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희미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음을 데운다.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과 영화, 음악, 사진을 모았다.
우리의 겨울이 보다 따뜻하길 바라며.


강미자 <봄밤>

(주)시네마 달

몇 달 전, 혼자 한 독립영화관을 찾아가 강미자 감독의 <봄밤>을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권여선 작가가 쓴 동명의 단편소설을 기반으로, 이혼과 아이와의 이별 후 알코올중독에 빠진 ‘영경’과 빚을 떠안은 채 류머티즘을 앓는 ‘수환’의 사랑을 그린 영화. 12년의 서사를 밀도 있게 담아내며, 인물의 감정을 시적인 장면들로 엮어낸 이 작품을 보면서 곁을 지켜주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모든 것을 잃고, 극도의 외로움과 두려움에 침잠된 상태로 만난 이들은 서로의 상처를 애써 감추거나 보듬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상대의 고통을 가만히 응시하며 함께 아파하는 것. 하나의 인격체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힘겨운 시간을 같이 견뎌내는 일. 그 애틋하고도 처참한, 예견된 불행 속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끌어안는 두 사람의 사랑이 ‘함께’하는 아름다움을 분명히 전해주었다.

샘 옥 <lovely glow>

언제 어디에서 듣더라도 특정한 계절의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음악이 있다. 한국계 미국인 싱어송라이터 샘 옥(Sam Ock)의 음악에 귀 기울이면, 흰 눈이 포근한 이불처럼 소복소복 내려앉은 겨울 풍경 속에 있는 것만 같다. 그 덕분인지 유난히 겨울에 선보인 곡이 많지만, 지난해 이맘때쯤 공개한 EP <lovely glow>는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에서도 겨울 특유의 따뜻한 감성이 물씬 담긴 앨범이다.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드럼 등 간결한 구성의 악기 사운드가 빈티지한 톤으로 어우러진 트랙 위에서 샘 옥은 담백한 목소리로 말하듯이 노래한다. 너는 겨울의 달과 크리스마스트리의 별보다 빛나고(‘lovely glow’), 네 사랑이 겨울의 원더랜드라고(‘my present’).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만이 전부라 해도, 나의 집은 결국 당신이라고(‘you are my home’). 마치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쓴 일기처럼 진솔한 그의 노랫말은 이 계절의 추위를 서로의 온기로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한다.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애정을 듬뿍 쏟을 용기를 심어주는 음악이다.

양안다 <이것은 천재의 사랑>

타이피스트

지나온 삶 속에서 내 곁에 머물다 떠난 이들의 뒷모습을 생각하며 세운 철칙이 있다. ‘누구를 만나든 마음을 전부 주지 말 것.’ 그러다 우연히 마주한 양안다 시인의 신간 제목이 내게 물음표를 던졌다. 천재라면 과연 어떤 사랑을 할까? 책 머리에 수록된 시인의 말에서 싫어하는 것 중 하나로 ‘사랑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바보 천치’를 언급한 그는 곳곳에서 ‘불안’이란 단어를 자주 꺼낸다. 하지만 그 불안은 사랑의 ‘산물’이 아닌, 사랑하기 위한 ‘선택’임을 특유의 솔직한 언어로 귀띔한다.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못할 관계일지라도, 서로에게 깊이 빠져 허우적대더라도 기꺼이 사랑하겠다는 다짐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