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 배 한 척이 떠 있다.
표류 중인 남자는 폭풍우가 치는 밤,
불안과 공포에 투쟁하고,
잠잠해진 아침이면 햇살에 가만히 몸을 맡긴다.
그렇게 생을 향한 고투가, 희망과 절망이
17분 동안 교차하며 반복한다.
미디어 아트 듀오 문경원, 전준호 작가가
‘아트 바젤 인 바젤 2023’에서 펼쳐낸 세상의 끝,
그 막다른 길에서 두 작가는 질문한다.
이 남자의 삶이 당신의 삶과 얼마나 다르냐고.
망망대해, 배 한 척이 떠 있다. 표류 중인 남자는 폭풍우가 치는 밤이면 불안과 공포에 투쟁하고, 잠잠해진 아침이면 햇살에 가만히 몸을 맡긴다. 생을 향한 고투가, 희망과 절망이 17분 동안 교차하며 반복한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지워지고, 다시 삶은 되풀이된다. 앵글이 바다 전체를 조망할 때 불현듯 서늘해진다. 이 바다가 현실인지, 가상 세계인지 혼란스럽다. 남자의 생을 가능케 하는 보트 안의 삶이 외려 벗어날 수 없는 덫은 아닌지, 그 덫의 풍경이 나의 매일매일과 무엇이 다른지 자문하게 된다.
‘아트 바젤 인 바젤 2023’ 언리미티드 섹션에 초청된 문경원과 전준호 작가의 영상 설치 작품 ‘미지에서 온 소식: 이클립스(News from Nowhere: Eclipse)’는 두 작가가 2012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미지에서 온 소식’ 시리즈의 최신작이다. 지난해 봄, 일본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에서 먼저 선보인 작업이다. 배우 류준열의 연기와 스크린을 중심으로 공간 전체를 감싼 LED 조명이 점멸하고, 영상 상황에 따라 음향이 바뀌며 시각적 쾌감을 준다.
2009년부터 따로, 또 같이 활동해온 두 작가는 프로젝트 ‘미지에서 온 소식’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 역사적 비극, 기후변화 등 인류가 직면한 위기 속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탐색해왔다. 두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 아트 바젤 ‘언리미티드’ 는 전쟁, 팬데믹, 기후변화, 사회적 긴장 그리고 탈식민지 트라우마 등을 모티프로 삼아 현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작품들을 선보이는 가장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을 만날 수 있는 섹션이다. ‘무한한’이라는 뜻의 이름에 걸맞게 대형 조각, 영상,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적 시도를 보여주는 자리다. 올해는 5백여 점의 지원작 중 중 76점만을 선별해 전시했다. 현대미술의 가장 예리한 첨단이라 불리는 스위스 바젤 메세플라츠, 언리미티드 전시장 안에서 두 작가를 만났다.
바젤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다. 아트 바젤 인 바젤의 꽃이라 불리는 언리미티드 섹션 참가는 두 작가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올 것 같은데 어떤가? 전준호 언리미티드는 일반 페어와 다르다. 매체와 장르의 한계가 없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 곳으로 부스에는 담을 수 없는 작품의 맥락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작가에게는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 한정적으로 기회가 주어지고, 선정되기까지 경쟁도 치열한 것으로 알고 있다. 문경원 언리미티드는 예술의 상업성과 실험성을 동시에 담아내는 장이기도 하다. 한계와 제한이 없는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완성도와 실험성 측면에서 모두를 충족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동시에 부담스러운 자리이기도 하다.
‘미지에서 온 소식: 이클립스’는 지난해 봄, 일본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이다. 팬데믹이 절정이던 때라 일본 입국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인간의 고립과 투쟁, 가상과 현실이라는 주제가 시기적으로도 절묘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시작된 작업인가? 전준호 가나자와의 가나이와 가나 이와초(金石町) 등 미술관 주변의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는 어촌 마을을 대상으로 3년간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한때 번성했지만 고령화로 빈집이 늘면서 유령 마을처럼 쇠락한 곳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세트장 같은 마을이다. 그곳의 풍경을 보며 인간이 이룩한 문명, 개발과 진보, 발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추상적인지를 느꼈다. 당시 이런 주제를 다뤄보자고 이야기를 나누던 차에 이 작품의 시나리오가 시작됐다. 문경원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는 예술의 가치, 인류가 만들어낸 시스템에 대한 나름의 의문과 회한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다시 짚어보자는 생각에서 ‘멸망’이라는 키워드를 잡았다. 미래의 인류는 새로운 시스템과 가치를 어떻게 정립할까? 이런 질문과 함께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도 던지고 싶었다. 우리가 본 가나자와의 상황과 더불어 팬데믹을 겪으며 고립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하게 됐다. 인간은 고립됐을 때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 하지 않나. 우리 작업을 보면서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각자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끔 하는 장치 를 만들고자 했다.
