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유재선 감독 인터뷰

가장 편안하고 평화로워야 할 공간에서 느끼는 극한의 공포. 영화 <잠>은 집이라는 안식처에서 두려움에 휩싸이는 신혼부부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의 이야기를 그린다. 공포의 시발점은 현수의 수면 중 이상행동. 잠들면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 기이한 일을 벌이는 현수의 증상은 매일 밤 그의 옆에서 잠드는 수진을, 스스로 가족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현수 본인을 긴장에 빠뜨린다. 두 사람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은 관객들의 몰입을 한순간도 느슨하게 풀어두지 않는다. 이는 인물과 서사에 초점을 두고 ‘재미’를 추구하는 유재선 감독의 철칙 덕분일 것이다. 첫 장편영화를 통해 제76회 칸영화제 등에 초청받고, 국내 개봉 12일 만에 1백만 관객을 돌파하는 성과를 이룬 그는 감독으로서의 긴 여정을 차근히, 스스로 즐기며 나아갈 생각이다.

스티치 수트 더 모스(themoth), 아이보리 피케 셔츠 주앙 옴므(juan homme),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잠>이 제76회 칸영화제의 비평가주간에 초청받아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과였다. 내 영화를 선보이는 자리를 앞두고 있을 때면 걱정을 많이 하는 편인데, 칸영화제에 가기 전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을 시작해 배우를 캐스팅하고, 투자를 받고, 영화를 완성한 것 자체가 박수받을 만한 일인데 영화제까지 간다니 엄청난 ‘보너스’라고.(웃음) 덕분에 긴장을 조금 풀고 영화 축제를 보다 더 즐길 수 있었다.

그 이후, 영화는 9월 6일에 국내 개봉해 흥행 중이다.주목해야 할 신예 감독의 등장을 반가워하는 이들이 많다. 영화의 세계에 들어온 계기는 무엇이었나? 어렸을 땐 평범한 관객이었고,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문예 창작 강의를 수강했는데, 교수님이 다양한 책과 영화를 권하셨다. 그런데 단편소설을 쓰는 강의였는데도 영화에 더 마음이 가더라. 아마 영화가 전하는 직관적 재미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영화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비전공자들이 모여 있는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도 있는데, 내가 유독 열정적이어서 ‘너는 감독이 되어야 한다’라는 격려를 많이 받았다. 용의 꼬리가 아닌 뱀의 머리였기 때문에 철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웃음)

봉준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이고, 그가 <잠> 시나리오를 읽고 이 작품으로 데뷔하라는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후배 양성을 위한 그의 노력은 한국 영화계에 대한 기여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 도움의 대상이 나라서 감사할 따름이다.(웃음) 현장에서 연출부로 일하면서도 영화감독이 막연한 꿈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내 자질에 대한 의심이 생길 때 봉준호 감독님이 자신감을 심어주신 덕분에 내가 감독의 모자를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봉준호 감독의 어떤 점을 배우려 했나? 준비를 철저히 하신다는 점. 그건 내가 흉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감독님은 촬영 시작 전부터 이미 머릿속에 영화를 어느 정도 완성해두신 것 같았고, 그와 동시에 현장의 변수들도 수용하셨다. 마치 정반합과 같은 엄청난 작품을 탄생시키는 분이라는 걸 깨달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도 <잠>을 작업할 때 감독님처럼 모든 걸 물샐틈없이 준비하려 했다. 그럼에도 현장으로 향하면 세트나 동선,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매일같이 발생했다.

가장 큰 변수는 무엇이었나? 배우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완벽히 파악했다는 것. “이 인물이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 같다” 하는 말들이 이 영화를 더 실감나게 만들어주었다. 이를테면 난 현수가 수진의 말과 행동에 조용하고 온순하게 반응하는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이선균 배우가 현장에서 여러 시도를 하며 현수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대사에 농담을 더하거나, 한층 장난스러운 톤으로 연기하는 식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게 신의 한 수였지 않나 싶다.

이선균, 정유미 배우를 캐스팅 1순위로 꼽았다고 들었다. 두 배우는 오래 활동해온 만큼 각자의 필모그래피가 방대하다. 이를 살펴봤을 때, 그들이 내가 <잠>에서 원한 ‘장르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결이 살아 있는’ 연기에 제격일 거라 생각했다.

두 배우를 비롯해 현장 경험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신인 감독으로서 느낀 부담도 적잖았을 거라 짐작한다. ‘사람들이 나를 어엿한 감독으로, <잠>의 선장으로 인정해줄까?’ 하는 고민이 앞섰다. 하지만 촬영이 시작되자 기우였음을 알았다. 모두 열의를 보여준 덕분에 작품에 대한 물음표만을 갖고 작업할 수 있었다.

