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청춘이란 찰나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 영화, 음악,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저마다의 생에서 건져 올린,
불완전하게 반짝이는 청춘의 조각들.
애니 청의 사진

사진은 필연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찰나를 붙잡아두는 매체라는 사실이 슬프게 다가올 때가 있다. 내게 이 감각을 가장 또렷하게 일깨워주는 건 작가 애니 청의 사진이다.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면 만나본 적 없는 얼굴을, 겪어본 적 없는 순간을 자꾸만 그리워하게 된다. 재작년 겨울, 아름다운 가사 안에 담긴 뮤지션들의 이야기와 그의 사진을 나란히 실을 기회가 있었고, 우연한 계기로 직접 만난 작가에게 사진집을 선물 받았다. 그가 처음 사진을 찍기 시작한 2013년부터 10년 동안 그를 지나쳐간 사람들을 빼곡히 담아낸, 라는 제목의 사진집이었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한참을 울었다. 지나간 사람들과 지나간 어제를 잊고 싶지 않아서 카메라를 들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을 곱씹었다. 가족, 친구, 연인과의 가장 밀접했던 순간들, 셔터를 누르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던 것들이 그 안에 있었다. 그런 순간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필름에 남겨진 얼굴들, 그것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시선 속에 누군가의 지나간 청춘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롤러코스터 <일상다반사>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젊음을 품은 목소리가 있다. 내게는 조원선의 목소리가 그렇다. 스물다섯의 조원선이 지누, 이상순과 함께 이불로 방문을 틀어막고 집에서 완성했다는 롤러코스터의 2집 <일상다반사>에는 20대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유효한 노랫말이 담겨 있다. 팔천삼백구십오일째 내가 누군지 모르겠으니 그냥 좀 내버려 두라거나(‘가만히 두세요’), 아직 늦지 않았으니 꿈꾸던 삶을 살라거나(‘힘을 내요, 미스터 김’), 외롭고 힘든 길만 골라 달려도 그저 행복하다고 고백한다거나(‘Runner(Day By Day)’). 이 앨범을 꺼내 듣다 보면, 조원선이 남긴 노랫말대로 청춘을 살아보고 싶어진다.
영화 <리코리쉬 피자>

청춘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22년 겨울, 내 몸집만 한 이민 가방을 들고 아무런 연고도 없는 런던에 도착해 달스턴 곳곳을 누비던 날들. 하루는 숙소 근처 독립영화관 ‘리오 시네마’ 앞을 지나다 유리창에 적힌 ‘LICORICE PIZZA’라는 글자를 보고 홀린 듯이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러 들어갔다. 당시 개봉한 지 하루 지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이었다. 좌석이 10개 남짓한 비좁은 상영관에서 홀로 의자 깊숙이 파묻혀 화면 가득 펼쳐지는 캘리포니아의 여름 풍경을 눈에 담던 그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마침 영화는 어른이 되고 싶어 허둥대는 두 청춘의 이야기였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자신의 삶에 확신이 없는 채로 표류하듯 살아가는 스물다섯 여자 ‘알라나’, 물침대와 핀볼 게임장을 비롯해 온갖 사업을 벌이며 어른인 체하는 열다섯 살 소년 ‘게리’. 두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이끌리지만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 영화 내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인다. 그러다 그 유치한 싸움이 전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모든 걸 제쳐두고 전속력으로 서로를 향해 달려간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도, 청춘도 그 안에 있을 땐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아닐까 하고.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

가슴 뜨거워지는 낭만이나 열정 같은 것을 느껴보지 못한 채로 20대를 그저 흘려보내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럴 때마다 200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꺼내 보곤 하는데, <네 멋대로 해라>도 그중 하나다. 스무 편에 이르는 에피소드를 밤을 새워가며 단숨에 봤다. 시한부 삶, 출생의 비밀, 삼각관계…. 아침 드라마에서 볼 법한 소재가 뒤섞인 이 드라마가 유독 새롭게 다가왔던 이유는, 작품 속 인물들이 정직하게 사랑하고, 또 살아가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를 일삼으며 인생을 낭비하던 ‘고복수’(양동근), 아버지의 반대에도 인디 밴드의 키보디스트로 살아가는 ‘전경’(이나영), 복수의 오랜 연인 ‘송미래’(공효진). 명쾌한 것 하나 없는 세상에서, 세 사람은 오로지 지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제 멋대로’ 나아간다. “좋아해도… 되나요?”라며 경이 고백하자 공중제비를 돌며 온몸으로 기뻐하는 복수, “살 때 죽어 있지 말고, 죽을 때 살아 있지 말”라던 경, 사랑이란 무엇이고 믿음이란 무엇인지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 미래. 그저 지금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 울고, 웃고, 부딪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내게는 여전히 가장 이상적인 청춘의 얼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