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건가, 너무 과한건 아닌가, 여기까지 가도 괜찮은가. 세상에 없는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하는 데에는 불안과 걱정, 의심이 마치 한 몸처럼 따라온다. 이원석 감독은 이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기왕 가는 거 끝까지 가보자는 결심으로 달려가는 사람이다. 그는 이번에도 모두가 좋아하는 방향이 아닌, 낯설지언정 뻔하지 않은 새로운 길을 택하며 영화 <킬링 로맨스>에 다다랐다. 이 모험의 끝에 무엇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언제나 그는 자신의 방향과 방식으로 가겠다 말한다.

톱스타 여래가 <마리끌레르> 커버에 등장하는 장면을 본 순간 결심했다. 꼭 <마리끌레르>에서 영화 <킬링 로맨스>를 얘기해야만 한다고. 분명히 해두자. 그 장면, 다 허락을 구하고 쓴 거다. 로고를 불법으로 가져다 쓴 건 절대 아니다. 더불어 뒤늦게 감사를 전한다. 덕분에 여래가 얼마나 톱스타였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장면을 완성할 수 있었다. 역시 전 세계를 대표하는 패션 매거진!(웃음)

처음부터 끝까지 낯설고 유쾌하고 발랄한 이 영화가 세상에 나온 지 6개월이 다 되어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부분이 있나? 똑같다. 영화의 스코어가 잘 나오진 않았지만, 소수의 관객에게엄청난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에 고마울 뿐이다. 딱히 후회도 남지 않는다. 개봉을 하게 된 것 자체가 행운이었고, 또 나와 배우들부터 스태프, 배급사, 홍보사까지 모두 하나가 되어 이 영화를 위해 정말최선을 다했다. 무대 인사도 무슨 선거운동 하듯이 했다. 되게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물론 흥행을 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이렇게 잔잔하고 공고하게 오래 사랑받는 영화도 감독에겐 좋은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다. 투자사에는 정말 죄송하지만… 맞다. 우리의 이야기를 열렬하게 지지해주는 이들이 있다는 게 나와 배우들에겐 엄청난 힘이 된다. 많지 않은 수로도 이토록 큰 에너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다. 계속 회자되는 게 좀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게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음에도 두려움으로 관객 반응을 살피지 못했다 들었다. 보지 않아도 대충 얼만큼 욕을 먹는지 감이 오니까. (웃음) 시작할 때부터 이건 모 아니면 도였다. 이하늬 배우와 농담으로 이 영화 만들고 이민 갈 수도 있으니까 각오하자는 말을 나눴는데, 나는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이왕 할 거 정말 미친 거 하나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엄청난 도전 정신이다. 아니다. 도전 정신이 있었으면 되게 열심히 살았을 텐데,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그냥 새로운 것, 나만 할 수 있는 걸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영화가 그런 거라 생각한다.

시나리오는 보다 현실적인 드라마에 가까웠는데, 그 이야기가 어떻게 새로운 코미디로 완성된 건가? 박정예 작가님이 글을 너무 짜임새 있게 잘 쓰신다. 다만 현실에 발 붙이고 있는 이야기라 이걸 그대로 영화로 옮긴다면 내가 아니어도 되겠다 싶었다. 반대로 내가 한다면 좀 다른 선택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제안했는데, 박정예 작가님이 흔쾌히 받아줘 같이 재밌고 힘든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동화로 가자’ 여기서부터 새 출발을 한 거다.  내가 ‘만약’이라는 단어 붙이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그 단어가 붙는 순간 더 크고 먼 얘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화가 그렇지 않나. ‘만약에’와 비슷한 맥락으로 ‘옛날 옛날에’로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 그래서 처음과 끝에 이 이야기를 읽어주는 할머니를 등장시켰다.

그렇게 시작된 상상의 나래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독특함만으론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게 흘러간다. 만약 내가 감독이었다면 주저했을것 같다. ‘이것까지 해도 될까’, ‘여기까지 가도 될까’라는 질문 앞에서 어떤 선택들을 했나? 나도 두려울 때가 많았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과 주어진 상황의 간극이 클 때마다 주춤하게 됐고.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믿고 갔다. 어쨌든 한 배를 탔으니까 끝까지 가자고 외치면서. 우리는 세상에 없던 걸 만든다는 사실을 동력 삼으면서. 용기가 필요한 순간도 많았으리라 짐작한다.

가장 용기 내야 한 순간은 언제였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할 때.(웃음) 아마 모든 감독이 영화 할 때마다 비슷한 경험을 할 거다. 현장 경험이 나보다 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이건 아닌 것 같아’라고 할 때, 정말 외로워진다. 그때 혼자 뻔뻔하게 버티는 거, 그게 용기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유독 그걸 해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게진짜 아니라는 걸 꼭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하는 사람.

이하늬, 이선균, 공명 배우의 열연과 열창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여래, 조나단, 범우라는 캐릭터에 어떻게 세 배우를 연결시킨 건가? 사실 코미디를 잘 이해하고 해내는 게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코미디는 억울한 거다. 정말 하기 힘든 건데 항상 ‘웃긴 사람’으로 무시당하기 일쑤다. 그럼에도 이걸 놓지 않고 제대로 해내는 배우가 누구냐고 했을 때, 여지없이 이하늬 배우가 떠올랐다. 전형적이면서 전형적이지 않은, 울다가도 갑자기 웃어버리는 여래라는 인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조나단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배우였으면 했다. 아예 새로운 옷을 입은 느낌을 주고 싶었는데, <나의 아저씨>의 따뜻하고 다정한 아저씨였던 이선균 배우가 제격이겠다 싶었다. 마지막으로 범우는 답답한데 이상하게 짜증나지 않는, 결국에는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했는데 우연히 사석에서 공명 배우의 해사한 웃음을 보고 ‘이 사람이다’라며 단번에 결심하게 됐다. 사실 이건 그저 나의 바람이었을 뿐인데, 신기하게도 이들이 모두 영화 안으로 들어와주었다.