첫 항해를 이어가는 선장의 마음은 어땠는지 궁금하다.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내가 지금 바다 위에 있구나’ 하는 초현실적 기분이 들었고, 대단한 선원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함도 느꼈다. 거친 파도와 매일 수면 위로 떠오르는 장애물을 극복하며 정신없이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해 있더라. 눈 깜짝할 사이에 영화가 완성되어 있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재미 있는 장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번 영화의 철칙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재미를 추구했나? 인간에 대한 고찰, 사회적 울림 등도 일종의 영화적 재미에 해당할 테지만 내가 지향한 재미는 ‘지루하지 않음’이었다. 내게는 영화가 전개되는 동안 관객들이 한순간도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의 몰입감을 선사하는 게 중요했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잠>의 주요 소재는 몽유병, 수면 중 이상행동이다. 이를 영화 안에서 어떻게 발전시켜갔나? 몽유병 환자와 그 곁을 지키는 가족의 일상에 대한 궁금증이 이 영화의 시작점이었다. 시나리오 작업 초반에는 현수의 기괴한 증상과 이에 반응하는 수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는데, 다소 단조로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점점 커지는 수진의 두려움으로 인해 이들의 이성이 흐려지며 진실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는 방향으로 발전시키니 흥미롭더라. 그 이후 시나리오를 단숨에 써 내려갔다.

영화의 배경은 대부분 수진과 현수의 집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연출하면 제약이 따를 수도 있을 텐데 어땠나? ‘제약은 일종의 해방’이라는 말이 있다. 가정집의 공간적 제약을 이용해 창의적인 시도를 하는 게 <잠>의 재미있는 과제였다. 촬영감독과 미술감독 등 현장에 함께한 이들이 아이디어를 많이 제안해준 덕분에 잘 풀어갈 수 있었다. 일례로 이번 영화는 수진과 현수의 상황에 따라 3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 장마다 미술적 변화를 줬다. 신혼부부의 알콩달콩한 모습이 담긴 1장은 아늑하고 따뜻한 집, 관계가 점점 냉랭해지는 2장은 감옥 같은 차가운 집으로 만드는 식이었다.

집이라는 공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공포의 대상을 마주하면 도망치려 하는 게 인간의 본성일 텐데, 오히려 그를 가까이에 두어야 하니 말이다. 마지막 안식처까지 빼앗아버리니 어떻게 보면 굉장히 가혹한 영화다.(웃음) 그만큼 수진이 강인한 인물인 것 같다. 임신과 출산, 육아의 과정을 겪고 있으면서도 공포의 대상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정면으로 돌파하니까. 그런데 내가 이 영화를 준비하며 조사한 실제 몽유병 환자의 가정 중 이상행동을 이유로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든 함께 이겨내려는 사람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현수를 두려워하면서도 그와 같이 있으려 하는 수진의 고집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수진의 태도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가 없다’라는 가훈과 맞닿아 있다. 이번 영화에 대해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러브 스토리’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수진과 현수의 관계를 생각하면 스산한 영화임에도 어딘가 따스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다행이다.(웃음) 긴장이나 공포를 유발하는 이야기더라도 그 표면에 따뜻함이 덮여 있는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잠>에서도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언정 부부 사이에 발현되는 온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기뿐 아니라 유머도 담겨 있다. 영화가 상영될 때 객석에서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종종 있었다. 유머를 놓치기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장면은 없다. 다만 수진과 현수가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웃음을 유발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살아가다 보면 전혀 웃기지 않는 상황에 웃음이 터지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으니까.

부부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공포를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가?’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잠>은 이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현수의 이상행동을 고치기 위해 수진은 의학에 의존하고 미신을 맹신한다. 하지만 현수의 증상은 이들이 느낀 공포의 피상적 이유일 뿐이다. 공포의 근원에 대한 해석은 관객마다 다를 것 같다.

결말 또한 해석이 분분한데, 보험 삼아 찍어둔 에필로그를 폐기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잠>을 만들 때 이 영화에 대한 내 나름의 해석이 있었고, 이에 대해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관객들이 저마다 할 해석의 문을 닫고 싶지 않아 단호하게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끝맺었다. 영화가 공개되자 결말에 대한 해석이 절반 정도로 나뉘어 흥미로웠다. 관객 사이에 활발한 대화가 오가는 현상을 목격하며, 이 또한 영화가 주는 재미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이 영화의 장면 중에서 필요하지 않은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공하듯이 치밀하게 쓴 시나리오의 영향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어디선가 ‘모든 대사와 지문은 이야기를 진행시켜야한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게 이번 영화의 작업 원칙 중 하나로 작용한 것 같다. 인물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이야기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에 집중했다.

<잠> GV(관객과의 대화)에서 모더레이터를 맡은 봉준호 감독이 한 말이 떠오른다. “스토리와 배우들의 힘으로 94분을 숨 막히게 끌고 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영화적 힘 자체가 빛나는 영화다.” 극찬이다.(웃음) 배우들, 스태프들과 함께 뼈와 혼을 갈아넣듯이 만들어낸 작품이 찬사를 받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감독은 훌륭한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의 힘을 빌려 본인의 비전을 완성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치사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웃음) 나로서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첫 장편영화를 통해 얻은 자신감과 아직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새로운 목표를 향해 한 발 한 발 더 나아가려 한다. 그렇게 이 일을 평생 해나가고 싶다.

평생 하고 싶을 정도로 감독의 일을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이 일 말고는 대안이 없다.(웃음) 그리고 영화 작업만이 선사할 수 있는 즐거움을 좋아한다. 시나리오를 쓰고, 미술과 촬영에 관여하고, 연기를 디렉팅하는 등 다른 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하고 특별한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나. 이를 만끽하며 계속 영화를 만들어나갈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좀 더 좋은 감독이 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