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현실 곳곳에 피어 오르는 온기는 때로는 절절한 그리움과 슬픔이 되고, 때로는 연대가 되어 서로를 위로한다.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마음을 그린 국내 신작 소설 세 권과 그 안에 담긴 작가의 다정한 시선을 소개한다.
이주란 외 5인, 《2025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겨울정원》

“또 난 살면서 몇 번이나 울었나 무엇이 나란 사람을 울리나 오늘 하루가 왜 끝나질 않지 해가 길구나 시간이 다르게 흐르네. 그런 생각을 했다. 깜깜한 밤에 좁은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을 땐 앞으로는 나란히 누울 일이 없겠다 그런 생각을.”
김유정 문학상 올해의 수상작인 이주란 작가의 <겨울 정원>은 예순 살 ‘혜숙’의 일상을 그린다. 혜숙은 오피스텔을 청소하는 일을 한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그들의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건물 곳곳을 청소하고, 돌아와서는 밥을 먹고, 티비를 보다 잠이 든다. 단순한 그의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건 딸 ‘미래’다. MBTI부터 쿠팡 새벽 배송, 영화와 연애까지 재잘재잘 떠드는 미래 덕에 혜숙은 요즘 세상의 이야기를 엷게나마 전해 듣는다. 단순해 보이는 그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마냥 잔잔하지만은 않다. 청소업체와 건물 관리인 간의 소소한 문제도 발생하고, 무례한 사람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는 혜숙의 일상에 작은 틈을 만들 뿐, 그의 하루는 늘 그랬듯이 흘러간다. 덜컥 예상치 못한 사랑이 찾아오기도 한다. 큰글자도서 모임에서 한 남자를 만난 후, 혜숙은 사랑에 대한 기대가 무뎌졌던 지난 시간을 뒤로 제쳐보기로 한다. 경험할 만큼 해본, 혜숙쯤 되는 나이의 사람은 시작에 앞서 결말도 예측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사랑 후에 남은 그리움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혜숙의 삶은 또 살아진다. 어떤 수치와 모욕이 침입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누구도 탓하지 않은 채 그저 담담하게 살아가는 혜숙을 보며 그의 지난 삶 속에 자리했을 크고 작은 슬픔을 헤아린다. 그리고 문득 차오르는 슬픔과 그리움을 견디는 이들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아니, 그 겨울이 빨리 지나가고 어서 봄이 오길 바라게 된다.
“이 사람(혜숙)은 너무 많이 슬퍼본 적이 있기에 많이 슬프지 않고 조금 슬픈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이고, (···) 소소하게 기쁜 날들을 보내는 평범한 사람이다. 이 소설을 쓸 때 나는 그런 사람의 작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그리움에 대해 생각했다. 작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꽉 찬 사랑, 그러나 다른 사람이 보면 ‘너무 작은데’라고 할 것만 같은, 그런 사랑과 여전한 그리움 말이다. 누군가 조금 슬프다고 말할 때는 분명 어떤 류의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 작가 수상 소감 중
정이현, 《노 피플 존》

“어떤 경우에도 나는 환자에게 괜찮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 사이에서 적절하게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이 이 직업에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도 몰랐다.”
정이현 작가의 소설집 《노 피플 존》은 혼자 있고 싶지만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려운, 이 시대의 모순된 심리를 포착한다. <실패담 크루>의 ‘나’는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사회 초년생의 허무를 경험하고, <언니>의 화자는 불안정한 청춘에 힘의 불균형을 마주한다. 병원의 경쟁 구조 속에서 ‘선(善)’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선의 감정>, 고용과 돌봄의 관계 속에서 점점 지쳐가는 여성의 얼굴을 비춘 <이모에 관하여>, 그리고 돌봄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노동의 현실과 그 안에서 놀이교사 ‘한나’가 경험하는 감정을 그린 표제작 <단 하나의 아이>를 비롯한 아홉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삶의 풍파를 견뎌내며 상처받고,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각기 다른 세대와 계층의 인물들을 통해 사회구조의 보이지 않는 선과 틈새를 속속들이 묘사한 이야기 안에는 인물들의 냉소와 체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노 피플 존’은 결국 모두의 세계 속에서 각자가 지키고자 하는 작은 방임을 깨닫게 된다. 차가운 현실의 단면을 응시하면서도, 그 틈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서로의 체온 덕에 인물들은 각자의 선 밖으로 한 발 내딛으며 연대의 가능성을 붙잡는다.
“저는 오늘도 수많은 모순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혼자 있기를 간절하게 바라지만 또 완전히 혼자이고 싶지만은 않은, 선택적 고립의 욕망도 거기 속할 것입니다. 제 안과 밖의 모순과 욕망들을 오래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멈추지 않고 썼습니다.”
– 작가의 말 중
박지영,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

“어느 날은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 라고 적었다. 어느 날은 남기고 싶은 기억이 하나도 없다, 라고 적었다. 어느 날은 기억되고 싶지 않다, 라고 적었다가 다음 날은 기억되고 싶다, 라고 적었다. 그렇게 기억 예치소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글들을 적는 기억이 매일 하나씩 쌓여갈 무렵, 승혜는 다른 노인들이 남기는 가장 예쁜 기억들이 대부분 한 사람을 향한 편지나 사랑의 말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박지영 작가의 단편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는 다음 생에서 살아갈 모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생애전환 시행령’이 국민 법안으로 채택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국민은 66세가 되면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고, 주인공 ‘승혜’가 갖게 된 생은 한 ‘타자기’로서의 삶이다. ‘기억 예치소’라는 이름의 빈티지 샵에 놓인 승혜는 그곳의 알바생이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한 구절을 타이핑 해 붙인 뒤로 줄곧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라 불린다. 부랑자의 삶을 전전하며 하류 인생을 노래하던 찰스 부코스키의 삶과 연고 없이 늙어갈 일만 남았던 승혜의 인생은 그렇게 겹쳐진다.
손님들은 승혜 앞에 앉아 조용히 품어둔 기억을 꺼내두었다. 감사한 마음을, 오래 품어온 고백을, 그리움을, 때론 고통스러운 기억을 담은 수많은 문장들이 승혜를 거쳐갔다. 타자기로 사는 삶은 말하기보다는 듣는 삶이었고 다가가기보다는 기다리는 삶이었다. 승혜는 그런 타자기의 생을 어느덧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타자기로 사는 데에도 수명이 있어, 승혜는 자주 아프고 열에 시달린다. 몇몇 키는 뻑뻑해지고, 오타도 잦아지며 승혜를 찾는 사람은 점점 드물어진다.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진 승혜는 이제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늙어가고, 기억을 잃어가는 순간에 발현되는 건 기록하고 싶고,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다. 자신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음을 직감하는 이의 간절한 욕망은 승혜가 마지막으로 건네고 싶은 한 문장으로 남아 나지막이 울린다.
“아버지가 말의 기억을 잃어갈 때, 나는 자주 궁금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말들은 모두 어디로 가나. (···) 당신,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그 말을 잃었을 때, 나는 먼저 가 있던 그 말이 뒤늦게 온 아버지를 따뜻하게 환대해주는 상상을 했다. (···) 왜인지 그 시기에 나 역시 많은 말들을 잃었는데, 내가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건 그 말들을 붙잡고 싶어서였다. 다시 되찾을 수 없다면 최소한 내가 잃어버릴 말의 순서는 정하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끝까지 붙들고 싶은 말, 그건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기억의 언어이기도 했다.”
– 작가의 말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