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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고, 우리는 또 한 살씩 더 먹는다. 늙는 것은 당연히 우울한 일이라고? 이희경 작가도 그렇게 생각했다. 낙상 사고를 겪은 노년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막 살림을 합쳤을 때까지만 해도 정말 그랬다. 하지만 10년 간 돌봄이 이어지는 사이, 수많은 질문이 피어올랐다. “아픈 몸으로도 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듦과 죽음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그리고 물음들은 무려 기원전 290년경에 쓰인 책 <장자>에 나오는 ‘양생’이라는 키워드로 모여들었다.

‘한뼘 양생’ 저자 이희경. © 본인 제공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경기도 용인의 인문학 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공부하는 이희경입니다. 세미나 하고, 산책하고, 공동체 식탁에서 밥을 같이 지어 먹고, 작은 텃밭을 가꾸고, 사회적 연대활동도 합니다. 지난 16년간 문탁네트워크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공간을 비롯해 사람도, 활동도, 공부의 화두도 바꿔 왔는데요. 단순한 ‘살아남기’를 넘어 친구들과 함께 ‘살만한 삶’을 추구해 보자는 비전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기를 양’에 ‘날 생’. ‘삶을 기른다’라는 뜻의 ‘양생’은 원래 <장자>에 나오는 말이죠. ‘관리하기’와 ‘삶을 돌보고 가꾸기’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삶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허겁지겁 감추고, 몸의 리듬에서 질병을 완벽히 추방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한 상태'(세계보건기구)가 되는 것이 우리 사회가 정의하는 ‘건강’입니다. 그런데 ‘완전한 상태’가 되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요? 게다가 건강의 척도는 주로 전문가들에 의해 수치의 형태로 제시돼요. 우리는 불안한 마음과 사회적 낙인을 지우기 위해 ‘건강 수치’ 안에 들고자 ‘관리’에 돌입하죠. 사실 몸은 수치로 환원되지 않는데도요. 삶을 돌보고 가꾸는 일은 수치로 다 말할 수 없는, 몸과 연결된 일상·감정·이웃·기후 등을 이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정성을 다해 생로병사의 마디 마디를 겪어낸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좋은 삶은 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병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책의 제목이 <한뼘 양생>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한뼘’이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하하, 그걸 궁금해하는 분이 많아요. 심지어 책의 크기인가 싶어서 손으로 책 크기를 재보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저는 ‘양생’을 동시대의 맥락에서 다시 쓰고 싶었어요. 하염없이 ‘건강’을 외치느라 저만치 뒷전에 밀려난 질병, 나이듦, 죽음, 돌봄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써보고 싶었습니다. 십 년 동안 어머니를 돌본 경험이 출발점이 되었고요. 하지만 더 많은 디테일은 이제부터 채워나가야 해요. 앞으로 한뼘, 한뼘, 조금씩이라도 영역을 늘리고 채워나가고 싶습니다. 저와 주변 사람들의 작고 일상적인 경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양생에 관한 보편적인 담론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고 싶어요.

나의 몸은 내 것인 동시에, 언제나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노출된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몸을 보는 나의 시선과 타인의 시선을 구분하는 게 어렵게 느껴지기도 해요.
둘을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최근에 늙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어머니 돌보느라 힘들어서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이런 식으로 말하죠. 그럼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옵니다. 저도 모르게 비싼 화장품이나 콜라겐 식품 광고에 눈길이 머물기도 하죠. 여권 사진을 새로 찍으면서 절대 ‘뽀샵’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놓고는, 막상 아무 보정도 안 된 사진을 바라보면서 후회하기도 해요. 그러다가도 “아마 남은 인생 중 지금이 제일 젊을걸?”이라고 혼자 중얼거려 보고요.(웃음) 주체적으로 된다는 건, 타인의 시선까지 알아채면서 나의 몸과 끊임없이 협상하는 것 아닐까요?

특히 여성은 자기 몸과 더 자주 갈등하는 존재이기도 하죠.
그럴 수록 몸에 얽힌 각자의 경험과 감정을 나누는 게 중요해요. 문탁네트워크에서 4주짜리 완경기 세미나를 연 적이 있는데요.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개인의 감정과 관점이 교정되기도, 풍성해지기도 하더라고요. 감정의 기복을 의지로 극복하겠다던 사람은 호르몬의 물질적 영향력을 받아들였고, 우울증 약에 의존하고 있는 사람은 익숙하게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과 삶의 패턴을 바꿔야만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어요. 작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삶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멋진 경험이었어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직접 겪거나 보며 알게 된 나이듦에 관한 사실이 있다면요.
요즘 저와 제 친구들의 가장 큰 고민은 부모님 돌봄이에요. 저는 특히 ‘K-장녀’라는 개념에 꽂혔고요.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갑자기 부모 돌봄이 닥치고, 이 과제는 대부분 ‘K-장녀’들에게 주어지고 있거든요. 우리는 나이듦과 돌봄을 동시에 마주하는,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과제에 직면해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 살 더 먹었네”라는 문장은 왠지 슬픈 말투로 읽게 돼요. 생각해보면 나이 든다는 게 꼭 우울한 일만은 아닐 텐데도 말이에요.
나이가 드니 무릎도, 시력도 예전 같지 않고, 강의할 때 자꾸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거시기’로 퉁칠 때도 많아요. 이렇게 되자 저절로 삶의 속도가 느려졌어요. 그런데 속도가 느려지니까 보이지 않던 것이 많이 보이더군요. 최근에는 지체 장애인 배우가 나오는 <몬스터 콜>이라는 연극을 봤는데, 색다른 감응이 일더라고요. 새해 저의 과제 중의 하나가 수어를 배우는 건데요. 나이듦에 따른 몸의 손상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런 또 다른 세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뭔가를 새로 배울 수 있어서, 달리 말해 새로운 방식으로 쓸모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어서 노화가 가치 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많은 현대인이 그렇듯, 저 역시 몸이 아니라 정신, 이념, 의지가 나인 것처럼 살았어요. 몸이 나에게 협조하지 않는 순간이 벼락처럼 찾아온 이후에야 몸이 나라는 것을 깨달았죠. 최근에는 ‘몸의 일기’를 쓰고 있어요. 몸의 변화와 그에 대해 내가 느끼는 두려움, 그리고 잘난 척에 관해 씁니다. 매일 매일 내 몸과 경합하고, 복종하고, 분노하고, 화해하죠. 이게 제가 제 몸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에요.

어떤 할머니로 나이 들기를 꿈꾸시나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허리? (웃음) 저는 일흔 살이 되어도 청바지에 툭 걸친 카디건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는 영국 배우 샬럿 램플링을 좋아합니다. 주름은 막을 수 없지만 샬럿 램플링처럼 꼿꼿한 허리를 가진 할머니가 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에게 꼿꼿한 허리는 포기할 수 없는 스타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낙상하지 않을 수 있는 근력을 상징합니다. 점점 너그러워지되 마지막 순간까지 나만의 엣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새해를 맞아 또 한 살 나이 드는 우리 모두와 나누고 싶은 한마디가 있을까요?
나이를 먹을지 말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한 해 한 해 멋져지느냐, 후져지느냐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새해에는 조금 더 멋져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