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1일. 우리가 바라는 새해 첫날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떤 바람결에도 구겨지지 않을 기백을 지닌 채, 빼꼼 고개를 내미는 희망을 찾아 한 해를 살아내기 위해. 여기 시작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해줄 장소와 음악, 영화와 책을 모아보았다. 좋음으로 가득한 2025년의 첫날.

출발선에서

기억하는 한 내게 새해 첫날은 늘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반쯤은 등 떠밀려 맞이하게 되는 날이었다. 왔구나… 하고 승복하는 심정으로,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산더미같이 쌓인 1년 치의 후회와, 어수선한 마음을 서둘러 봉합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비슷한 게 자리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날만큼은 모두가 약속한 것처럼 출발선에 서는 마음이 된다는 데서 위안을 얻곤 한다. 과거는 과거에 남겨두고 가뿐하게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마음, ‘처음’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보며 온전히 나를 위해 하루를 쓰려는 마음. 2025년 1월 1일은 그런 마음으로 맞고 싶다. 지난 한 해 동안 내 안을 채웠던 문장과 장면을 다시 꺼내고, 아름다운 음식과 선율로 마음을 가다듬어보려 한다. 내게 익숙한 좋음들로 하루를 채우다 보면 한 해를 살아갈 작은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출발선에 선다.

대관령 선자령

눈 내리는 날을 그리 반기는 편은 아니지만, 눈이 동반하는 고요만큼은 좋아한다. 눈이 오면 왜 세상 모든 소음이 차단된 것처럼 사위가 고요해지는 걸까. 그런 게 궁금하던 차에, 마침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다가 그 해답을 찾았다. 눈은 자신을 이루는 결정들 사이사이 빈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고, 그래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읽으며 생각했다. 새해 첫 일출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그런 고요 속에 있어야 한다고. 눈을 보기 위해서는 산간 지방으로 가야겠지. 그러므로 새해 첫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당도해야 할 곳은 대관령이다. 대관령 길 입구에서 출발해 2시간가량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선자령 정상에 닿는다. 거대한 풍력 발전기 너머로 탁 트인 하늘, 능선을 따라 펼쳐진 절경과 동해안을 한눈에 담아본다. 그 적막과 고요 속에서, 맑고 찬 공기를 한껏 들이쉬며 하루를 시작해본다.

새소년 ‘Kidd’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새해 첫 곡을 재생해본다. 지난 12월 3일에 갑작스레 선포된 45년 만의 비상계엄 이후, 매일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이 그 자체로 절망 같다가도 여의도를 물들이던 형형색색의 응원봉, 축제 분위기가 감돌던 시위 현장에서는 희망을 봤다. “두 손에 담겨진 것 다 빼앗기고 / 네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 / 비춰진 저 등불이 진짜일까 허영일까 / 절망은 우리에게 무뎌질까 부서질까 영원할까 사라질까.” 새소년의 싱글 ‘Kidd’의 가사는 벌어질 일을 미리 내다본 듯 지금의 상황과 절묘하게 겹쳐진다. 곡의 후렴에는 ‘빼꼼빼꼼’이라는 단어가 반복해 등장한다. 2023년 연말 콘서트에서 황소윤은 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희망이란 건 “새싹처럼 조금씩 돋아나고 자라나는” 것이라고. 한 번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 ‘빼꼼빼꼼’ 찾아오는 것이라고. 마침 마감하던 중에 탄핵안 가결 소식을 접했다. 절망 속에서도 빼꼼 고개를 내미는 희망 같은 게 있을 거라고, 그러니 함께 나아가자고 말하는 이 곡과 함께 2025년을 열고 싶다.

