 감독님이 한 인터뷰에서 “성장통을 겪는 건 언덕을 오르는 일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신 게 생각나요. 만약 지금 명은이들이 각자의 언덕을 오르는 중이라면, 곧 평평한 땅이 나타날 거라 말해주고 싶어요. 고민하며 나아가는 과정이 힘들더라도, 그 고민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 해도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고요.

명은이들이 언덕을 넘는 지난한 과정을 잘 이겨낼 수 있겠죠? 문승아 반드시 이겨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아픔은 잠시뿐일 테니까요. 요즘 제 키가 자라려고 하는지 일주일 에 한 번꼴로 성장통이 오는데, 하루만 지나도 멀쩡해지더라고요. 이지은 진짜 성장통이네! 문승아 성장판의 성장통! 그런데 더 커질 저 자신을 상상하면 아프다가도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에요. 얼마나 클 수 있을지 되게 기대돼요.(웃음) 그러니까 명은이들도 성장의 아픔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훗날의 자신을 떠올렸으면 해요. 이지은 명은이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센스 있는 사람을 많이 마주한다면 좋겠어요. 아프다고 직접 말하지 않아도 마음을 헤아려주는 친구들과 어른들을요.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날까?’ 하는 기대를 품고, 언덕을 잘 올라가기를 바라요.

인간은 살면서 수많은 성장통을 겪죠. 우리는 삶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언덕에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두 분은 <비밀의 언덕> 이후의 오르막길을 어떻게 나아가고 싶나요? 이지은 <비밀의 언덕>처럼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어요. 누군가가 본받고 싶어 하거나, 실제로 겪지 못할 일을 대신 경험하는 인물을 작품에 담아내려 노력할 거예요. 제 영화를 만난 관객들이 살아가다가 문득 그 인물들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문승아 시간이 흐른 뒤 열 세살의 저를 되돌아보면 <비밀의 언덕>이 제일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한 달의 촬영 기간이 10년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열심히 했고, 그만큼 많이 배웠거든요. 그래서 이번 작품이 저한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어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연기를 하면서 꾸준히, 발길이 가는 대로 계획없이 나아갈 생각이에요. 많은 수식을 붙이기보다는 쿨하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말할래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