어떤 마법과 같은 말이라도 했던 건가? 절대 그런 거 없었다.(웃음) 캐스팅은 정말 운이었다. 심지어 이선균 배우는 제안할 당시에 <기생충>으로 해외 영화제를 돌고 있었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휩쓸던 날, ‘에이, 물 건너갔네. 다른 배우 찾아야겠다’라며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갑자기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제안하고도 의아했는데, 그냥 하고 싶다고 재미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

다음으로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게 된 이유도 묻고 싶다. 조나단의 사업 확장으로 터전을 잃고 섬을 헤매는 그 존재, 타조다. 동화니까 동물이 나와줘야지.(웃음) 원래는 다람쥐도 있고, 다른 동물도 나오는 설정이었는데 회사에서 난리가 났다. 다 어떻게 구할 거냐고, 줄여달라길래 그럼 타조만큼은 꼭 넣어야겠다고 했다. 타조는 새인데 날지는 못하고, 그런데 달리기는 엄청 빠르지 않나. 그러니까새는 날 수 있어야 한다는 세상이 정해준 카테고리와 방향성이 있는데, 그게 아닌 달리기라는 다른 재능을 품고 있는 게 마치 서울대에 가야 하지만 공부가 아닌 다른능력을 품고 있는 범우, 그리고 재수생 친구들과 닮아 보였다. 또 자본에 의해 터전
을 잃어버리는 누군가를 대변하는 존재일 수도 있고. 굉장히 상징적인 존재다. 참고로 타조 울음소리, 그거 심달기 배우의 목소리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타조가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어떤 역할까지 해내는지, 그래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깊이 공감할 거다. 맞다. 너무나 중요한데…. 그런데, 또 타조 때문에 영화를 놓아버리는 사람도 있다. 긴가민가 하면서 보다가 타조가 나오면 ‘와, 여기까지 왔네. 이건 못 참는다’ 그러면서 영화관 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웃음)

여래부터 타조까지, 이 모든 존재들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갔나? 디렉팅 방식이 궁금하다. 나는 그렇게 계산이 명확한 사람이 아니라 항상 그때의 느낌으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연출을 공부할 때 ‘디렉팅은 가장 좋은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그러니까 배우들은 자신의 배역에 대해 수많은 고민을 하고 현장에 오니, 나는 그것을 보고 들은 후 가장 좋은 선택을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촬영, 조명, 미술 등 각각의 분야에서 프로인 분들이 제시하는 것을 보고 잘 선택하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저 내가 만들고자 하는 것에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는 것이 나의 디렉팅이다. 그게 내 영화엔 그게 맞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물론 다른 연기도 어렵지만, 코미디는 정말 불안하고 떨릴 수밖에 없다. 이선균 배우가 첫 촬영 날 첫 신을 끝내고 ‘잘해, 너무 좋아’라며 등을 토닥이는데, 심장이 퉁퉁퉁 뛰는 게 느껴졌다. 진짜 심하게 떨리면 심장 소리가 등에서도 느껴지지않나. 그날 이선균 배우가 그랬다. 그 긴장을 이겨내고 조나단이 되어 감정을 폭발시키는데, 너무 존경스러웠다. 그래서 더 믿어주고 할 수 있게 응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믿음이 조각나는 순간 코미디는 단숨에 어그러진다. 왜냐면 곧이어 과연 이게 웃길까에 대한 불안함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이선균 배우가 <킬링 로맨스>를 되게 부끄러운데 보여주고 싶은 영화라 말한 적이 있는데, 좀 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떤 마음이었을지 조금은 가늠이 된다. 하하, 선균 씨가 되게 귀엽다. 즉흥적으로 해야 하는 게 많은 데다 영화에는 다 나오지 않지만 이상한 춤도 엄청 많이 췄는데, 꼭 시작할 때는 너무 창피하다고 이거 해야 되냐고 하곤 되게 열심히 했다. 이 영화가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코미디일 거라며
모든 것을 불살랐다.(웃음)

세상에 없던 또 하나의 새로운 영화를 탄생시켰다. 이제 다음은 어떤 이야기를 생각하나? 다음도 역시 쉽지 않은 영화들이다. 되게 크고 이상한 것들인데, 이제 차근차근 하나씩 만들어보려 한다. 어쨌든 다 남다른 거다.

새롭고, 낯설고, 다른 사람이 안 하는 것을 좇는 건 타고난 기질인가? 내 콤플렉스인가, 모르겠다. 그냥 취향인 것 같다. 한 번도 못 본 그림을 만들어보겠다고 다같이 으으 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결과가 좋으면 모두가 더 행복하겠지만… 그게 또 모험이지 않나 싶다. 그 길의 끝에 뭐가 나올지 뻔히 알면 재미없지 않나. 그리고 결과가 두렵다고 해서 포기하고 싶진 않다. 어쨌든 계속하고 싶다. 나에게 기회만 준다면.(웃음)

그런데 <헤어질 결심>의 서래, <킬링 로맨스>의 여래. 의도된 연결 고리가 있는 건가? 영화 제목의 글자 수까지 같다. 하하, 말도 안 된다. 박찬욱 감독님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하실 거다. <킬링 로맨스>를 좋아해주는 분들이 나도 모르는 기발한 해석들을 하는데, 그걸 또 어떻게 그 영화로 연결한 건지…. 나보다 더하다.(웃음) 어쨌든 진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