두오모

어느덧 17년째 서촌 효자동에서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 ‘두오모’.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허기가 느껴질 때마다 의식을 치르듯 찾아가는 곳이다. 배달 음식의 자극적인 맛과 향에 질리다 못해 경각심이 들 때, 두오모의 메뉴로 천천히 입맛을 깨우면 건강한 재료가 일상을 영위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새삼 깨닫는다. 새해 첫날의 점심으로는 두오모에서 매일 다르게 선보이는 ‘오늘의 메뉴’를 즐길 생각이다. 오늘의 메뉴는 전국 각지의 농장에서 수확한 신선한 재료들로 선보이는데, 색도, 형태도 저마다 다른 채소들을 눈으로 감상하며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고 싶다. 식사 후엔 인왕산의 산세와 경복궁의 고즈넉한 정취를 따라 서촌 일대에서 긴 산책을 이어갈 계획이다.

아트선재센터 <이끼바위쿠르르: 거꾸로 사는 돌>

《이끼바위쿠르르 거꾸로 사는 돌》 전시 전경

두오모에서 도보 30분 거리에 있는 아트선재센터에서 ‘미륵’을 주제로 한 전시 <이끼바위쿠 르르: 거꾸로 사는 돌>이 열리고 있다. 미륵불상은 과거에 고단한 현실에 지친 민중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던 존재였지만,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논밭이나 길가에 방치된 돌로 남게 됐다고 한다. 시각 연구 밴드 이끼바위쿠르르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미륵 석상을 찾아다니며 그 흔적을 기록해 영상과 설치, 평면 작업으로 풀어냈다. 전시장에서는 허름한 축사, 방치된 비닐하우스같이 쇠락한 마을 풍경 속 미륵의 모습을 원경으로 담은 영상 작업 <거꾸로 사는 돌>, 미륵을 실제 크기로 본떠 전시장 한가운데에 배치한 동명의 설치 작업을 만날 수 있다. 버려지고 잊혀졌기에 어쩌면 더 자유롭게 남아 있는 미륵. 늘 같은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미륵을 들여다보며, 이날만큼은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상에 잠시 제동을 걸고 느리게 흘러가는 자연의 속도로 살아보려 한다. 전시는 1월 26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add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87 instagram @artsonje_center

원오디너리맨션

새해를 핑계로 일상에 작은 변화를 주고 싶은데, 그건 바로 퇴근 후 책상 앞에 앉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녹초가 되어 흘러내리다 못해 누워서 타이핑을 하거나 책을 읽고, 일기를 쓰던 날들을 뒤로하고 이제는 책상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 한다. 이를 위해 오래도록 정을 붙이고 함께할 빈티지 의자 하나를 찾고 싶다. ‘좋은 의자’에 대한 기준이 전무한 나에게 원오디너리맨션의 큐레이션이 좋은 지침이 될 듯하다. 자곡동에 위치한 쇼룸에서는 가구의 역사, 제작 당시의 시대적 배경, 디자인 사조에 따른 특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오랜 세월 누군가의 손길을 거치며 그 자체로 특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가구들을 직접 눈에 담으며, 운명처럼 나만의 의자를 만날 수 있길 기대해본다.

add 서울시 강남구 자곡로7길 24 instagram @oneordinarymansion

임지은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새해 첫날은 작가 임지은의 글로 열고 싶다. 그 의 세 번째 산문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 하여>는 무언가 이유 없이 싫어지는 날마다 그 마음을 가만히 응시해온 이의 수고로운 기록이다. “크고 균질한 사랑이 대세이자 미덕”인 세상에서, 기어코 좋은 것의 뒷면을 들여다보게 되는 마음. 나 역시 자주 그런 마음이 되어버려서, 그런 스스로를 감당하기 곤란할 때마다 임지은의 문장을 찾게 된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가 내내 가장 아끼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자연스레 알게 된다. 싫어하는 마음은 그 사람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또 무엇을 지키고 싶어하는지를 설명해주기도 하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것, 욕망하는 것 앞에서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런 스스로가 “찌질하고 옹졸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 그 자명한 진실을 받아들이며 한 해를 시작하면 나를 조금 더 잘 견디게 되지 않을까 싶다.

