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율, 인습, 전통 등 해묵은 관념을 가뿐히 뛰어넘는 초월적 가족의 초상. 세 가족이 말하는 새 가족의 정의.

모두라는 가족

편지지, 전범선

동물 해방을 위한 행진 자리에서 처음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한 달여 만에 동거하는 사이가 되었다. 3년간의 교제와 ‘건강한 이별’ 이후, 10초면 닿을 수 있는 옆옆 건물에 살면서 강아지 ‘왕손이’를 함께 기르고 있다. 관계의 모양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식사를 같이 하고 서로의 일을 도우면서 ‘한솥밥’을 먹는 중이다. 비혼과 사랑, 결혼과 출산, 동물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고민해온 이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확장해온 가족의 의미.

두 분이 이룬 가족에 대한 소개부터 듣고 싶습니다.

전범선 저랑 지지의 생각이 비슷할 수도, 다를 수도 있는데….
편지지 왜? 말해봐.(웃음)
전범선 가족은 기본적으로 혈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한집살이를 전제로 하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가족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전적 의미의 가족보다는 식구에 가깝죠. 함께 밥 먹는 사이. 물론 밴드 ‘양반들’의 동료, 동물권 보호 단체 ‘동물해방물결’ 동지들도 같이 요리하고 밥 해먹는 식구이긴 하죠. 그런데 제가 지지나 왕손이한테 느끼는 감정은 좀 달라요.
편지지 범선과 한동네에서 왕손이를 함께 키우면서 가족 같은 형태의 삶을 꾸려가고 있거든요. 동지 또는 친구로서의 가족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전범선 벗님.(웃음)

두 분의 관계가 바뀌면서 서로를 대하는 마음에 달라진 점이 있나요?

전범선 크게 다른 건 없어요. 더 이상 같이 잠을 자지 않고, 같은 집에 살지 않는 정도일 뿐 인간적으로는 여전히 절친해요.
편지지 보편적인 연인의 감정을 더 이상 느끼지 않지만, 다른 형태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전범선 관계가 한층 성숙해진 거죠.

연인이 헤어진 후에도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흔치 않잖아요. 그럼에도 두 사람을 일종의 가족이라 말할 정도로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편지지 우선 왕손이를 공동 육아한다는 점이 크고요.(웃음) 3년 동안 지지고 볶으면서 삶을 공유했고, 아주 긴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전범선 연인이었을 때도 ‘영원히 너와 함께할 거야’, ‘결혼하고 아이도 키우자’ 하는 생각은 없었어요.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두는 것이 사랑의 본질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한 사람이 자아를 찾아가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서로 도와주면서 함께 진화하는 관계예요. 이런 면에서는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라고 볼 수 있죠.

두 분을 향한 주변의 반응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요?

편지지 “나 엑스(ex)랑 같이 일해”, “우리 베프야”라고 말하면 놀라는 사람이 종종 있어요. 개방적인 성향을 가진 친구들조차도요.
전범선 대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해괴망측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전 애인이랑 가깝게 지내지? 난 절대 그렇게 못 해” 하면서. 가끔은 ‘내가 진짜 이상한 건가?’ 싶기도 한데,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반적인 편견이고, 바꾸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애인이랑 헤어지면서 서로 싫어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들도 있을 테고요.
편지지 연인의 이별은 대부분 갈등에서 비롯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감정이 분노나 증오에 머무르기 쉽고, 상대를 용서하지 못한 채 완전히 남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별을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이전 연애를 통해 생긴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범선과 건강한 이별을 겪으면서 마음이 많이 치유됐어요. 그래서 고맙기도 해요.(웃음)

이 관계의 소중함을 느낀 순간이 있다면요?

전범선 지지가 울면서 전화할 때.
편지지 딱 한 번 그랬거든!
전범선 한 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웃음) 아무튼 그럴 때 지지가 나를 의지하는구나, 나도 지지를 믿을 수 있겠구나 싶어요. 내 편이라는 생각도 들고.
편지지 저도 그래요.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범선한테 말하고 싶더라고요.
전범선 나한테 맨날 DM으로 밈 같은 것들 보내잖아.(웃음) 재미있으니까 공유하고 싶은 거겠죠.

