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움’과 ‘세련됨’은 공존할 수 있을까?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메시지가 쏟아지는 세상에서, 나다운 삶을 찬미하고 그에 대한 감사를 브랜드로 구현하고 있는 사람. 파리를 대표하는 편집숍 메르시(MERCI)의 CEO, 아서 게르비(Arthur Gerbi)와 나눈 이야기.

메르시 CEO 아서 게르비. © Merci

‘메르시’는 프랑스 파리의 명소 중 하나죠.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이 이름을 낯설게 느끼는 분도 많을 것 같아요. 메르시는 어떤 브랜드인가요?

인류학자 같은 브랜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도시 지역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관찰하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하기도 하고요. 그런 점에서는 개척자나 저널리스트 같기도 하네요. 결국 메르시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기에 관한 다양한 생각과 콘텐츠를 다루는 브랜드예요.

또 ‘메르시’는 프랑스어로 ‘감사하다’라는 뜻이잖아요. 삶에 감사하고, ‘아르 드 비브르(art de vivre, 삶의 예술)’를 통해 삶을 기념하자는 의미도 담았죠. 그래서 우리를 둘러싼 물건에 우리의 에너지를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합니다. 굉장히 프랑스다운 얘기인 동시에, 아시아와도 공명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명상과도 긴밀하게 맞닿아 있거든요.

그렇다면 구체적인 물건들을 선택하는 기준도 궁금한데요. 메르시에게 ‘좋은 물건’이란 무엇인가요?

행복해지려면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 당신과 있을 때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물건을 주변에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모든 것을 다 구매하세요!”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고요.(웃음) 메르시는 사람들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거야. 입고 싶은 것을 나답게 입고, 나와 같은 모습으로 집을 꾸밀 거야” 하도록 북돋고 싶어요. 가장 비싼 디자이너 의자에 앉는다고 ‘아르 드 비브르’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외려 벼룩시장에서 산 의자에 앉을 때나 할머니 댁에서 못생긴 머그컵에 핫초콜릿을 담아 마실 때 더 가까워질 수 있죠. 중요한 건 이야기입니다. 이 물건은 얼마나 강력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가? 그래서 당신과 얼마나 단단히 엮여 있는가?

메르시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보고, 내 주변에 어떤 물건을 둘지에 관한 주도권을 쥐여주고자 해요. 그럼으로써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하고요. 지금은 새로움이 독재하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새로운 것’은 늘 등장하고, 다들 그것에 관해 이야기하니까요. 하지만 메르시는 유행을 넘어 변하지 않는 것(timelessness)을 믿어요. 예컨대 파란색이 유행한다면, 우리 매장에도 파랑을 조금 더해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전체를 파랗게 칠하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유행은 흥미로운 것이지만, 가장 재밌는 건 그 속에서도 우리가 나다움을 잃지 않는 모습이에요.

하지만 우리 삶의 기쁨이 모두 소비로 환원될 수는 없잖아요. ‘돈으로 살 수 없는 행복’에 관한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그럼요. 사실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물건이 아닌걸요. 저는 이렇게 유통업계에서 일하고 있고, 아내는 TV 산업에 종사하는데요. 노르망디에 있는 저희 별장 이름이 ‘프라임 타임(Prime Time, 미디어 시·청취율이 가장 높은 황금시간대)’이에요.(웃음) 그곳에서의 시간이 가장 값지다는 의미죠. 딸이 그린 현판도 걸어뒀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다만, 제가 모든 걸 메르시의 관점에서 얘기하려는 건 아니지만, 당신과 닮은 맥락 속에서 이런 시간을 보낸다면 더 큰 가치를 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메르시는 하나의 브랜드인 동시에 공간이기도 하죠. 공간으로서의 메르시는 어떤 의미이기를 바라나요?

동화 <골디락스와 곰 세 마리>를 아시나요? 골디락스라는 소녀가 곰 가족이 잠시 외출한 사이 이들의 오두막에 들어가는 얘기잖아요. 메르시도 이런 느낌이었으면 해요. 딱 들어섰을 때, 누군가 방금까지 있다가 자리를 비운 집에 온 듯한 느낌을 주고 싶어요. 최근 시장의 요약본이 아니라 누군가의 취향과 선택이 모여 만든 집 같은 곳을 만들고 싶은 거죠.

만약 한국에 메르시의 공간을 만든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요?

한국을 중요하게 생각해 오기는 했지만, 아직 그 단계까지 가지는 못했어요.(웃음) 그렇지만 뭐든 놀랄 만한 것이어야겠죠. ‘와, 이런 방식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하는 느낌을 줘야 할 것 같아요.

한국 시장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에 깃든 창의성과 서울이라는 도시의 에너지를 사랑해요. 앞서 말했듯이 메르시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시아와 통하는 면이 많기도 하고요. 우리 집이 좋은 에너지로 채워지고 있는지,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하면 더 낫게 만들 수 있을지 묻는 일 같은 것들이요. 메르시와 서울은… 마치 같은 재료로 만든 두 가지 요리 같달까요. 일시적인 형태든, 좀 더 장기적인 형태든 무언가를 아주 ‘서울답게’ 해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다양한 브랜드와의 협업도 자주 선보이던데요. 어떤 기준으로 함께할 브랜드를 선택하는지 궁금합니다.

메르시는 사람과 협업해요. 브랜드가 아니라요. 가장 먼저 그 브랜드 안의 사람을 보고, 우리가 같은 창의성과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미국 LA 지역의 하이엔드 슈퍼마켓 에레혼(EREWHON)과의 협업도 그렇게 결정됐죠. 에레혼과 메르시가 각각 LA와 파리 정신을 충실하게 상징한다는 점이 재밌게 다가왔거든요. 칼하트(CARHARTT)와도 협업했어요. 칼하트는 워크웨어를 만드는데, 메르시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워크웨어를 다뤄왔다는 공통점이 있었죠.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구체적인 요인 하나가 협업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줄 이들을 찾는 거거든요. 스파링 파트너처럼요.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상대 말이죠.(웃음) 그게 우리가 좋아하는 일이에요.

최근 파리에서 메르시의 두 번째 스토어, ‘메르시 #2’가 문을 열었어요. 확장을 결정한 계기가 있나요?

저희는 프로젝트 중심으로 움직이는 조직이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스토어를 내기 위한 비즈니스 계획을 따로 세워두지는 않았는데요.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서 이 장소를 발견했어요. 원래 상점이 아니라, 우체국 건물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여기를 우리가 채워 보면 재밌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죠. 공간이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구조라, 가정집 같은 느낌의 첫 번째 메르시 스토어보다 더 로프트(loft)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지금의 메르시가 어떤지를 더 잘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요. 물론 저희는 시대를 뛰어넘는 가치를 추구하지만, 처음 메르시를 만든 게 2009년이니까요. 모두가 그렇듯 메르시도 그사이에 많은 진화를 거듭했거든요. 새로운 취향, 새롭게 함께하고 싶은 아티스트… 이런 것들을 두 번째 스토어에 녹였어요.

‘메르시’라는 이름이 어떤 의미로 받아 들여졌으면 하나요?

‘아르 드 비브르’, ‘개인적인’, 그리고 ‘파리지앵’이요. 무엇보다 ‘나로부터 나온 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기를 바라요. ‘파리지앵’이라는 키워드를 언급했지만, 그조차도 파리지앵이 느끼기에 ‘파리지앵다운 것’이어야 해요. 타자화된 방식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으로요.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의 정체성 사이에서 통일감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