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성별, 인종, 취향을 넘어 모두 함께. 호주의 애들레이드(Adelaide)가 품은 드넓은 세계를 프린지 페스티벌, 바다와 마켓, 그리고 도시 곳곳에서 만끽했다.






싱가포르를 경유해 애들레이드 공항에 당도할 때까지, 이 도시에 관한 그 무엇도 찾아보지 않았다. “이제 내가 호주로 가는 건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야. 아직 행복해지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호주에서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어.”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의 말처럼, 왠지 좋을 것 같다는 직감만 품은 채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그 직감이 확신이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샘 비행을 한 탓에 정신이 조금 몽롱한데도, 여전히 싸늘한 한국과 반대의 계절을 지나는 호주 특유의 따뜻한(애들레이드 사람들은 이상 기온으로 날이 무덥다며 걱정했지만, 습도가 매우 낮아 기분 좋은 열기에 가까웠다) 기운과 여유로운 분위기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첫 일정은 애들레이드 여행 하면 가장 먼저 언급된다는 와이너리 투어로 시작되었다. 호주의 와인 수도로 일컬어지는 애들레이드는 도심에서 차로 40~50분만 이동하면 곳곳에 근사한 와이너리가 자리 잡은 지역을 둘러볼 수 있는데, 최근 떠오르는 산지는 맥래런 베일(McLaren Vale)이다. 와이너리 80여 개가 드넓은 포도밭 사이사이에 자리한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큐브를 엇갈리게 쌓아놓은 듯 독특한 외관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다렌버그 큐브(d’Arenberg Cube)였다. 복잡하고 어려운 양조 과정이 큐브 맞추기와 닮았다는 데서 착안해 지었다는 건물은 외관만큼이나 내부 역시 독특한 공간 구성으로 눈길을 끈다. 와인 감미실부터 초현실주의 작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으로 채운 전시 공간, 와인을 테이스팅하면서 나만의 블렌딩 와인을 만들어보는 다이닝 룸까지, 와인을 주제로 한 관객 참여형 전시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맥래런 베일에서 와이너리 몇 곳을 다니며 오른 취기는 인접한 해변을 산책하며 가라앉혔다. 매슬린 비치(Maslin Beach)를 거쳐 모아나 비치(Moana Beach)까지, 눈부신 햇살과 푸른 바다가 자아내는 평화로운 기운을 담뿍 받고 있으려니 도착과 동시에 느껴지던 여유로운 분위기의 정체가 바다였구나 싶었다. 참고로 이 두 곳 이외에도 글레넬그 비치(Glenelg Beach), 헨리 비치(Henley Beach), 에뮤 베이(Emu Bay) 등 애들레이드는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갈망을 충족시켜줄 아름다운 해변이 산재한다. 차로 한 시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언제든지 빠져들 수 있는 바다가 곳곳에 있는 삶이라니, 새삼 애들레이드 사람들의 일상이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STAY & EAT
HOTEL
Adelaide Marriott Hotel
1백50년 역사를 품은 애들레이드 총우체국 건물을 20여 년간 세심히 개조해 지난해 문을 연 애들레이드 메리어트 호텔. 고풍스러운 외관은 그대로 보존한 채 내부만 현대적으로 디자인해 클래식과 모던이 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2백85개의 객실과 12개의 스위트룸으로 구성된 이 호텔은 도시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을 자랑한다.
위치 141 King William St., Adelaide SA 5000
INSTAGRAM @adelaidemarriott
RESTAURANT
Shobosho
일식과 한식, 홍콩식이 뒤섞인 다국적 메뉴를 선보이는 다이닝. 굴과 생선, 육류 등 호주에서 나는 식재료에 일본과 한국의 향신료를 더해 익숙한 듯 새로운 맛을 낸 음식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와인, 맥주, 사케, 칵테일 등 페어링할 주류 라인업도 퍽 다양하다.
