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작가님의 큰 변화 중 하나는 몸을 쓰는 방식입니다. 특히 ‘붓질’이라는 작품에서 느껴지는 엄격한 자기통제와 자기 규율, 수행적 면모는 많은 이들이 작가님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도 이른 아침 일어나 규칙적으로 작업을 하시나요? 요즘은 몸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신체성에 대한 생각이 더 공고해지고 있어요. 현대사회는 앞으로 비물성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죠. 더 이상 생산해서는 안 되는, 생산을 그만해야 하는 시대가 왔어요. 비물성의 시대란 어떻게 보면 이미지의 시대죠. 이런 시대에 신체는 뭘까 하는 질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신체가 필요 없는가? 신체 없이도 비물성이 신체를 대신할 수 있는가? 운동하기보다는 운동하는 사람을 보는 편이 훨씬 더 오늘날의 시대에 어울리는 일 같지만, 예술가에게는 다른 문제거든요. 작업은 예술가의 정신과 신체가, 외부와 내부가, 현실과 이상이, 순수와 속됨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요즘 만들고 있는 작품 제목을 ‘붓질’이라 붙인 것은 신체성을 뜻하거든요. 비물질 시대이니 신체성의의미가 변화하겠지만 여전히 저에게는 중요한 하나의 의미로 자 리하고 있죠.

앞서 말씀하신 ‘작업은 결국 내면 깊이 자리한 한 사람의 영성을 꺼내는 일’이라는 점에서 작가님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인가요? 30대 후반에 종교를 갖게 됐어요. 한국에서는 절대성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지만, 절대성이란 절대적 불변 즉 초월성을 뜻하는 건데 이전에는 불변성과 초월성을 인식할 계기가 많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어떤 사유나 직관의 개념, 인문학적 접근이 많았죠. 프랑스어로 예배가 ‘퀼트(culte)’예요. 컬처(culture)에서 철자 두개만 빠져 있죠. 예배와 예술이 철자 두개차이로 구분되는 거죠. 이와 동시에 예배는 경배를 뜻하기도 하잖아요. 낮은 인간이 절대성에 다가가려고 하는, 초월자를 향한 프로세스를 예배라고 할 수 있어요. 초월성과 절대성을 향하는 것이 예술에서 중요하죠. 현실은 파도처럼 계속 변화하잖아요. 하지만 초월성, 절대성은 변화하지 않죠. 인간은 현실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절대성과 순수성을 붙들지 않으면 절망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어요. 초월성과 현실성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모든 예술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이를 두고 ‘엮는다’고 표현한 거예요. 영성과 인간의 현실을 엮는 것, 그게 예술이라고요.

 

“현실은 파도처럼 계속 변화하잖아요. 하지만 초월성, 절대성은 변화하지 않죠. 인간은 현실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니, 절대성과 순수성을 붙들지 않으면 절망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어요. 초월성과 현실성을 만나게 하는 것이 모든 예술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술가로 긴 시간을 살아오며 작가로서 큰 변화를 맞이한 모멘트를 꼽자면 언제를 회상하시나요? 큰 모멘트는 몇 번이나 있었죠. 그중 하나가 청도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미술 실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미술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가게 된 일이죠. 그 덕분에 미술 대학에도 가고요. 하나를 더 꼽자면 중학교 미술 선생을 하다가 그만두고 프랑스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일이겠죠. 굉장히 무모한 선택이었는데 돌이켜보면 큰 모멘트가 된 것 같아요.

1989년 여름에 처음 파리를 방문했고, 이듬해에 파리로 완전히 거처를 옮기셨죠. 처음 그곳에 간 1989년 여름, 파리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보시나요? 저녁에 파리에 도착해 다음 날 아침 몽파르나스 거리에 갔어요. 그곳에 발자크 조각이 있는데 조각 정면에 위치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잖아요. 세계의 모든 인종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뒤섞여 거리를 걷고, 서로가 즐겁게 껴안고 인사하는 모습, 신호등이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 길을 걷는 사람들, 그런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예술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마흔다섯 살 때까지 작품을 전혀 판매하지 못하셨다고요. 10여 년 넘게 작품을 판매하지 못하는 상황에 조급하지는 않으셨나요? 나는 언제쯤 이름을 알릴 수 있을까 하는 갈증은 없었나요? 늘 그 생각을 하며 살았죠. 빨리 인정받고 싶었어요. 인정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말이 안 되는 거고, 애를 써야 했죠. 그럼에도 내가 잘한 일 중 하나는 마흔다섯 살에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돼 전시를 하게 됐는데 그때까지 평균 2백 호, 2~3m 크기의 작품만 그렸어요. 동료 작가나 화랑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죠. 이렇게 크고, 시커먼 그림은 안 팔린다. 좀 작은 그림을 그려보라는 조언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그때 나에게는 꿈이 있었어요. ‘나는 미술관에 전시하기 위해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누가 시켜준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 생각을 계속 했죠. 그게 나를 지탱하는 자존감이기도 했고요. 지금도 여전히 미술관 전시를 더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갤러리 전시를 할 때도 미술관 전시처럼 해보려고 애쓰고요.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스스로 ‘나는 미술관 전시를 하는 작가’라고 정체성을 부여했지만 막상 상황은 그렇지 못했죠. 이상과 현실의 격차 속에서 외롭지 않으셨습니까? 외롭지는 않았어요. 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파리에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관광 가이드를 할 수도 있고 방법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참고 계속 작업할 수 있었던 건 내가 한국에서 학교 선생으로 지내며 영위한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파리로 온 거잖아요. 안정된 생활을 스스로 끊어낸 만큼 뿌리쳐야겠다 싶었죠. 당시 지하철표가 한국 돈으로 8백원 정도 했는데, 그 돈이 없어서 집에서 화실까지 매일 1시간 반을 걸었어요. 그런데도 그 시간이 참 좋았어요. 억울하지도, 힘들지도 않고요. 생각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걸으니까.(웃음) 나는 충분히 견딜 수 있다, 이보다 상황이 어려워도 견딜 수 있다, 이건 아무것도아니다 하고 생각했죠. 그게 아니라면 다시 돌아가면 되는데, 다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계속 했어요. 즐거웠어요.(웃음) 지났으니 하는 이야기지만 집사람은 괴로웠겠지.

