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여성 작가와 현대 여성 작가의 소설을 한 권에 담아내며 한국문학의 근원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취지에서 기획한 ‘소설, 잇다’ 시리즈. 세 번째 책 《백룸》은 1930년대에 왕성하게 활동한 이선희 작가와 현대의 천희란 작가를 다룬다. 이선희는 궁지에 몰리자 남편의 목숨값을 당당히 청구하는 <계산서>, 연인 사이였던 남자에게 자신의 아들을 입적하라고 명령하는 <여인 명령> 등을 통해 당시 여성의 삶을 예리하게 묘사했다. 사회 이면의 존재에 주목해온 천희란은 이선희가 다룬 주제를 재조명하며 소설 <백룸>과 에세이 <우리는 이다음의 지옥도 찾아내고 말 테니까>를 완성했다.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여성 인권’이라는 같은 문제의식을 지닌 두 작가의 만남은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구조가 시공간을 관통하며 실재함을 분명히 알린다. 탈출할 수 없는 미궁과 같은 현실에 대해, 그럼에도 절망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한계를 벗어던지려 했던 여성들에 대해 천희란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슈즈 앤아더스토리즈(& Other Stories), 재킷과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먼저 어떤 마음으로 ‘소설, 잇다’ 시리즈에 함께했는지 묻고싶다. 근대 여성 작가와 내 작품을 엮은 책을 내보자는 출판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 ‘이게 가당한 일인가’ 싶었다.(웃음) 이선희는 근대 여성 작가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라 낯설기도 했다. 그가 나와 잘 어울리는 작가일 거란 말을 듣고 나서 한번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혼자만의 작업을 담은 책이 아니라 출간한 소감이 특별할 것 같다. 책의 구성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출판사 편집부가 시리즈에 참여한 작가들의 세계관을 정성 어린 글로 소개해 기대가 컸다. 해설을 써준 선우은실 문학평론가에게 우리가 함께 책 한 권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작업해달라고 요청했다. 1930년대와 2020년대의 작가, 평론가를 비롯한 여성들이 합심해 탄생한 책이라 더욱 뜻깊다. 독자들이 책에 실린 여러 텍스트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선희 작가를 재조명하며 새로운 소설을 써나가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거라 짐작한다. 이선희 작가의 작품 세계에 담긴 본질을 녹여내는 동시에 나만의 이야기를 창작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있었다. 보통 ‘리라이팅(rewriting)’ 하면 한 작품의 일부를 차용하거나 뒷이야기를 이어 쓰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 개념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출간 후 한 북 토크에서 선우은실 평론가가 이 글쓰기를 ‘함께 쓰기’라고 설명했다. 내 작업의 가능성이 확장된 느낌이 들었다.

1930년대 여성의 삶을 다룬 이선희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나? 이선희 작가가 왕성히 활동한 1930년대는 급격한 성장을 이룬 시기로, 자유연애와 결혼 제도가 근대화의 산물로 등장했다. 그 덕분에 여성의 법적 지위가 향상되었지만, 그럼에도 당시 여성들은 오히려 전통과 진보한 이념 사이에서 착취를 당했다. <여인 명령>의 주인공 ‘숙채’가 대학생, 백화점 점원, 술집 여급을 전전하며 고된 삶을 이어가듯이 말이다. 이 지점을 이선희 작가가 날카롭게 직시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소설에 담아낸 여성들이 현실 속 고통을 그저 견디지 않고,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소설 <백룸>을 써나갔다.