위치 17 Leigh St., Adelaide SA 5000
INSTAGRAM @shobosho
CAFÉ
Mascavado Café & Pâtisserie
현지인에게 최근 가장 핫한 카페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마스카바두를 언급한다. 플랫화이트의 나라답게 커피 라인업이 훌륭한 건 물론이고, 다양한 식재료를 활용한 페이스트리와 샌드위치가 입맛을 자극한다. 과일, 견과류, 술, 향신료 등 계절마다 어울리는 새로운 재료로 선보이는 페이스트리 중 취향에 맞는 메뉴 하나쯤은 커피와 꼭 함께 맛보길 권한다.
위치 175 Hutt St., Adelaide SA 5000
인스타그램 @mascavado.adl




예술 안에서 어떤 경계도 없이 모두가 함께 즐기는 프린지 페스티벌의 장에 머물다 보니, 생경했던 이 도시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첫날이 애들레이드에서 가능한 가장 보통의 경험으로 채워졌다면, 둘째 날은 1년 중 이곳이 가장 뜨거워지는 특별한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2월 말부터 약 한 달간 열리는 남호주 최대의 예술 축제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Adelaide Fringe Festival)의 개막일이었기 때문이다. 규모가 가장 큰 ‘글러터니(Gluttony)’와 ‘가든 오브 언얼스리 딜라이트(The Garden of Unearthly Delights)’를 포함해 도시 전역의 5백여 개 베뉴에서 1천2백여 개의 콘서트, 연극, 뮤지컬, 서커스, 코미디쇼 등이 펼쳐지는 이 페스티벌은 매해 8천여 명의 예술가가 찾아와 자신들의 무대를 펼치고, 그 무대를 보기 위한 티켓이 1백만 장 이상 팔려나가며(무료로 즐기는 공연도 있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수의 관객이 유입되는 셈이다) 도시를 들끓게 한다. 프린지의 성지라 불리는 에든버러를 포함해 전 세계 모든 프린지 페스티벌이 작품과 예술가 선정이나 이에 대한 심사가 없는 자유 참가 원칙을 지키지만,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의 특별함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데에 있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한다는 원칙 아래 나이,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축제를 만들고 즐기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는 세심한 진행 방식은 이 페스티벌의 정체성이자 이 페스티벌이 전 세계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의 다양성은 무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서커스 쇼 ‘프라이멀(Primal)’은 익히 접해온 형태와 달리 남녀의 구분 없이, 오히려 기존 형태를 전복하는 데 가까운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유연성을 기반으로 한 퍼포먼스는 남성이, 힘을 기반으로 한 부분은 여성이 맡는 쇼가 이어지는 내내 묘한 쾌감으로 마음이 들떴다. 예술 안에서 어떤 경계도 없이 모두가 함께 즐기는 페스티벌의 장에 머물다 보니, 생경했던 이 도시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프린지 페스티벌 못지않게 이 도시가 추구하는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또 하나 있다. 남호주 최대 규모의 시장, 애들레이드 센트럴 마켓(Adelaide Central Market)이다. 매주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하는 마켓은 호주를 시작으로 한국, 일본, 튀르키예, 프랑스, 이탈리아, 레바논 등 상상을 뛰어넘는 다양한 국가의 식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점포 76개가 지붕을 맞대고 있다. 또 비건과 논비건 모두 풍요로운 미식 경험이 가능할 정도로 식재료 또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무엇보다 인상 깊은 점은 당일 판매하지 못한 음식은 노숙인에게 제공하며, 남은 식재료는 거름으로 활용하며 환경과 사람의 지속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방식이었다. 보다 건강하고 말끔하게, 보다 많은 문화를 품은 마켓의 방향성은 미식의 즐거움 외에도 사람과 자연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남겨주었다.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는 대개 일상의 나로부터 멀어진다는 데 있다. 그런데 이번 애들레이드 여행에서 만끽한 자유는 있는 그대로의 나여도 괜찮다는 깨달음에 있었다. 다양한 민족의 이주민이 모이면서 시작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출발점을 잊지 않고,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태도는 바다와 페스티벌, 마켓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보낸 온전한 나의 시간, 애들레이드에서 보낸 며칠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애들레이드로 가는 길
싱가포르항공이 인천-싱가포르, 싱가포르-애들레이드 간 노선을 매일 운항한다. 비행은 인천에서 싱가포르는 약 6시간, 싱가포르에서 애들레이드까지는 약 6시간 30분이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