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재난이란 한 겹을 벗겨내면 인간 군상이, 그 안에 존재하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살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신념을 버리지 않기 위해 했던 ‘영탁’(이병헌), ‘민성’(박서준), ‘명화’(박보영)의 선택과 행동을 재단하는 잣대는 곧 관객 자신에게 하는 질문으로 돌아온다. 엄태화 감독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 후, 그러니 이제 반대편에 있는 이의 마음을 살펴보자고 말한다. 그런 유토피아가 어딘가에 존재하길 바라면서.
대지진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세상에서 홀로 건재한 아파트 한 동, 그 안의 사람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지진이 어떻게 발생한 건지, 도시는 어디까지 무너진 건지 알 길없는 가운데 사람들은 재난 이후의 또 다른 재난을 맞이한다. 원작인 웹툰에서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너진 건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달에 가까워졌다’는 식의 설정만 존재할 뿐이다. 나 역시 그 지점에서 출발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시가 얼마나 붕괴된 건지 모른 채 그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시점에서 출발하기로 한 거다. 진도 몇의 지진인지 묻는 사람도 있었는데, 만들면서 내심 한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붕괴가 일어난 상황을 떠올리기는 했다. 그러니까 전 지구에 뭔가 큰 문제가 생겼다고 설정하고 작업한 셈이다.
이 아파트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완성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첫째도 리얼리티, 둘째도 리얼리티, 셋째도 리얼리티만 계속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원작을 보면서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흥미롭게 느끼는지 생각해봤는데, 그 핵심에 ‘아파트’가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라는 존재는 단순히 주거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나. 많은 사람에게 삶의 터전이자 자산이기도 한, 애증의 공간이지 않나 싶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 보다 현실적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그림을 만들어내는게 무엇보다 중요했고, 세트 작업에 굉장히 공을 들였다. 영화에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황궁아파트가 실재한다면 서울의 어느 동네일지까지 생각하면
서 세트를 제작했다. 신혼부부인 민성과 명화가 영끌 해서 들어갈 수 있으면서 한강과 멀지 않은 동네를 몇 군데 후보로 두고 고민했고, 최종적으로는 지하철 약수역 인근이 제일 적당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제로 약수동 일대의 지형을 살펴보고 시뮬레이션을 거친 후에 아파트를 세웠다. 황궁아파트 한 동 짓느라 수없이 헌팅을 다니고, 자료 수집도 꽤 많이 했다.
외관 못지않게 각 집의 내부 인테리어도 ‘진짜’라고 느껴질 정도로 캐릭터의 특성을 잘 살린 점이 인상 깊다. 각각의 집도 하나의 캐릭터라 생각하고 구체화했다. <집의 시간들>이라는 우리나라 다큐멘터리를 보면 사람은 나오지 않고 카메라가 계속해서 집 안 곳곳을 비추는데, 그것만으로도 어떤 사람이 사는지 가늠하게 된다. 그걸 참고해서 우리도 집 안만 보여줘도 누구의 집인지 알 수 있게 하자는 목표로 상세하게 구상했다.
이제 시선을 아파트 내 인물들로 옮겨보자. 대지진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리더(임시 주민 대표)를 선정한다. 그 후 법(규율)을 세우고, 그에 따라 움직인다. 마치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과정을 보는 듯했다. 가장 중점을 둔 심리는 공포다. 실제로 사람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공포를 느낄 때, 믿을 수 있는 대상을 세워 그가 자신을 끌어주길 바라는 경향이 있지 않나. 나아가 리더를 맹신하게 되기도 하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사람이 있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고, 간혹 반발하는 이도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들 간의 갈등이 발화하는 순간과 그때 심리를 잘 보여주고 싶었다. 간혹 소국가의 탄생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는데, 그렇게 거시적인 이야기까지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 인간 심리에 포커스를 두고 각기 다른 인물들이 어떤 마음에서 선택해가는지, 그 선택들이 모여 어떤 결과로 향해가는지가 중요했다.
그 때문인지 남녀노소, 그야말로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관객이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하고 싶었다. 세대에 따라, 신념에 따라, 지키고 싶은 존재가 무엇인지에 따라 누군가는 영탁에게 혹은 민성에게, 도균이나 명화, 그리고 금애에게 공감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 다양한 사람을 하나로 묶는 말도 나온다.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었어요”라는 명화의 대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과 나의 접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 ‘평범’은 이타적과 이기적, 선과 악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라 생각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가져오고 싶어 한 표현이기도 하고. 실제로 인류 역사를 봐도 극악한 사람이라 여겨진 인물조차 가까이에서 마주하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 놀라웠다는 기록이 있지 않나. 정의로운 선택이 누군가를 해치는 칼날이 되어 다가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쓴 대사이기도 하다.
