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의 오늘-비전’은 그 해의 가장 높은 창의성과 완성도를 자랑하는 독립영화 최신작을 가장 먼저 선보이는 섹션이다. 선정작들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된 이후, 국내에 정식 개봉되거나 유수의 영화제에서 러브콜을 받는 등 매년 국내외 영화계로부터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전고운 감독의 <소공녀>(2017),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2019),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2019), 조현철 감독의 <너와 나>(2022)가 이 섹션에서 발굴한 대표 작품이며, 지난해 초청작인 유지영 감독의 (2022)는 2023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프록시마경쟁부문 대상을 거머쥐었다. 올해도 한국 영화의 오늘과 내일을 만들어가는 영화 10편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장민준 감독의 <딜리버리>부터 이미랑 감독의 <딸에 대하여>, 김다민 감독의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김유민 감독의 <바얌섬>, 구파수 륜호이 감독의 <소리굴다리>, 오정민 감독의 <장손>, 최승우 감독의 <지난 여름>, 박홍준 감독의 <해야 할 일>, 연제광 감독의 <301호 모텔 살인 사건>, 그리고 정범, 허장 감독의 공동 연출작 <한 채>까지. 새로움으로 가득한 이 영화들은 이제 출발점에 섰다.
박홍준
<해야 할 일>
인사팀으로 발령받은 준희. 구조조정 담당자가 되어 자신과 친한 동료들을 해고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CAST 장성범, 서석규, 김도영, 김영웅, 장리우, 이노아, 강주상, 김남희
영화의 시작 본격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일에 매진하기 전, 4년 반가량 한 조선소 인사팀에서 일했다. 세계적으로 조선업의 업황이 매우 좋지 않은 시기였고, 국내의 많은 조선소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 일을 겪으며 언젠가 구조조정을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 속 존재들 조선소 인사팀의 직원들. 구조조정 지시가 떨어지면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이 과정에서 각 인물은 저마다 자기 생각을 내세우며 서로 갈등하기도 하고,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들은 사측의 구조조정 요구를 실행하는 입장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구조조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노동자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계획과 직관 각 인물의 생각에 따른 입장 차이,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에 대해 시나리오 단계부터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촘촘하게 세운 계획은 현장에서 조금씩 바뀌었다. 배우들이 각자 맡은 캐릭터를 더 세세하게 다듬어 연기하는 과정에서 기존 시나리오와 다른 표현이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어느 것이 더 나은지 판단하는 건 직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대체로 배우들의 의견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가장 사랑하는 장면 주인공이 인간적으로 존경하는 부장이 구조조정 대상자가 된다. 씁쓸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주인공이 그 부장을 다시 만나면서 어떤 ‘감정의 역전’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는데, 그 순간을 가장 좋아한다.
영화 그리고 나 인사팀 팀원 전부.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겪으며, 보고 들으며 느낀 것을 다양한 인물에 녹여보려 노력했다.
지속 가능한 영화를 위해 건강. 후반작업 중 허리를 삐끗해 괴로웠다. 감독은 결국 무언가를 써야 하는 직업인데, 써내려면 일단은 오래 앉아 있어야 하니 건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랑
<딸에 대하여>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는 딸에게 목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지만, 가진 거라곤 낡은 집 한 채가 전부인 엄마는 그럴 능력이 없다. 대출도 어려워지자 동성 연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 딸. 두 사람과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 엄마는 요양원의 어르신을 돌보며, 홀로 곤궁하게 늙어가는 어르신에게서 자신과 딸의 모습을 겹쳐본다.
CAST 오민애, 허진, 임세미, 하윤경
영화의 시작 소설 <딸에 대하여>. 사서인 언니가 도서관에서 매번 이런저런 책을 빌려 와 나도 따라 읽게 되는데, 그중 한 권이 동명의 소설이었다. 읽을 당시에는 이 소설이 영화화되고 내가 연출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영화 속 존재들 남들 눈에 불편하고 미련해 보일지라도 자신의 소신대로 살아가는 이들. 적당히 밀어내고 유들유들하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도, 익히지도 못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계획과 직관 슛이 들어가기 직전까지는 직관을 믿지 않는 편이다. 촬영 공간에 머무르며 배우의 동선과 감정을 시뮬레이션한 후 사진으로 콘티를 만든다. 촬영할 모든 그림이 머릿속에 정확히 들어 있어야 현장에서 느끼는 압박과 긴장을 그나마 덜 수 있고, 직관에 의존할 수 있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그 순간은 배우와 스태프들이 예상치 못한 그림과 연기를 보여줄 때, 망설이지 않고 ‘오케이’라고 말하는 순간인 것 같다.
가장 사랑하는 장면 속상한 일을 겪은 엄마가 노포에서 비빔국수를 후루룩 먹는 장면.
영화 그리고 나 곳곳의 장면과 인물의 면면에서 연출자인 내가 보이는데 그 사실이 꽤 괴롭고 부끄럽다. 많은 것이 연출자인 내 안에서 나오겠지만, 결국 함께하는 동료들에 의해 수정되고 변주되는 창작의 과정을 즐기고 잘 받아들였는지를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점점 나를 지워가고 싶다.