<백룸>의 시작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세대차가 있는 두 여성의 연애 이야기를 구상했다. 퀴어 중에서도 특히 여성 동성애자가 사회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생각해 젊은 레즈비언을 화자로 내세웠고, 사회적 지위를 가진 상태로 커밍아웃을 한 여성 변호사를 그의 연인으로 등장시켰다. 우리는 이런 소수자들이 가시화되는 경험을 긍정적으로 보며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이상화하기도 하는데, 그들의 삶에도 다양한 분열이 있다. <백룸>의 동성 연인 사이에는이성 연인을 기준으로 파악할 수 없는 폭력이 존재하고, 이들도 이성애자처럼 나이와 지위 차이에서 야기되는 갈등을 겪는다. 사회정의나 진보에 부합한다고 믿는 대상이나 행위의 구체성을 편협하게 바라보지 않았으면 했다. 이 과정에서 화자를 과거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기던 게임 스트리머로 설정하고, ‘백룸’이라는 소재를 접목하니 전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백룸은 ‘무작위로 생성된 방들이 끝없이 나열된 미궁 같은 공간’으로, 공포 게임에서 자주 활용된다. 이를 소설의 소재로 삼은 계기는 무엇인가? 몸이 좋지 않아 한동안 병원에서 지낼 때 공포 게임 관련 영상을 많이 봤는데, 당시 백룸을 소재로 한 콘텐츠가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백룸은 현실과 연결되어 있지만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공간이다. 출구를 찾다가 어느 순간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백룸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막막하고 두려운 그곳이 세상의 수많은 여성, 어쩌면 여성뿐 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백룸을 소재로 삼고, 탈출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내려 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소설에 나오는 백룸의 바깥에 위치하며 그 안에 갇힌 인물들을 내려다볼 수 있다. 백룸 외부의 자신을 인지하며 내부를 살피는 경험을 한 독자라면, 마치 백룸 같은 실제 현실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체념하고 절망하기 쉬운 공간인 백룸을 다뤘다는 점에 대해 생각하다가 지난해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소설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도래하지 않을 유토피아를 꿈꾸기보다 닥쳐올 디스토피아를 저지하는 게 내가 작가이자 인간으로서 지닌 삶의 태도다. 부족한 점을 개선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현실 정치의 영역이라면, 우리를 덮쳐올지 모르는 위협을 떠올리게 하는 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껏 문학의 ‘부정성’에 집중하며 글을 써왔다. 여기서 부정성이란 불의를 밝히는 게 아니라 ‘질문하는 행위’에 가깝다. 물론 문학은 정의의 대변자가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지금 통용되는 사회적믿음이 현실의 입체성을 훼손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경험은 소설의 상상 세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절망을 보여줌으로써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세계랄까. 계속 새롭게 도래한 가시적 진보 뒤에 도사린 함정들을 살피고 싶다. 이러한 부정성은 섣부른 낙관에 저항하는 방법이지 비관은 아닐 것이다.

부정성에 집중하는 태도는 타고난 기질에 가까운가? 불안감이 큰 사람이라 어릴 때부터 최악의 상황에 대한 상상이 일상을 자주 침범했다. 불안의 징후를 끊임없이 발견한다는 게 예전엔 스스로를 괴롭히는 약점이었지만, 현재의 내게는 소설을 쓰는 동력이 되어준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이란 표면적인 이해로부터 배제된 경험에 주목하는 일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해보다 오해에, 화해보다 갈등에 집중할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이 태도를 오래 가져왔으니 부정적 예감이 주는 고통을 참는 게 괜찮아졌다. 다만 참아내다 보면 세상을 냉소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곤 하는데, 그때 어려움과 무서움을 느낀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냉소와 계속 맞서온 것 같다.

세상에 대한 냉소를 경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한다고 생각하나? 계속해서 대화해야 한다. 여성이 인권을 위해 싸워온 역사는 배제에 대항하는 공동의 경험이다.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의 무수하고 다양한 고통을 함께 사유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된 지금, 페미니즘 자체에 대해 회의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 안에도 수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살필 수 있는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차이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설득해야 한다. 극단적 혐오와 백래시가 두려워 차이를 은폐한다면 페미니즘을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잃고 말 것이다. 적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대하기 위해 투쟁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백룸>에도 연대와 관련한 사건이 나온다. 그런데 그루밍 성폭력을 당한 여성의 소송을 두고 ‘손쉬운’ 연대와 단절이 생긴다. 진정한 연대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지점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정치적 의제를 쉽게 접하고, 빠르게 연대하겠다고 밝힌다. 그러면 연대가 마치 모두에게 옹호받는 정의로운 일처럼 여겨지고, 사건도 쉽게 해결될 것만 같다. 그런데 정작 사건의 당사자들이 처한 상황은 훨씬 복잡할 수 있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한이면의 경험이 존재할지도 모르지 않나. 그래서 연대는 간단히 성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함께하겠다는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건 쉽지 않다. 지지한다는 선언이 우리를 정의롭게 만든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도저히 바로잡히지 않는 부정의’, ‘너무 많은 연대와 단절’이 있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갈수록 극심한 경쟁과 미래에 대한 부담이 가중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인데, 그 선택이 누적되어 나타날 결과는 끝내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아닌 세상을 위해 싸우는 게 결국 나를 생존하게 하는 일임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책에 담긴 1930년대와 2020년대 여성의 이야기는 시대가 다름에도 닮은 지점이 있다. 그 이야기가 시공간을 초월해 미래까지 존속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독자가 이런 후기를 남겼다. “백룸이 단순한 소설의 소재가 아니라 이번 책 전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이선희 작가와 내가쓴 소설을 구조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여성이 처한 상황은 반복되고 있다. 무엇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반복의 이유를 살피는 여성들이 앞으로 계속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그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도울 방법 중 하나가 문학이 아닐까 싶다. 맞다. 사유는 언어를 통해 이뤄지지 않나. 그래서 글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경험이 다른 매체에 비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소설은 삶의 일부를 서사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호한 경험이나 복잡한 감정을 명징하게 언어화한다. 그렇게 완성한 소설을 접한 독자들이 저마다 자신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하면 좋겠다. 그게 지금 내가 믿는 문학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