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의 시간 동안 국악과 함께 성장해온 권솔지와 손새하, 그리고 프로듀서 히븐으로 이루어진 국악 크로스오버 밴드 삐리뿌. 피리, 태평소, 생황의 멜로디 아래 드럼 비트가 깔리며 그간 생소하게만 느껴지던 전통 선율이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새롭게 태어난다. 피리를 메인 보컬로 삼은 이들의 음악은 듣는 이로 하여금 무엇이든 느끼고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장난기 가득한 실험을 거듭하며 비로소 시작되는 삐리뿌의 새로운 여정.
팀 이름이 재미있네요. 어떤 의미를 담았나요?
손새하 피리를 불면 ‘뿌’ 하고 소리가 나는 것에 착안해 ‘삐리뿌’라고 지었어요. 우리 음악을 들으면 직관적으로 연상되는 이름이기도 하고,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쉬운 단어죠.
피리와 태평소, 생황을 다루는 두 명의 연주자와 전자음악을 다루는 프로듀서로 이루어진 팀이죠. 어떻게 만났나요?
손새하 솔지와는 중학교 때부터 함께 피리를 전공한 친구사이예요. 대학에서 피리 앙상블로 활동하다 2019년에 창작곡 ‘신무당 바이브’로 ‘21세기 한국 음악 프로젝트’라는 국악 대회에 참여했어요. 히븐과는 베이스 세션으로 처음 만났고요.
히븐 이후에도 프로듀싱 작업을 몇 차례 함께 했는데, 저희끼리 합도 잘 맞고 각자 추구하는 음악적 정체성도 통하는 지점이 있었어요. 솔지와 새하가 프로듀서로 정식 영입을 제안해 함께 활동하게 됐죠.
솔지 씨와 새하 씨는 피리를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요?
권솔지 가야금을 다루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국악을 들으며 살았어요. 토요일마다 국립국악원의 상설 공연을 보러 다닐 정도였죠. 그런데 새하도 저도 처음부터 피리를 전공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손새하 초등학교 때까지 가야금을 하다가 국악중학교 입학시험을 봤어요. 가야금은 입시 경쟁이 매우 치열하거든요. 면접장 앞에서 선배들이 피리나 해금 등으로 직접 악기 연주를 해주었는데, 그때 한 번도 불어본 적 없는 피리 소리에 유독 끌렸던 기억이 나요. 2지망으로 피리를 지원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거예요.
우연한 계기로 시작했지만 꽤 오랜 세월 함께해왔는데요, 피리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낀 걸까요?
손새하 작은 크기에서 나오는 힘이죠. 피리는 그 안에서 종류가 세분화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악기에 비해 크기가 작아요. 리코더보다 얇고 단소보다 짧은 악기인데, 소리는 제일 크죠. 그런 만큼 국악 합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요.
피리와 함께 생황과 태평소도 다루고 있죠.
권솔지 네. 태평소는 서양 악기 중 트럼펫과 형태가 비슷한데, 그보다 두 배이상 큰 소리를 낼 수 있어 주로 행진할 때 분위기를 주도하는 악기예요. 생황은 나무로 만든 박통 위에 길고 짧은 대나무 관 여러 개가 꽂혀 있는 생김새가 주는 존재감이 크고요. 한국의 전통 악기 중 유일하게 화음을 낼 수 있는 악기예요.
손새하 피리와 태평소가 상대적으로 날것의 소리를 낸다면 생황은 오르간 같이 오묘한 음색을 가졌어요. 세 악기의 특징이 달라서 곡의 분위기나 의도에 따라 알맞은 악기를 활용할 수 있죠.
삐리뿌는 보컬의 역할을 피리가 대신하는데, 곡을 구성하는 방식에도 보컬이 있는 음악과 큰 차이가 있을 듯해요.
히븐 맞아요. 그래서 피리 자체를 보컬이라 생각하고 프로듀싱 작업을 하고 있어요. 작곡은 새하와 솔지가 피리로 먼저 멜로디를 쓰면 그에 어울리는 비트를 만들거나, 제가 비트를 먼저 구성하고 피리 선율을 그 위에 얹는 식으로 진행하고요. 사람의 목소리에 견주었을 때 피리의 차별점은 자연의 소리에 더 가깝다는 거예요. 그래서 비트를 구성할 때 공간감을 줄 수 있도록 앰비언트 느낌을 살리거나 새소리 같은 요소를 활용하기도 해요. 자연의 느낌을 극대화하는 거죠.
작년에 EP <공성계>를 발매했어요. 앨범명이기도 한 ‘공성계’는 삐리뿌가 새로 만들어낸 세계관이라고요.
손새하 공성계(空聲界)는 소리가 없는 세계를 의미하는데, 우리가 상정한 가상 세계예요.
히븐 곡에 노랫말이 없다 보니 스토리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음악을 들었을 때 무언가 연상되지않으면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잖아요.
손새하 우리끼리 행성 이름도 지어보고, 히어로물 세계관도 써봤어요. 영웅,초능력 등 별 이야기가 다 나왔죠.
