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허설>
네이선 필더, 2022
박세영
영화감독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다섯 번째 흉추>를 연출한 영화감독.
신작 <지느러미>가 칸영화제 ‘판타스틱 7’ 출품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루이 비통, 생 로랑, 버버리 같은 브랜드와 협업해
미술과 비디오 작업을 선보이는 비주얼리스트이기도 하다.
해외에서 올해의 시작을 맞았다. 1월에는 나이아가라 폭포 쪽에 저렴한 에어비앤비를 구해 지냈다. 관광지에서 다소 떨어진, 현지인이 생활하는 작은 동네였다. 중국인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도넛 가게에서 도넛과 커피를 사고, 아침에는 치킨 누들 수
프를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HBO에서 방영하는 네이선 필더의 <더 리허설>을 보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더 리허설>에서 네이선 필더(시리즈의 호스트이자 감독, 그리고 제작자. 그런데 갈수록 주인공이 되어간다)는 일반인을 모집해 ‘리허설’을 한다. 마주하기 두려운 사건, 회피하고 싶은 대화를 직접 ‘리허설’ 하며 준비해주는 것이다.
한 참가자는 친구에게 자신의 학벌을 속이며 살아왔다. 그는 자신이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더 리허설>에 지원한다. 네이선은 모든 상황에 대비한다. 그의 집에 침입해 구조와 인테리어를 익히고, 그들의 성격과 행동 양식에 대한 정
보까지 수집한다. 그리고 세트장에서 이를 똑같이 구현한 뒤 대역을 동원해 앞으로 일어날 현실의 사건을 리허설 한다.
이 시리즈의 배경이 다름 아닌 ‘현실’이다 보니, 참가자의 리허설을 진행하다 보면 당연히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이선은 거의 강박적으로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한다. 온 힘을 다해, 그리고 HBO의 제작비를 탈탈 털어가며. 물론 리허설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절실하게 리허설을, 다가올 미래를 준비한다.
네이선은 학벌을 속인 참가자와 처음 만난 이후, 그와 친해지기 위해 수영장에 간다. 그는 참가자가 자신을 어색하게 여기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그리고는 남자 둘이 수영장에서 웃통을 벗고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면 그가 마음을 열
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새롭게 만들어질 ‘현실’에 또 다른 ‘조작’을 심어둔다. 수영장에 와서도 다시 어색해질 것이라 예측한 뒤 낯선 남자 배우를 고용해, 그가 수영장에 철퍼덩하고 뛰어들어 몇 바퀴 돌도록 미리 지시해둔 것이다. 참가자와 네이선은 튀는 물을 피하려 물리적으로 가까워질 것이고, 또다시 친밀감이 생길 것이라고. 그리하여 속마음을 털어놓을 거라고, 그렇게 혼자 계산한다.
이 장면을 보고 있으면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나’ 싶지만 결국 참가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모조리 털어놓는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혹은 조작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이 시리즈에서 중요한 것은 아닐 터다. <더 리허설> 속 모든 것은 조
작된 것이다. 조작되고 편집될수록 그 틈새로 현실의 파편이 드러나게 된다. 그때 네이선은 그 파편을 포착해 다시 비틀고 새로운 조작을 이어간다. 수영장에서 다시 어색해질 것을 예상하고 배우를 고용한 것처럼. 그럼 또다시 현실이라는 틈새가 생긴다. 이 과정을 치밀하고 강박적으로, 그리고 허무할 정도로 집착적이게 수행하는 것이 이 시리즈의 핵심이 아닐까. 웃다가 울고 너무 어색해 소름이 돋다가 불쾌해 얼굴을 찡그린 것. 이 모든 것이 <더 리허설>을 보며 1초 간격으로 벌어진 일이었다.
<호남호녀>
허우 샤오시엔, 1995
윤아랑
문화 비평가
동시대 문화를 탐구하는 책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을 펴낸 비평가.
