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은

송승은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단초를 떠올리며 붓을 든다.
그림 안에 설계해둔 공간에는 빛이 스며들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충돌하는
색의 조합이 긴장감을 전달한다. 이 긴장감을 느끼며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정답도 결말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게 될지도 모른다.

 

시어 스트링 아노락과 롱 스커트 모두 아모멘토(Amomento).

파티션으로 나눈 두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요. 남편인 박신영 작가와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는데, 저희 둘은 작업하는 성향이나 성격이 정반대예요. 하지만 서로 그간 어떻게 작업해왔는지를 가장 잘 알다 보니 가감 없이 피드백을 건네는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받죠. 확정한 건 아니지만 내년쯤 둘이 공동 전시를 할 계획도 있어요. 박신영 작가는 주로 풍경을 그리는데, 제가 하는 상상과는 방향성이 다른 상상을 하는 작가예요. 저는 실내 공간을 많이 그리고, 남편은 실외 풍경을 주로 그리기 때문에 함께 전시하면 새로운 느낌을 줄 것 같아요.

‘누가 내 잔에 독을 탔을까?’, ‘촛불을 불면 소원이 이루어질 거야!’ 이처럼 미스터리한 문장에서 작업을 시작한다고 들었어요. 보통 노트에 짤막한 픽션을 써요. 예를 들어 바닥에 떨어진 리본을 보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면 거기에서 시작되는 글을 쓰는 거죠. ‘리본 옆에는 뭐가 있을까, 그 방의 책상은 어떤 모양일까’ 같은 식으로 공간을 생각하고, 그 공간의 주인에 대해서도 생각해요. ‘그 사람은 위선자일까, 아니면 비밀이 많은 사람일까’ 하면서 파고들면 또다시 궁금해지는 그 사람의 심리에 대해 쓰기도 하죠.

픽션의 내용은 그림에 얼마나 반영하나요? 어찌 보면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어요. 적어둔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콜라주나 드로잉을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단초가 된 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드로잉하면 누군가의 공간에 대해서 다시 떠올리게 돼요.

모두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상상하며 만든 인물도 있나요? 50년 넘게 보물 지도를 간직한 사람이 있는데, 그 보물 지도를 따라 모험을 해본 적은 없죠. 그 사람과 같은 맨션에 사는 사람들은 ‘저 사람,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알겠는데 뭔지 모르겠어’ 하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보물 지도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 찾을 수 없게 지도를 숨겨두지만 지도가 진짜인지도 모르고, 정작 보물을 찾으러 갈 생각은 없어요. 그저 ‘지도를 내가 가지고 있으면 돼’라는 마음을 가진 인물에 대해 상상하며 기록한 적이 있어요.

송승은, ‘내일의 일기예보’, Oil on canvas, 207.3×181.8cm, 2023

그 인물을 담아낸 작품도 궁금합니다. 언젠가 그 내용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고, 거기에서 파생된 또 다른 작품이 나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글을 쓰면서 위선자나 비밀에 대해 생각해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진 않지만 찾으러 떠날 생각도 없는 모순된 사람의 미묘한 심리를 생각할 수도 있죠. 저한테는 그런 다층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한 편의 소설 같아요. 최근에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소설에 망각을 일으키는 안개가 퍼진 마을이 등장해요. 그 마을에는 안개로 인해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부부가 나오죠.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과연 비밀을 안다는 게 좋은 걸까, 아니면 덮어두는 게 좋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소설이든 다큐멘터리든 하나의 결말로 향하는 이야기보다는 중립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를 즐겨요.

감정과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를 꼽는다면요? 공간을 상상하다 보면 어떤 빛이 존재하죠. TV에서 새어나오는 빛이나 문틈으로 스며드는 푸른 달빛일 수도 있고요. 누군가 혼자 있을 때 드는 긴장감과 그때의 빛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공간의 분위기가 머릿속에 그려져요. 그러면 처음 떠올린 상상이나 플롯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나 추상적인 조각, 공간의 느낌이 얽히고설키면서 캔버스에 반영되는 거죠.

