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세계와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마주하는 것은 자유일까, 두려움일까.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희곡 <노베첸토>는 평생 육지에 발 딛지 않은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로 작은 세계에 머무는 용기를 비춘다. 그 안의 고독과 충만함은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이어져 유려한 선율과 함께 여운을 남긴다.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지구 반대편에 이를 수 있고, 심지어 직접 가지 않아도 SNS를 통해 전 세계와 연결될 수 있는 시대. 무언가를 보게 되고 알게 될 수록 어느새 계속 더 나은, 더 높은, 더 많은 것을 좇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서 요즘은 두렵다.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알레산드로 바리코는 평생 배 위에서 살아간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그린 희곡 <노베첸토>로 그런 두려움에 답한다. 그리고 주세페 토르나토레는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그의 문장에 깃든 멜로디와 리듬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로 완성하며 감동과 울림을 더한다.


1900년 1월 1일, 미국으로 향하는 호화 유람선 버지니아호에서 버려진 아기가 발견된다. 아기를 발견한 인부는 그에게 20세기를 뜻하는 ‘노베첸토’란 이름을 지어준다. (영화에서는 ‘나인틴 헌드레드’라 불린다.) 이후 그는 피아노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배 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을 깊이 바라보고, 귀 기울여 듣고,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감정까지 건반 위에 옮긴다. 더 높고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작은 세계를 보다 깊게 감각하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눈 속에서, 누군가의 말 속에서 실제로 그는 그런 공기를 들이마신 것이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진짜로. (…) 그리고 그는 이런 면에서 두말할 필요 없는 천재였다. 들을 줄 알았고 읽을 줄 알았다. 책이 아니라 사람을. 그는 사람들을, 그들이 가진 흔적, 장소, 소리, 냄새, 그들의 땅,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줄 알았다.”

노베첸토의 독보적인 연주는 곧 육지에까지 알려진다. 재즈의 창시자라 불리는 이가 찾아와 대결을 신청하기도, 음반 판매를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육지에 발을 딛지 않는다. 88개의 건반으로 연주하는 무한한 음악,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했기에.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라는 친구에게 그는 말한다. “매 걸음, 나는 욕망에게 작별인사를 했어.”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함이 선명하게 빛난다. 그의 선택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지킬 수 있는 세계에 대한 확신이자 고독을 감내하겠다는 의지였다.
“난 이렇게 사는 법을 배웠어. 내게 육지는 너무나 큰 배야. 어마어마하게 긴 여행이야.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야. 너무나 강렬한 향기야.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11월 26일,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재개봉을 앞두고 <노베첸토>를 펼쳐보는 일은 특별하다. 91페이지 남짓의 희곡에 담긴 감동적인 스토리 위에 주세페 토르나토레는 빛과 음악, 배우의 연기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노베첸토의 세계를 다층적으로 쌓아 올린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피아노 연주를 묘사한 문장은 영화에서 황금빛 버지니아 호를 누비는 나인틴 헌드레드와 자유로운 음악을 비추며 그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을 체험하게 한다. 이후, 한 여인을 바라보며 연주하는 팀 로스의 순수한 눈빛과 떨리는 손끝은 사랑에 빠진 순간을 아름답게 비춘다. 문장을 읽으며 상상하던 세계가 스크린 위에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 노베첸토가 작은 세계에서 경험한 고독과 충만은 보다 진한 잔상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