202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만화나 연구서를 읽는 데 시간을 더 할애한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그보다는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진 게 더 크다. 어머니는 올해 내내 사경을 헤매고 있다. 병원비는 가족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다. 유일하게 사랑했던 연인은 이제 생사도 알 수 없게 됐다. 죽거나 크게 다친 지인들이 있다. 여기에 말할 수 없는 사건들도 여럿 겪고 있다. 나는 살아가는 게 버겁게, 너무나 버겁게 느껴진다. 이 와중에 대체 어떻게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우울이 아니라 순전한 의문으로, 나는 자꾸 자문하게 된다.
그 때문일까? 죽음을 품은 채 계속되는 삶을 그린 영화들에 유독 끌리는 것은. 그중에서도 이 지면에 어울리는 건 역시 〈호남호녀〉 속 마지막에서 두 번째 장면일 것 같다. 구성 자체는 단순하다. 흑백 화면에 텅 빈 공간이 담기고, 그 안에는 남편의 시신 옆에 앉아 지폐를 태우는 여자가 있다. 이는 극중극의 한 장면으로, 그 위로 죽은 남편의 유언이 내레이션으로 흐른다. 남은 이들을 걱정하고 사랑을 전하는 유언. 크레인에 달린 카메라가 그들에게 다가가고, 화면이 컬러로 전환된다. 여자는 소리 없이 흐느끼며 지폐를 태운다. 마치 향을 피우듯, 불이 꺼지면 남편을 더 이상 애도할 수 없다는 듯. 러닝타임 내내 거의 울먹이던 나는 이쯤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을 더욱 슬프게 만든 건 영화의 구조 속에서 이 장면이 발산하는 의미였다.
반면 이 작품의 구조는 한층 복잡하고 난해하다. 1995년을 현재 시점으로 삼아 그로부터 3년 전인 가까운 과거, 그리고 타이완 현대사의 시작점인 대과거가 ‘리앙 칭’이라는 인물을 축으로 삼아 극중극 형태로 아슬아슬하게 묶인 채 전개된다. 하지만 종종 들려오는 리앙의 내레이션은 셋 중 어느 시간대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고, 대과거와 현재를 구분하는 지표라고 생각된 흑백화면은 어느 장면에선 쓰이지 않기도 해서, 시간의 간격과 순서는 갈수록 아리송해진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현재의 세속적 삶과 대과거의 역사적 삶을 만나게 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어리석게 말했다. 만에 하나 <호남호녀>가 역사를 다룬 영화라면 이때의 역사란 실제와 허구가, 미시적인 사건과 거시적인 사건이,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이,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이 잔뜩 뒤엉킨 채 대립하는 혼탁한 대상일 터다. 거꾸로 말해, 〈호남호녀〉는 이런 혼탁한 역사를 소환하는 데 온전히 바쳐진 영화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소환은 과연 어떻게 가능할까.
직전 장면에서 리앙은 정체불명의 무음 전화에 대고 가까운 과거에 죽은 연인을 찾는다. “아 웨이, 들어. 더 이상 기다리게 하지 마. 빨리 나한테 돌아와. 매년 네 무덤을 간다고. 보고 싶어.” 그리고 곧 ‘그’ 장면이 이어진다. 리앙은 흐느끼고 있다. 그런데 누구로서? 앞서 설명한 구성과 구조 속에서, 이는 가까운 과거와 대과거 혹은 실제와 허구에서 일어난 모든 죽음을 애도하는 중의적인 몸짓처럼 보인다. 게다가 극 중 남편의 유언이 영화 속에서 리앙이 아닌 다른 이의 유일한 내레이션이라, 마치 죽은 연인 대신 리앙에게 대답을 하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간격 속에서 모든 것이 뒤섞이고 모든 것이 명징하다. 혼탁하기 짝이 없는 역사가 여기서 고스란히 소환된다. 다름 아닌 애도의 몸짓과 영화라는 픽션에 의해 말이다. 올해 수많은 죽음을 지나온 내게 이 신비로운 장면은 알려주었다. 슬퍼해도 괜찮다는 걸, 슬픔이 역사를 견디고 직시할 힘을 주기도 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