비혼을 지향하는 커플로 알려졌지만, 관계에 변화가 생긴 지금은 비혼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편지지 지금의 저를 비혼주의자라고 하는 건 조금 부담스러워요. 범선과 함께 에세이 <비혼이고요 비건입니다>를 내고 나서 ‘너무 섣불렀나? 이제 평생 결혼 못 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책 제목은 출판사의 아이디어였어요. 그렇다고 지금 결혼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에요. 결혼의 필요성을 아직은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전범선 저도요. 결혼은 곧 양가의 결합이잖아요. 그 결합이 법으로 보장되고, 경제적인 부분과도 이어지고요. 그걸 지나치게 중시하면 제도나 시스템에 갇히기 쉬운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이라는 결혼의 의미에 충실하지 못할 수도 있고요.
편지지 그런데 언젠가 제게 출산할 의사가 생기면 결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전범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주변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본인 삶이 사라졌지만 그만한 즐거움이 없대요. 자식이 생기고 씨족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결혼 제도가 유효하다고 봐요. 제가 가족 안에서 심리적 안정과 혜택을 누리면서 자랐듯, 만약 저한테 자녀가 생긴다면 최소한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가정을 유지하고 싶어요. 그게 의무는 아니지만, 도리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임신할 짝꿍의 의사가 중요하니 저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죠.

결혼과 출산은 여전히 함께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하죠.

편지지 사실혼이 법적으로 충분히 인정받고 보호받는다면 출산 계획이 있더라도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에 지인들이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프랑스인과 네덜란드인 커플이 3~4년 만나다가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기 위해 준비 중인데, 결혼은 안 할 거래요. 이유를 물어보니 프랑스에서 온 친구가 이렇게 말했대요. “내 부모님도 결혼 안 했고, 나 또한 굳이 결혼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전범선 맞아. 프랑스에 그런 사람이 많더라.
편지지 그 정도로 유럽에서는 사실혼이 흔한 일이고, 관련 제도 도 잘 갖춰져 있다고 해요. 영어에 ‘비혼’을 번역할 단어도 마땅히 없더라고요.

편지지 원피스 YCH, 실버 뱅글 COS, 롱 부츠 Ferragamo.
전범선 슬리브리스 톱 Recto, 팬츠와 부츠 모두 Ordinary People, 네크리스 KARPNIBU,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비혼을 지향하는 커플, 퀴어 가족, 딩크족 부부를 비롯한 2인 가구 형태가 점점 다양해지는 것 같아요. 자녀가 아닌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경우도 많고요.

편지지 그렇죠. 하지만 시간 여유가 없거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반려동물과 함께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요.
전범선 사실 왕손이는 제가 스무 살 때 만나던 애인이 ‘사준’ 강아지예요. 당시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거든요. 강아지 아빠가 될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로, 이 친구를 약 20년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없이 “쟤 귀엽다!” 하면서 데려와버린 거죠. 그래서 왕손이를 보면서 가장 크게 느끼는 감정이 미안함이에요. 일종의 죄의식.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왕손이를 남산에 풀어주면 스스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우리 곁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돌보는 거죠.
편지지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돼요. 열악한 환경에 처한 친구를 데려와 키우는 건 훌륭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반려동물을 소유하거나 입양한다는 개념을 지지하진 않아요. 원래 반려동물을 키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강아지가 있는 사람과 연인이 되는 바람에…(웃음) 그런데 왕손이를 키우면서 제 안에 모성애가 피어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출산과 육아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뀔 정도로.
전범선 전 왕손이를 통해 큰 행복과 배움을 얻고 있어요. 현재 민법상 동물이 ‘물건’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동물을 도구나 수단이 아닌 식구로 여기면 서로에게 아름다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동물을 식구로 맞이하는 경우처럼, 가족의 범위가 확장하고 있다는 데 동의하나요?

전범선 네. 기성 가족만이 유효한 시기는 이미 지나지 않았나 싶어요. 앞으로는 가족보다 부족 같은 형태가 더 중요한 시대가 올 거라고 생각해요. 공통의 이념이나 관심사, 삶의 방식 등에 따라 집단을 이루는 거죠. 하나의 공동체에 정주하지 않고, 유목민처럼 여기저기 계속 옮겨다니면서요. 결혼 생활을 하다가 60대쯤 졸혼하는 사례도 그 일환일 수 있겠죠. 또 1980~2000년 사이에 태어난 우리 세대를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부르는 만큼, 소셜미디어나 커뮤니티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도 늘어날 거라고 봐요. 친척보다 인스타그램 속 사람들을 더 가깝게 느끼는 시대니까요.
편지지 피를 나누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가족을 이룰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더 넓게 보면 인류는 하나의 조상에서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유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어요.
전범선 그런 관점에서는 지지도, 에디터님도 제 가족인 거죠.(웃음)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왕손이도, 흙으로 빚은 잔이랑 그 안에 담긴 물조차도 우리와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결국 만물이 한 가족인 거죠. 지구가 모두의 유일한 집이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편지지 모두를 가족의 구성원으로 대하면서 살면 많은 게 편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맞아요. 서로를 가족으로 여기다 보면,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가족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전범선 음…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안 했네요.(웃음) 엄마, 사랑해!
편지지 저도 사랑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