마지막 17분에 다다라서 실제인지 가상 세계인지 혼란 스러워지는 순간,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말이 20세기 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거대 시스템 속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준호 버추얼 리얼리티인데 주인공만 모르는 거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다른 생존자를 찾고, 육지를 찾아 떠돌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기억이 지워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매일 리셋되는 이 반복이 마치 우리의 삶, 나아가 인류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냉전이 종식되고 평화의 시대가 온다고 했지만 지금 어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국가 이기주의로 흐르는 신(新) 냉전 체제, 미·중 간의 갈등 등 우리 역사는 망각과 반복의 순환이다. 유한한 삶 속에서 절망과 희망 그리고 다시 욕망을 갖는… 이런 것들이 점철돼 뒤엉킨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큰 연민이 든다. 그걸 좀 다뤄보고 싶었다. 나아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진짜 현실인가? 때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이 외려 더 비현실적이기도 하지 않나?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 한 것들은 아득한 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고착화된 어떤 생각의 틀, 인식의 틀을 깨고
그로써 확장되는 경험을 하는 데
예술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전과 후 달라진 인식의 확장이야말로
예술이 기여하는 순기능 아닐까.”_문경원
주인공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기록을 멈추지 않고, 생명을 키워내는 행위도 인상 깊었다. 생존 욕망을 뛰어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묘사에서는 인간에 대한 애정도 봤다. 어떤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고자 했나? 전준호 아무리 종말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도 한 줌의 희망을 가지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 아닐까. 그것이 인간이 본래 지닌 성질 아닐까. 기술이 발달하고 인류가 위기에 처할 거라고 하지만 이 위기를 해결하는 방식은 기술에서 비롯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테크 놀로지가 아니라 인간 본성, 즉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선한 마음, 마지막 순간에도 한 줌의 희망을 손에 쥐려고 하는 호모사피엔스의 특질이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기술로 인한 위기를 뛰어넘게 할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장 좋았던 신(scene)은 주인공이 우비를 펼쳐 창문을 가리려고 할 때 우비의 구멍 사이사이 빛이 투과되던 장면이다.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야 마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새삼 좋았다. 이는 예술에 대한 두 작가의 고민과도 이어지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전준호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예쁘고 아름답다고 말하 면 마치 통속적이고 유치한 것으로 취급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미술계에 만연한 엘리트주의, 미술이라는 성역의 보호 아래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때 많은 이들과 함께 당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예술이 필요한가?, 당신 삶의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 이런 질문을 오래 했다. 문경원 현대미술은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만 예술인 것처럼 인식된다는 데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작업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굉장히 고유한 영역이고, 어려운 일이라는 걸 느낀다. 동시에 이는 설명이 아니라 느낄 수 있다는 게 중요한데 어느 순간 예술에서 사라진 것만 같다. 난해하고 어려운 설명을 하며 ‘어렵고 고상한 현대미술을 보는구나’라는 인상만을 주는… 우리가 잃어버린, 설명할 수 없지만 감동을 받는 그런 순간을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고착화된 어떤 생각의 틀, 인식의 틀을 깨고 그로써 확장되 는 경험을 하는 데 예술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전과 후 달라진 인식의 확장이야말로 예술이 기여하는 순기능 아닐까. 전준호 난해함과 어려움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낯섦과 난해함이 관객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하고, ‘이 사람 왜 이렇게 했을까?’ 하고 자신의 의견을 대입시켜보고, 감상을 말할 수 있게 해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게 문제라는 거다.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지지 않고, 그에 대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나. 몇몇 특정 사람의 의견에 동조해야만 하는 현대미술의 조직화되고 권력화한 현상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이런 사유는 예술의 형태에 대한 고민과 도전으로도 이어질 것 같다. 예술 형태의 변화에 대해 어떤 대화를 주로 나누는가? 문경원 팬데믹이 영화관의 종식을 가속화한 동기가 되었다면 또 다른 팬데믹, 또 다른 어떤 기술의 오류 혹은 어떤 갈등이 예술을 또 다른 형태로 바꾸도록 할 거라고 본다. 지금의 아트 페어, 인스티튜션, 화이트 큐브 갤러리에서 보여주는 예술 작품만 유지될 것인지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지고 있다. 다양해지는 동시에 극단적으로 양극화될 거라 본다. 가상현실에서 누구나 나만의 뮤지엄을 가질 수 있는 다음 세대는 그것을 꼭 작품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자신이 컬렉팅한 것을 자신만의 뮤지엄을 만들어서 전시하고 거래하지 않을까? 동시에 실제 물질 세계에서는 그림과 조각 등을 중시하는 세태가 분명하게 나뉠 거라 본다. 