그래서 황궁아파트 사람들의 선택을 오롯이 비난할 수도, 지지할 수도 없다.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다가도, ‘나라면?’ 하고 자문하면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내가
배고프니까 저 사람도 배고프겠지. 이렇게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그러기 어려운 세상이지 않나. 한국에서는 ‘먹고사니즘’이 유독 중요하니까. 그러다 보니 내 가족, 내 집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고 그것만 바라보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으로 흐르기 쉽다. 이런 마음이 쌓여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선택으로 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이 영화 속 인물들을 종국에는 악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으로 가게 하는 게 최종 목표였다. 왜냐하면 그건 나, 그리고 내 가족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각 인물의 이야기를 얼마큼 보여줄지도 고민의 한 줄기였을 것 같다. 그래서 배우들이 무척 중요했다. 인물의 전사를 하나하나 보여줄 수 없는 만큼 배우들이 설득해줘야 하는 부분이 컸다. 한 장면만 봐도 어떤 사람인지 알겠다하는 느낌이 확 들어야 한다는, 굉장히 어려운 미션을 안겼는데 배우들이 이를 훌륭히 표현해주었다.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김도윤 배우 등 앞서 말한 숱한 고민이 이들의 만남으로 정리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각 배우의 연기력이 영화의 완성도를높였다는 평이 자자하다. 영화라는 것이 살아 있는 유기체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처음에 생각한 것과 완성된 결과물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그 다름 혹은 변화 안에는 나의 무의식도 투영됐을 테고, 수많은 변수도 담겨 있을 거고, 무엇보다 배우가 만들어내는 부분이 가장 크다. 각 캐릭터의 주인이 하나씩 채워진 뒤 배우들과 대화하면서 톤이나 대사를 바꿔보고, 촬영하면서 또 다른 시도를해본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는 나름대로 균형을 잡아간다. 이렇게 배우와 함께 바꿔나가는 과정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번 영화는 좋은 배우들과 함께하면서 그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이병헌 배우는 물론이고, 박서준 배우와 박보영 배우도 주어진 것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이 맡은 인물에게서 더 많은 것을 알아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특히 박보영 배우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에너지를 명화에게 다 쏟아냈다. 명화는 분명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이타적인 인물이긴 하지만그도 황궁아파트라는 틀 안에서 갇혀 있었다. 그가 남편을 지키기 위해 하는 선택들이 어떤 선을 넘어 광기에 이르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는데, 박보영 배우가 그 지점을 너무나 잘 표현해주었다.
첫 장편 <잉투기> 때부터 작품마다 등장해 이야기의 힘을 더해주는 배우가 있다. 동생 엄태구 배우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하
다. 그런데 감독은 배우와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그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 작품에 담을 줄 알아야 하지 않나. 그게 영화 하면서 항상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동생과는 친해지는 과정이 필요 없으니까 편하고, 한편으로 의지도 된다. 어려운 거 시키기도 좋고. 사실 이번 영화에서 맡은 노숙자 역할도 우정 출연으로 부탁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그냥 “해줘” 한마디로 섭외를 마쳤다.(웃음) 언젠가 다시 동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만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말은 앞으로 만들 영화에도 엄태구 배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말로 이해해도 될까? 그렇다. 어떤 인물로든 내 영화에 등장시키고 싶다.
결말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다. 희망인지, 또 다른 절망인지. 두 가지 모두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능하면 작은 희망을 발견하면 더 좋겠다는 마음은 있다. 다만 그것이 억지스럽게 보이는 건 원치 않아 배우의 표정과 배경음악, 앵글에 대해 어느 때보다 깊이 고민했다.
그럼 황궁아파트는 진정 유토피아였을까? 이런 질문도 하게 된다. 사실은 유토피아라는 말 자체가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이지 않나. 그래서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제목이 마음에 든다.
이야기 밖으로 나와 영화감독에게 유토피아는 어떤 모습인가? 존재하지는 않더라도 꿈꾸는 최선의 무엇 말이다. 2005년인가,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가 지
금은 작고하신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영화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 GV에 참석했었다. 팔순이 넘은 감독이 산소호흡기를 끼고 관객과의 대화를 위해 무대에 오르는데, 그 장면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관객 중 한 명이 연출가가 되는 게 꿈인데 감독님의 노하우를 알려주면 좋겠다고 하자, 돌아온 답이 “미래의 경쟁자에게 그걸 알려줄 순 없다”였다. 그렇게 생의 마지막까지 영화를 하는 게 감독에게 유토피아이지 않을까.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여정은 어떤가? 현실에 발붙이고 나아갈 수도, 꿈속에서 유영하듯 갈 수도 있는데. 나는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은 편인 것 같다. 말하자면 이상주의에 가까운데 그런 면이 영화라는 일을 계속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본래 성격이 낙천적이기도 하고. 그런데 대책은 없는.(웃음) 이번 영화에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해야죠”, “어떻게 하겠지” 이런 대사들이 나오는데, 그게 내가 자
주 하는 말이다. 어떻게 들으면 되게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는데, 그냥 ‘영화를 할 수 있을 거야’라는 일종의 믿음을 가지고 계속한 것 같다. 첫 장편영화 <잉투기>에 이런 말이 나오지 않나. “계속하는 것은 힘이 된다”고.
그 믿음에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이룩한 스코어가어느 정도 보답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영화의 활기가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도 관객 수 3백80만 명을 돌파했다. 물론이다. 영화는 개인적인 꿈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상업적인 행위라는 부분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스코어는 다음 작품을하는큰 동력은 얻은 것과 같다.
2023년, 뜨겁게 여름을 보낸 이 영화가 시간이 흐른 뒤에 어떤 영화로 기억되길 바라나? <잉투기>를 만들 때, 이 이야기가 <바보들의 행진> 같은 영화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보들의 행진>이 1980년대 청춘을 보여주는 이야기라면, <잉투기>는 2012년을 사는 청춘의 고민을 기록한 영화로 남길 바랐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도 언젠가 2023년을 돌아봤을 때 사람들의 고민과 시대의 맥락이 읽히는 영화로 존재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