상상에서 비롯된 작업을 위해 음악으로 몰입을 유도하기도 하나요? 어떤 생각을 하면 자연스레 음악이 들릴 때가 있어요. 음악을 무작위로 틀어두고 그림을 그리다가도 그 음악이 나오면 집중되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때도 있고요. <빙하를 따라서>라는 다큐멘터리영화가 있는데 자연재해와 관련한 현상을 다루는 내용이다 보니 음악도 박진감 넘쳤다가 갑자기 잔잔해졌다가 해요. 이런 음악들이 제가 상상하는 의미심장한 감정으로 이입시켜주기도 해요. 때로는 일상의 소소한 순간이 우리에게 생각의 전환점을 가져다주기도 하죠. 어릴 적에 엄마가 베란다 가득 화초를 키우셨어요. 화분은 엄마에게 일종의 상징 같은 것인데, 이상하게 저는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해요. 하지만 엄마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에 애를 쓰며 기르려고 시도하죠. 어떨 때는 애증의 마음과도 같은데, 결국에는 상상의 이야기 역시 이런 일상적인 사물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의견이 분분할 수 있는 이야기를 즐기다 보니 대중의 새로운 해석 역시 반가울 수 있겠어요. 제 그림 중 책을 쌓아둔 모습을 그린 작품이 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구매한 분이 그림 속에 쌓여 있는 책의 색 조합과 비슷하게 서재를 꾸미고, 그 옆에 제 그림을 두셨더라고요. 저는 누군가를 특정하는 게 아니라 모호한 인물을 그리잖아요. 그럼에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자신을 대입해 생각하는 반응을 보면 굉장히 흥미로워요. 다양한 해석의 여지는 인물에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이 같기도 어른 같기도 하죠. 귀여워 보이지만 그로테스크한 느낌도 들고요. ‘귀엽게 그려야지’ 혹은 ‘무섭게 그려야지’ 하는 생각은 없지만 긴장감을 주는 빛의 느낌이나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면 지금의 그림이 나오게 돼요.

의미심장함은 색채를 고르는 순간에도 영향을 주나요? 제 그림을 보면 여러 가지 색이 섞여 있죠. 색이 충돌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건 충돌 속에서 조율해가는 과정이 재밌기 때문이에요. 어두운 방에 TV가 켜져 있을 때 퍼지는 불빛이라든가 커튼 뒤에서 새어나오는 주황색 빛, 그 빛에 따라 색이 입혀지면서 바뀌는 물건의 색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흥미로워요.

그림 밖 세상에도 빛이 존재하죠. 빛이 어우러진 풍경 중 선호하는 모습이 있나요? 그림과 마찬가지로 실내인 것 같아요. 보통 불이 다 꺼진 밤이나 새벽에 퇴근하거든요. 가로등 불빛이 창을 통해 스며들 때 방에 간접조명 하나만 켜고 있는 것을 좋아해요.

 

송승은, ‘붉은 부엉이가 가져온 편지’, Oil on canvas, 207.3×181.8cm, 2023

갤러리를 통해 공개한 작업 노트에는 불완전함과 불확실함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해요. 이 두 개념에 끌리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늘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가장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지?’ 하는 의문을 품게 되는데, 사실 주변을 둘러보면 불확실한 것 투성이잖아요. 나조차도 그렇고요. 하지만 그런 나조차도 나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불완전함에 대해 표현하게 된 것 같아요.

곧 키아프 서울에 참가해요. 지난해의 출품작을 돌아본다면 올해는 어떤 변화를 느낄 수 있을까요? 지난해 개인전을 열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어요. 콜라주를 할 때 원본을 알아볼 수 없도록 작게 자르고, 오려진 선을 맞추다 보면 때때로 예측하지 못한 무언가를 닮은 형태가 나오거든요. 이런 새로움을 발견해 화면에 담는 과정이 재밌더라고요. 올해 아트부산에서 그 변화를 조금 보여드릴 수 있었고, 키아프 서울에서도 연장선상의 작업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작품을 통해 전달되었으면 하는 정서가 있다면요? 앞서 말했듯이 작업할 때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람 정말 진심이구나’ 하는 마음을 느껴주신다면 더 좋겠죠. 회화는 작가의 실수나 욕심 같은 것이 모두 드러나는 장르인 것 같아요.

어떤 원동력이 나를 진실하게 만들어주나요? 30년, 50년의 세월 동안 작업을 해온 선배 작가들의 작품 일대기를 보면 자기만의 확신이 보일 때가 있어요. 그 오랜 시간을 이끌어오면서 자신만의 확실한 언어를 만든 거니까요. 그런 확연함이 느껴질 때마다 큰 감동을 받아요. 꾸준히 작업하다 보면 나도 언젠가 나의 언어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커지기도 하죠. 이런 기대감으로 오늘도, 내일도 작업해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