우리는 이 양극단을 어우러지게 할 수 있는 플랫폼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새로운 미술의 형태와 이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찾고 있다. 문경원 예술은 이 세계가 나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이 있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아주 다양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인식을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렇다면 완전히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을 때 예술의 형태, 예술의 향유 방식과 존재 방식도 크게 달라질 거다. 물론 지금의 예술 형태가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전준호 자본과 권력, 헤게모니를 쥔 이들로 인해 예술의 형태는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버추얼 세계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지금의 10대들, 그 이후의 세대는 예술을 완전히 다르게 인식할 것이다. 그렇다면 새 세대는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무엇을 예술이라 일컫고 향유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을 화두 삼은 작업도 준비하고 있는가? 전준호 장편영화를 준비 중인데, 앞서 말한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인간이 하는 예술이 과연 끝났을까? 기술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걸 우리는 예술이라 할 수 있을까? 등을 주제로 한다. 시나리오는 90% 정도 완성되었고 내년부터 촬영할 예정이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선한 마음,
마지막 순간에도 한 줌의 희망을 손에 쥐려고 하는
호모사피엔스의 특질이 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기술로 인한 위기를 뛰어넘게 할 키워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_전준호
두 작가는 2009년부터 따로, 또 같이 작업하고 있다. 작가로서 상호 보완되는 지점이 있을 텐데 어떤가? 전준호 합이 잘 맞는 편이다.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면 가장 먼저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에 1차적인 객관화, 검증을 거치게 된다. 자칫 나만의 생각에 함몰돼 매너리즘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내가 지나치게 경도돼 협소한 생각만을 하지 않는지 서로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필터링이 된다. 문경원 토론도 치열하게 한다. 무언가를 함께 만들 때는 객관화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것을 조금씩 버리면서 합의하며 좋은 것을 찾아가려고 하는 거니까. 한데 이는 예술이 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혼자 작업할 때는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지 스스로 의문이 들 때도 많고 답답할 때도 많다. 그러면서도 어떤 순간에는 올곧게 자기 주관을 투영하며 나아가는 게 예술 작업인데, 이를 누군가와 같이 한다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서로 맞추고 모색해가는 과정에서 배우는 점이 많다. 각자 개인 작업을 할 때와 달리 해소되는 것들도 있다. 좀 든든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지점도 아주 많지만.(웃음)전준호 든든하다에서 마음에 안 든다로… 0.5초의 어떤 계획도 없이.(웃음). 예술 분야에서 비평 문화가 힘을 잃고 있지 않나. 비평이 비평의역할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어떤 작품에 대해 그 예술 언어의 유효성에 대한 신랄한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으니까. 이런 환경은 작가를 고립시키고 말 그대로 혼자 만들게 한다. 이런 점에서 함께 작업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온 ‘미지에서 온 소식’ 시리즈는 2012년 제13회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서 첫선을 보인 이래 미국, 스위스, 영국 등에서 이어지고 있다. 하나의 타이틀을 10년 이상 끌고 온 지속성이야말로 두 작가의 엄청난 힘이지 않을까 싶다. 오늘까지 올 수 있는 동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문경원 우리가 한 건 아니다.(웃음) 안 하고 싶을 때 ‘여기까지만, 이것까지만 하자’ 했는데 다른 전시회에 초대되고… 또 초대되면서 이어졌다. 전준호 요즘은 연어의 심리가이해된다. 떠돌다가 다시 돌아와 산란하고 장렬히 전사하는.(웃음) 늘 새로운 주제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동력이었을까? 시카고, 리버풀, 가나자와 등 매번 다른 도시에서 받은 인상, 그 도시들을 공부하며 새롭게 알게 된 것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그 도시의 역사와 문화가 주는 힘들이 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문경원 예전에 한 관객이 “사람은 자기중심적으로 살기 마련인데 이렇게 작품을 보면 세상에 나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많구나. 내가 아닌 내 밖 세계가 이렇게 많고 다양하구나 하고 느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참 좋았다. 이런 소통을 할 수 있으니까 예술이 존재하는구나 싶다. 우리가 작업을 지속하게 되는 이유기도 하고. 작업을 하며 가장 즐겁고 좋을 때는 ‘지금 2% 부족한 듯 끝나는 것 같아도 빨리 다음 작업을 하고 싶고,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다.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해나가며 그런 지점이 계속 생기는 거다.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 마무리한다. 여기만 조금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렇다면 다음 작업에서는 이런 아이디어로 이렇게 달리해보면 좋겠다 하고 새로 마음을 먹는다. 그렇게 다음 스텝이 만들어졌다는 게 계속 작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같다. 전준호 한데 이 모든 이유를 떠나 재미있다. 전시를 위해 설치하는 도중에는 밤새 사다리 타고 올라가면서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싶지만 전시가 열리고 관람객이 와서 보고 좋다고 할 때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모든 걸 보상해주고 남을 만큼 즐거움을 안긴다. 이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