10월 19일

지난해 <흑백요리사>와 드라마 <더 베어>를 연달아 보며 잠시 파인 다이닝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철저한 기준 아래 음식 한 그릇에 셰프의 미학과 창의성을 온전히 담아내는 모습이 어딘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더 베어> 속 레스토랑 한편에서 디저트 메뉴 개발에 몰두하는 캐릭터 ‘마커스’를 보며, 제대로 만든 파인 디저트를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찾은 곳이 ‘10월 19일’이다. 한식 레스토랑 ‘권숙수’의 디저트 셰프로 인연을 맺은 박지현·윤송이 파티시에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에서는 다양한 계절 식자재를 활용한 디저트 코스를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스위츠 플레이트로 눈과 입을 모두 만족시킨 뒤, 적당히 허기를 달래줄 세이보리 메뉴로 입가심을 해본다. 제주 황금향과 메로골드, 군고구마, 우엉 등 제철 과일과 뿌리채 소로 완성한 올해의 겨울 코스 메뉴를 맛보며 이 계절의 미식을 한껏 음미하고 싶다.

add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77길 43 1층 instagram @1019_seoul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자주 찾았다. <해피 아워>부터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쭉 훑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얼마간 그 세계 안에, 인물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으로 지내게 된다는 게 좋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중에서도 유독 긴 여운을 남긴 작품이다. 영화는 평화로운 도쿄 근교의 작은 산골 마을에 글램핑장을 건설하려는 도시 세력이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다. 자연의 대척점에서 그를 위협하는 존재인 인간, 선과 악의 경계, 사슴과 어린아이 ‘하나’ 의 생사. 다양한 상징의 의미를 헤아리며 감상하기에도 흥미롭지만,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이유는 풍경 과 음악 때문이다. 영화의 출발점이 된 이시바시 에이코의 깊은 현악기 선율이 층층이 쌓여 흐르는 가운데, 울창한 숲의 모습을 4분 동안 비추는 오프닝 장면을 시작으로 흰눈으로 뒤덮인 나가노현의 자연을 관조하듯 담아낸 장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 해를 여는 날에는 이처럼 모든 것을 압도하는 자연의 존재감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만 같다.

팀 밀런츠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은 어쩌면 삶에서 만난 작고 사소한 순간들일지 모른다. 짧은 분량의 소설로 삶의 본질에 관한 통찰을 그린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올겨울 관객과 만난다. 영화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 ‘빌 펄롱’(킬리언 머피)이 석탄 배달을 위해 들른 수녀원에서 우연히 불의를 목격한 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내리는 어떤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 속 어딘가 어긋남을 느끼던 펄롱은 선택의 기로에서 지금의 자신을 이루고 있는 ‘사소한 것들’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어준 사소한 친절, 말이나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던 다정함을. 끝내 자신 안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로 선택한 한 사람의 용기를, 그 굳건한 마음을 곱씹으며 새해를 열고 싶다.

포어포어포어

하루의 끝은 맛있는 술과 함께 마무리하고 싶다. 만리동 언덕길, 철물점과 금은방 사이에 덩그러니 자리한 와인 바 ‘포어포어포어’는 화이트 와인과 샴페인, 스페인 갈리시아(Galicia) 지역의 요리법을 활용한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건 바를 운영하는 서홍주 바텐더의 에세이 <위스키 위스키 간판이 없는 바의 새벽>을 읽고 나서다. 에세이에는 ‘간판이 없는 바’에서 위스키를 권하며 손님들과 나누던 대화와, 위스키 주종의 테이스팅 노트가 간결하면서도 재치 있게 담겼다. 포어포어포어에는 와인과 칵테일 리스트가 따로 없다는 점이 독특한데, 각자의 기호를 이야기하면 그에 맞는 주류를 제안해준다. 1월 1일에는 준마이 다이긴조에 은은한 차향이 더해진 사케 칵테일을 맛보고 싶다. 랍상소우총 특유의 부드럽고 따뜻한 훈연향이 긴 여운을 남기는 한잔으로, 저물어가는 밤의 아쉬움을 달래기에 적절한 선택이 될 것 같다.

add 서울시 용산구 만리재로 instagram 180-1 1층 @bar_pourpourpou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