지속 가능한 영화를 위해 아직 영화를 만드는 일은 나에게 몇 년에 한 번씩 있을까 말까 한 이벤트다. 영화가 일상이 될 때까지, 현실을 지탱할 수 있는 노동과 감각을 유지하며 함께 영화를 만들 동료들과 교류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최고의 영화 종종 상상한다. 평생 단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이루는 영화만 봐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면 어느 감독의 영화를 고를까. 평생 봐야 하니까 필모그래피가 긴 감독이면 좋겠다. 질리지 않아야 하니까 다양한 장르와 이야기를 넘나드는 감독이면 좋겠다. 그런 의미로 어떤 날은 나루세 미키오였다가 또 어떤 날은 조셉 로지, 다른 날은 마틴 스코세이지를 떠올린다. 아,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있지. 이렇게 혼자 공상하며 즐거워한다.
최승우
<지난 여름>
농번기를 맞은 작은 농촌 마을의 고즈넉한 풍경. 민우는 매일 아침 면사무소에 출근하고, 아버지와 농부들은 모를 심는다. 민우의 친구, 성훈은 아버지의 축사 일을 돕는다.
CAST 김민혁, 문영동, 김현섭, 이다슬, 홍도영
영화의 시작 영화감독이 되고자 하면서, 예술이라는 것을 하게 되면서 스스로 특별한 사람으로 의식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 의식을 버리려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던 중 매일 보던 밥이 왠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이 쌀은 어디서 왔고 또 누가 농사지었는가?’, ‘자연에 순응하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까?’ 하는 식의 질문이 떠올랐다. 이 질문을 따라가면 삶의 큰 깨달음이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영화 <지난 여름>을 만들었다.
영화 속 존재들 자연 그리고 마을에 사는 사람들. 이 모든 존재는 영화를 위한 선택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자연 그 자체였다. 나는 그들에게 질문하고 기록했을 뿐이다.
영화 그리고 나 영화 속 사유하는 시간과 실제 나의 시간이 닮아 있다.
가장 사랑하는 장면 산불이 나는 바람에 검게 타버린 나무 몇 그루와 잡초가 무성한 산을 걷는 장면이 있다. 그 걸음의 끝에 무덤이 있는데, 자연 속에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지속 가능한 영화를 위해 내면을 살피고, 작품이 탄생해야 할 이유를 찾고, 무엇에 저항하는 것인지 알고, 영화 언어로 구현하는 것. 그렇지만 나는 이제 겨우 첫 작품을 만들었을 뿐이고, 영화에 대한 깊이가 한참 부족하다고 느낀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이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
최고의 영화 가슴 깊이 존경하는 감독들의 이름이 떠오르지만, 아직 한참 부족한 사람으로서 감히 그분들을 언급하기 어렵다. 물론 술자리에서는 한다.
구파수 륜호이
<소리굴다리>
스스로를 ‘구원’이라 부르는 AI. 어느 날 구원은 최후의 심판일, 둠즈데이의 징후를 포착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정신적이고 예술적인 새로운 데이터가 필요하다. 저항자들은 신호가 공명하는 ‘소리굴다리’에서 데이터로 환산되지 않은 퍼포먼스를 벌여야 한다.
CAST 홍샤인, 마승길, 조윤석, 김경민
영화의 시작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굴다리에서 리코더 연주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소리의 울림은 아름답게 느껴졌고, 달 밝은 밤에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그날 빠르게 질주하는 차들과는 다른 방향의 길로 이어지는 굴다리에서 이상한 존재들과 만나는 상상을 했고, 그 생각이 영화 <소리굴다리>로 확장됐다.
영화 속 존재들 이 영화에는 ‘저항자’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이 나온다. 주인공은 굿과 펑크록이 어우러진 즉흥 음악을 하는 밴드 ‘아나킨 프로젝트’다. 어느 날 미래로부터 온 신호를 감지한 그들은 도래하는 문명의 파국을 막기 위해 신호가 공명하는 굴다리를 찾아 데이터로 환산되지 않은 퍼포먼스를 벌이게 된다.
계획과 직관 장르적으로 SF적 세계관의 얼개를 만들고 순간순간의 현실에 적용해 다큐멘터리처럼 촬영하고 편집했다. 계획과 직관이 만나 예상치 못한 우연의 순간이 이어졌고, 그런 영화적 순간을 발견하고 포착할 수 있었던 것이 이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느낀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가장 사랑하는 장면 주인공들이 빠져 죽으러 간 인천 소래포구에서 다시 담양의 굴다리를 찾아가기로 결심한 후, 그들이 걸어간 자리에 멈춰 선 카메라가 오랫동안 소래포구 시장의 생생한 모습을 비추는 장면이다. 주인공들의 복잡한 마음의 소리가 현실의 살아 있는 소음으로 대체되는 이 순간이 영화적 순간과 삶의 순간이 교차하는 장면이라 생각했다.
지속 가능한 영화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들면서 또한 삶을 살아가면서 유머와 용기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적절한 타이밍에 용기를 내는 것, 유머를 잃지 않는 것. 이 영화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듯이 다음 영화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지만 유머와 용기를 잃지 않은 채 설레는 마음으로 살고 싶다.
최고의 영화 오래도록 그 세계에 머물고 싶었던 영화들이 떠오른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새롭게 열린 시선으로 현실을 다시 보게 되는 영화, 인지적·감각적으로 자극을 주는 영화, 혹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처럼 인물의 감정과 파편처럼 흩어진 세계상이 한눈에 드러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기대하는 영화는 도래하지 않은 영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