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스 빅팍(BIG PARK).

 

“월세 안 밀리고 낼 수 있게 해주십사. 굶지 않고 밥 먹게 해주십사. 제발 뭐라도 만들어서 돈 좀 벌게 해주십사. 연금 복권 당첨되어 안정되게 좀 해주십사.” 무대에 앉아 가야금을 뜯으며 냉소적인 표정으로 넋두리하듯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 솔직하고 현실적인 가사를 내뱉으며 해금과 단소까지 혼자 연주하더니 갑자기 일어나 춤까지 춘다. 싱어송라이터 삼산은 국악 작곡을 전공한 뒤 홀로 방에서 음악을 만들다가 지난해 ‘모르겠어’라는 곡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그는 국악이라는 재료를 활용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악에 담아낸다. 더욱 다채롭게 피어날 삼산의 시작을 목격하고 또 기록했다.

 

삼산이라는 이름에서 장엄한 기운이 느껴져요. 어떻게 지은 건가요?
해남군 삼산면에서 자랐어요. 사주나 신점 보는분들에게 활동명을 따로 쓰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정·재계 거물급 인사들이 대부분 고향 이름을 넣어 작명하더라고요.(웃음)

처음 국악과 만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친구 집에 갔다가 우연히 가야금을 접했어요. 재미 삼아 뜯어보곤 음색에 매료돼 배우기 시작했죠. 부모님도 국악 마니아였거든요. 취미로 사물놀이를 하셨는데, 제가 배워보고 싶다니까 “좋아, 밀어줄게!” 하셨죠. 해남 근처에서는 국악을 배울 방법이 별로 없다 보니, 선생님을 수소문하다가 해금을 가르치는 분을 찾았어요. 그렇게 중학교 때 해금을 배웠고, 이후 예고에 진학했죠. 대학에서는 국악 작곡을 전공했고요.

꾸준히 국악에 대한 꿈을 키워온 건가요?
시간이 지날수록 억지로 한 면도 있어요. 초석을 다지는 단계는 그다지 즐겁지 않았거든요. 부모님이 원해서 한 것도 컸죠. 당시에는 다른 사람에 비해 잘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 어린 마음에 우월감을 가지고 계속 한 것 같아요. “연습하는 거 너무 싫어! 지루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요.(웃음)

오랜 시간 국악 안에 머물렀음에도 2년 전까지는 자신의 이름으로 무대에 서거나 음악을 공개하지 않았어요.
중학교 때부터 방구석에서 혼자 사부작사부작 노래를 만들었어요. 사실 곡이라기보단 일종의 일기에 가까웠죠. 자신의 속마음을 만천하에 공개할 사람은 없잖아요. 또 학교에서 배우던 음악과 제가 일기 쓰듯 만든 음악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어요. 이 둘은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이고, 나는 평생 일기를 쓰는 사람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죠

특별한 목적 없이 꾸준히 음악을 만들던 당시엔 어떤 마음이었나요?
많이 힘들었어요. 남들보다 감정을 소화할 수 있는 그릇이 작거든요. 정리되지 못한 잉여 감정이 있으면 잠을 잘 못 자요. 가슴속 응어리를 토해내듯 노래를 만들고 가사를 썼어요. 슬프고 우울했던 것 같아요. 상황이 달라질 기색이 없으니 내 인생은 계속 이렇게 가겠구나 싶었죠.

그러다 삼산이라는 이름으로 지난해 열린 ‘제7회 청춘열전 출사표’에서 ‘모르겠어’를 처음 선보이고 은상을 받았죠.
네. 사실 어떤 마음으로 그 대회에 참가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그냥 해보자’ 생각했던 것 같아요. 데뷔 무대이자 은퇴 무대라고 여겼을 정도니까요.(웃음) 저는 작곡가 출신이고, 노래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잖아요. 가야금, 해금,단소까지 한 번에 여러 악기를 다뤘어요. 전공자가 보기엔 부족해 보일 테니 당연히 안 되겠다 싶었죠. 인생 마지막 무대일지도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내려가자고 생각했어요. 춤도 추고 별짓 다 했죠. 가사도 현실적이고 신랄하게 썼고요. 지금까지 국악계에 그런 가사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았던 거예요.

저도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다 모르겠다’며 인생을 한탄하다 연금 복권 당첨되게 해달라고 싹싹 비는 게 웃기면서도 슬프더라고요. 특히 나른하게 가사를 읊조리는 방식은 타령 또는 랩 같기도 해요. 이런 방식으로 노래한 이유가 있나요?
방구석에서 음악을 만들다 보니 쌓인 게 많았어요. 그걸 곡 하나에 풀어내려니까 가사가 길어진 거죠. 그렇다고 전통 성악처럼 뱃심을 가지고 부르지는 못하니, 제게 가장 편한 방식을 선택한 것뿐이에요.