권솔지 악당도 등장했어요.(웃음)
손새하 돌아보니 재미있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새롭네요. 앨범에 담긴 스토리를 좀 더 설명해준다면요?
히븐 3명의 캐릭터가 공성계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은 스토리인데, 처음 상경했을 때 느낀 감정을 떠올리면서 썼어요. 공성계는 멀리서 봤을 땐 굉장히 화려하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에요.
권솔지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사람 간 소통이 단절된, 환상과는 다른 공간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그러다 마음이 맞는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데, 그때 느낀 즐거움이 세 번째 곡인 ‘인도드리’에 담겨 있어요. 그들과 새롭게 관계 맺으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마지막 곡인 ‘크리퍼’에서 표현했고요.
곡마다 스토리가 있는 셈이네요. 음악적으로는 어떤 표현을 하고자 했나요?
손새하 곡마다 기반이 되는 전통 선율이있는데, 그 선율이 쓰인 당대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스토리에 최대한 반영하려 노력했어요.
히븐 첫 번째 곡인 ‘이라이자’에서는 공성계로 나아가는 세 캐릭터의 비장한 마음을표현하기 위해 조선시대 군악대의 행진곡이던 ‘대취타’를 기본 선율로 활용했죠.
삐리뿌의 음악이 재미있는 지점은 국악의 선율이 어렵지않게 들린다는 점이에요.
손새하 그렇게 들린다니 반가워요. ‘인도드리’는 조선시대 정악 연주곡 ‘천년만세’의 두 번째 악곡인 양청도드리 선율을 반복적으로 활용해 중독성 있게 만들었어요.
히븐 그에 맞춰 베이스 라인도 한번 들으면 패턴을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구성했고요.
전통 선율을 재구성하는 작업에서 새롭게 느낀 점도 있나요?
손새하 국악을 새롭게 공부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어요. ‘이런 좋은 선율이 있었지’ 하면서.
히븐 솔지나 새하가들려주는 전통 선율만 듣다 보면 저는 굉장히 지루하거든요. 제가 준비한 비트 위에 새롭게 정리한 피리 선율을 더하면서 전통 선율을 재구성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평소 국악과 대중음악 사이의 교집합이 무엇일지 고민하며 앨범을 만든다는 인터뷰를 인상 깊게 봤어요.
히븐 우리나라는 국악과 대중음악을 별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그래서 삐리뿌의 앨범도 되도록 일렉트로닉 장르로 분류하려고 해요. 국악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일렉트로닉 음악과 함께 들어도 이질감 없이 잘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전통과 현대의 요소를 결합한 음악을 선보이는 만큼 삐리뿌의 음악을 국악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설명하기에는 아쉬움이 클 거라 짐작해요. 국악을 현대적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보려는 시도를 해오며 고민하는 지점이 있다면요?
손새하 국악을 온전히 보존하는 일과 새롭게 창작하는 일 사이에서 항상 고민이 있었어요. 여전히 국악계에 몸담고 있지만 삐리뿌 활동은 국악의 정통 계보를 따르는 방향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국악을 무기 삼아 트렌드와 조화를 이루는 음악을 해나가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봐요.
권솔지 삐리뿌로 활동하면서 음악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점이 재미있어요. 국악이 그저 어렵고 고루하다는 편견을 깨고 싶고요. 히븐 제 경우 재즈를 처음 듣기 시작한 게 ‘사람들이 이걸 왜 듣지?’라는 의문이 들면서였어요. 국악도 이런 방식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나 듣기 쉽게 장벽을 낮추는 작업 또한 필요하고요. 그 역할을 삐리뿌가 잘 해냈으면 좋겠어요.
문득 음악은 삐리뿌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그 안에 계속 머물게 되는지 궁금하네요.
히븐 저는 재미있어서 음악 안에 머물러요. 내가 재밌게 생각하는 걸 관객과 나누었을 때 더 큰 기쁨으로 오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는 것 같고요.
손새하 누군가와 빠르게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요.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도 좋은 음악은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처럼요. 권솔지 음악은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 데 뛰어난 도구가 아닌가 싶어요.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음악에 담아내 누군가와 나눌 때 큰 행복감을 느끼거든요.
이후 활동 계획은 무엇인가요?
히븐 연말에 ‘본궤도’라는 곡을 공개할 예정이에요. 어떤 일에 본격적으로 나아간다고할 때 ‘본궤도에 오르다’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올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의 시작을 여는 마음으로 준비한 곡이에요.
손새하 기존에는 궁중음악이나 제례 음악처럼 의식에 사용되는 전통 선율을 기반으로 했다면 신곡은 당시 평민들이 즐기던 음악인 민속악에서 출발했어요. 정형화되지 않고 조금 더 날것에 가까운 음악을 들려주려고요. 지금까지 선보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곡이에요.
삐리뿌의 음악이 듣는 이에게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길 바라나요?
손새하 장난꾸러기 같은 음악이요. 삐리뿌라는 이름처럼 독특하다는 인상을 주었으면 해요. 히븐 어떤 방식으로라도 각인이 되면 좋을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