작가로서의 위기는 언제였다고 보시나요? 지금이죠. 지금.

아, 지금이요? 작가는 매일이 위기예요. 그중에서도 지금이 가장 큰 위기죠. 그림이 팔리는 순간이 위기예요. 정신 차리지 않으면 과거에 잘한 것이 다 없어져요. 무너져 없어지고, 잊힙니다. 순식간에 파멸로 가는 거예요. 끝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한데 인생이,삶이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 위기를 어떻게 돌파해야겠다고 생각하시나요? 현실에 이름을 알리려 애쓰지 말아야 하고,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드는가’ 계속 자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죠.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데요. 저 사람이 뭐 하고 있는지 금방 알아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죠. 수많은 사람이 무너지는 걸 제가 봤으니까. 외부 요인으로 인한 두려움보다 작가 스스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는데그게 두려운 거죠. 작가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어려워요. 나 역시 노력하고 애씁니다.

 

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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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 작가 미술 키아프 kiaf leebae

 

예술가로서 그리는 이상향은 어떤 모습인가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예술가는 마티스예요. 당대에 피카소, 브라크, 샤갈, 달리도 있었지만, 말년에 가장 훌륭한 작품을 남긴 건 마티스예요. 마티스는 예술에서 품위를, 격을 아주 높이 여겼어요. 프랑스 생폴드방스에 가면 로사리오 성당(chapelle du rosaire)이 있어요. 마티스는 말년에 이 작은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 및 벽화 작업을 했어요. 그것도 목탄으로. 잘 그려진 그림이라 할 수는 없는데 격이 높아요.

미술에서 격을 이야기할 때, 그 안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건가요? 인격이죠. 한 사람의 품위. 우리 옛 선비는 꾸준하게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했어요. 높은 인격은 학문으로만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자기를 초월성의 경지에 올리는 것이죠. 현실의 존재를 높은 초월성의 정체성과 만나게 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자기를 드높이는 거예요. 높은 인격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는 말과 글은 높은 격을 띠고, 사람들로 하여금 존경심과 경외감을 갖게 해요. 결국 선비가 하는 일은 정치였어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닌 인격이 높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 거예요. 이게 동양에서는 아주 높은 덕목이었어요. 왕은 권력을 가진 자인 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권력이 없어요. 부 자도 아니고. 하지만 인격이 아주 높은, 격이 높은 이들이 하는 것 이 정치죠. 그게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꿈꿔온 이상적인 국가관인 데, 자기 인격을 높이는 일이 예술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 니다. 품위는 동양 미술이 가진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죠.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예술가의 삶이 굉장히 어렵지 않습니까?(웃음) 초점을 맞춰야죠. 삶 전체를 그렇게 맞춰가야 하는 거예요,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이 세계 안에서 예술가로 천착하기보다는 삶이 예술을 통해 확장되고 넓어지기를 꿈꾸는 것이지요.

가장 먼 계획이 궁금합니다. 미술관에서 큰 전시회를 하는 게 가장 먼 계획이에요. 하루도 빠지지 않고 5~6년 동안 매일 아침 기도하고 있어요. 어떤 미술관에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크기의 작품을어떤 배열로 전시를 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매일 생각합니다. 세부 사항은 늘 바뀌지만 계속 꿈꾸는 거예요. 될 때까지. 수년간 이생각을 하다 보니 어떨 때는 안 해도 괜찮다, 이렇게 꿈꾸는 것도행복하다 할 정도로 골몰하고 있는데, 그래도 하고 싶어요.

청년 같으십니다.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요. 더 그림을 그리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아니, 이제 좀 시작해볼까 하는데 그만 그리라고 하면….(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