현실적이고 솔직한 가사를 툭툭 던지듯 노래하기 때문인지 ‘국악계의 장기하’라는 반응도 많았어요.
장기하 님을 좋아하지만, 의도적으로 오마주하거나 따라 한 건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제가 그분의 작사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말하자면 저는 백종원 식당의 메뉴판을 좋아해요. 영어로 적힌 화려한 메뉴판 말고 “두루치기 소자 1만3천원, 중자 1만8천원”처럼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정보만 써 있는 거요.(웃음) 그래서 저도 그렇게 담백하게 가사를 쓰나 봐요.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맞게 국악의 요소를 활용하는 것도 인상적이에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 곡인 ‘모르겠어’에서 넋두리하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요.
제가 토해내듯 음악을 한다고 했잖아요. 국악을 김치찌개라고 한다면, 평상시에 김치찌개를 너무 많이 먹는 거죠. 그런 다음 아무 생각 없이 음악을 토해내는 거예요. 그럼 김치찌개가 나와요.(웃음) 그게 다예요. 모든 걸 고려해 의도적으로 구성하지는 않아요.

 

드레스 빅팍(BIG PARK), 도트 패턴의 청키한 슈즈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

 

적확한 비유네요.(웃음) ‘모르겠어’의 가사를 보면 삼산이 가지고 있던 창작에 대한 의문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해요. “이런 음악 왜 만드는 거야? 이런 음악 누가 듣는 거야?” 혹은 “국악이 어쩌구, 대중화 어쩌구” 같은 가사처럼요. 이 곡을 만들 당시 삼산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나요?
국악은 지원 사업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지원 사업에 신청한 후 통과하면 그제야 지원금을 받고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죠. 저와 함께 국악 활동을 하는 친구들은 여기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그런 사업은 늘 최초의 작품을 요구해요. 예전에 선보인 작품이 아니라 기획에 맞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하죠. 그럼 3~4개월씩 영혼을 갈아서 무언가를 창작해요. 하지만 그 무대를 보러 가는 이는 결국 국악 하는 친구와 지인들이에요. 대중은 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니까요. 결국 사업이 끝나면 모든 게 공중에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무리 밤새워가며 고생한들 친구들과 저는 여전히 거지일 뿐이고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화가 나 있었어요. 누군가는 자꾸 창작 국악을 만들라고, 국악의 대중화를 이끌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수요가 없잖아요. 그러다 보니 이런 음악 왜 만들고 누가 듣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국악의 대중화는 삼산의 음악 인생에서 늘 빠지지 않는 화두였을 것 같아요.
참 어려운 문제라 여전히 잘 모르겠어요. ‘대중화’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자체도 모호하고요. 사람들의 취향은 시시각각 바뀌잖아요. 대중성을 노리고 음악을 만들었을 때 오히려 결과물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죠. 한편 삼산의 음악은 다분히 인간적인 가사로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학교 다닐 때는 잘 몰랐는데, 요즘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예술에 바라는 건 일상을 지탱하게 하는 힘을 전해주는 것인 듯해요. 한때는 고집 있는 예술가로서 역량을 한껏 발전시켜 실력으로 보여줘야 성공인가 싶었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온 후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음악을 통해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욕망도 커요. 우리는 상호작용을 하며 인생을 살아가니까요.

‘모르겠어’에 담았던 수많은 의문 중 해소된 것도 있나요?
‘이런 음악 왜 만드는 거야?’라는 물음은 해소된 것 같아요.저는 이렇게 활동하다 어느 순간 무대에서 사라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지 않을까요? 예전에는 누군가 들어야만 음악을 만드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나는 그냥 이렇게 태어난 사람이구나’ 싶어요. 죽을 때까지 음악으로 일기를 쓰는 사람이겠구나.

국악을 떠올리면 어떤 마음이 드는지 궁금해요.
국악은 저와 닮은 얼굴을 하고, 비슷한 것을 먹으며, 같은 땅에서 자라온 사람들이 만들어온 음악이잖아요. 그래서 더 마음이 가요. 서양 음악과 달리 듣고 있으면 피가 끓는 느낌도 들어요.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가슴께가 살짝 저릿한 거죠?(웃음) 맞아요! 제 생각에는 DNA에서 쫙쫙 끌어당기는 게 있는 것 같아요. 해외여행 가서 매일 스테이크 먹다가도 마늘이나 쌈장, 김치를 찾는 것처럼요.

공감합니다.(웃음) 여전히 삼산이 음악 안에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음악 안에서 느껴왔어요. 이건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해요. 그 안에서 너무 커다란 기쁨을 맛봤기에 내가 과연 다른 분야에서 이만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싶은 거죠.

그 희로애락 안에서 만들어질 음악을 기대할게요. 다채로운 형태로 피어날 삼산의 음악이 듣는 이에게 어떻게 가닿길 바라나요?
음악에 신세를 많이 져왔다고 생각해요. 누군가의 일상에 맞닿을 만한 다양한 노래를 만들 테니, 가끔 생각날 때 한 번씩 들어주세요. 제가 음악을 통해 힘을 낸 것처럼, 저의 노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