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 기꺼이 타인을 껴안는 시편들. 여름에 읽고 싶은 세 권의 시집.
기억 몸짓, 안태운

“여름 표정이 되는 사람아.
여름 몸짓이 되는 사람아.
여름 풀벌레와 여름 야시장이 되는 사람아.
그렇게 여름이 되어 있는 사람이므로
너는 여름 목소리를 내어 나를 부를 것 같네.” (‘여름에 어올리는 옷 사람’)
가벼운 옷을 걸치고 걷고 싶은 계절, 여름. 안태운 시인의 <기억 몸짓>은 무더위와 장마철 앞에서 자꾸만 들여다 보고 싶은 시집이다. ‘보슬비가 내리는 숲(‘경주’), ‘서로의 언어를 더듬는 불광천(‘불광천, 여름’), ‘비의 물갈퀴와 비의 지느러미를 따라 가는 공간’(‘빗소리’)까지. 안태운 시인은 특유의 리듬감으로 눈 앞의 풍경을 바라보고 또 생각나는 것을 따라 유영한다. 그렇게 흐르고 또 흐르다 “너는 누구인가요.(…) 나는 닿을 수 있나요. 일기에 무엇을 적었습니까. 나는 들여다보려다가 머뭇거렸습니다. 이윽고 손대자 나는 퍼져나갔죠.”(‘문득 그 계절이 되는’)라며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며 다음 걸음으로 나아간다. <기억 몸짓>은 계절의 일상적인 풍경 아래에서 산책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여기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문득 낯설어하며 / 주위를 둘러”(‘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보게 한다.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이기리

“미끄러운 너의 이름을 걷다 내밀어주는 두 손 잡고
우리의 사랑이 엉키고 나약해지는 춤 기꺼이 추겠어” (‘유력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다. 언젠가는 변할 사랑을, 당신과 나의 부딪힘을, 결코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인지하면서도 끝내 사랑하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이기리의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는 “해가 쨍쨍히 내리쬐는”(‘아파스트로피’) 눈부신 여름 풍광 앞에서 “젖은 풍경은 / 햇볓에 잘 말리”(‘극세사’)고 다시 당신에게로 다가가겠다고 말한다. “이 모든 불안과 환희를 다짐하고, 우리가 우리로서 걸어나가도 좋았을 텐데(‘만약 이루어졌을 세계였어도’)”라며 그리움을 드러내다가도 “사랑한다는 건 기어이 끝장내겠다는 것 전쟁하겠다는 것 안일은 나날을 등지고 폐허를 개척하겠다는 것”(‘갈변하는 과일 속 안온함)이라고 말한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도 당신의 땀방울을 닦아내려는 소중한 마음이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에 담겨 있다.
여름 키코, 주하림

“나는 이제 살길을 행복하게 갈구할 거야
역경이 오면 그땐 다시 떠돌이 개처럼 뜨거운 침을 흘리며 잠깐 경련하겠지만
그전까지 나는 모든 행복한 시간을 통틀어
그것을 전부 가지고 있는 여름이 되어 있을 테니” (‘천엽볒꽃’)
주하림 시인의 <여름 키코>에 담긴 여름 풍광은 마냥 찬란하지만은 않다. “끈적거리는 피의 해변(‘여름 키코’)이나 “부여받았던 생기와 정열 향기를 모조리 빼앗기고 말라비틀어진 과일(‘컬렐 부인, 끝나지 않는 여름밤 강가에서’) 같은, 기괴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을 지닌 계절이 담겨 있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 아래에서 고독과 우울은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부서진 날짜, 굳어가는 우유, 굵고 짧은 밧줄”(‘블랙 파라다이스 로리’), “의자에 쌓인 머리카락 / 어둠에 시든 과일”(‘비 오는 동유럽, 신체의 방’)과 같은 부패한 이미지는 분열되고 파편화된 자아를 그려내기도 한다. 동시에 시인은 선언한다.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다 어둡고 아름다운 것들을 믿어왔던 일을”(‘모티바숑 motivation’)이라고. 고통과 무력감을 발화하는 것은 결코 포기가 아닌, 능동적인 저항임을 말하는 시편들이 <여름 키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