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희미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음을 데운다.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과 영화, 음악, 사진을 모았다.
우리의 겨울이 보다 따뜻하길 바라며.

하태민 <süü>

하태민

인물이 카메라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자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사진이 있다. 이런 사진을 마주할 때면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잠시 나란히 머무는 순간, 완전한 타인과의 거리가 한순간 좁혀지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사진가 하태민의 사진집 <süü>는 이런 순간을 몽골의 광활한 평원 위에서 펼쳐 보인다. 2022년 몽골 중부 타리앗 지역으로 향한 그는 여전히 유목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가족들을 만나 계절이 변하는 동안 마을의 흘러가는 일상을 프레임에 담았다. 주로 동물과 풍경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인물에게로 옮겨갔다. 낯설지 않은 존재 앞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하루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차가운 날씨에 잔뜩 부풀어 오른 볼,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느껴지는 듯한 솜털, 블루베리를 쥔 작은 손가락,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따뜻하게 감싸는 빛.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않더라도 느슨한 실 같은 것이 사진가와 인물 사이를 내내 이어주고 있었을 것만 같다. 누군가와 연결되는 감각이 그리워질 때마다 다시 꺼내어 보고 싶은 장면들.

《2025 김유정신인문학상 수상 작품집: 겨울 정원》 중 이주란 <겨울 정원>

은행나무

이주란의 단편소설 <겨울 정원>은 언뜻 단순해 보이는 삶 아래에 깃든 복잡다단함,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헤아릴 수 없는 한 사람의 농밀한 슬픔을 우리에게 전한다. 예순 살 여성 ‘혜숙’의 삶은 매일 비슷하게 흘러간다. 간단한 도시락을 싸서 오전 7시쯤 집을 나서고, 청소 일을 마친 뒤에는 하루 중 가장 따뜻한 볕이 드는 시간에 집에 딸린 겨울 정원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제와 오늘을 구분하기 어려운 하루들을 살아내는 듯해도, 그 고요를 비집고 들어오는 사건들은 있다. 때때로 예고 없이 닥치는 수치와 슬픔 앞에서도 혜숙은 크게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더는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이와 함께한 시간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텅 빈 겨울 정원을 가꾸는 마음으로 가만한 일상을 지켜내는 혜숙의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각자의 겨울을 견디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혼자가 된 뒤에도 함께한 시간이 여전히 한 사람을 지탱해줄 수 있음을, 이별 후에 남는 것이 언제나 고립만은 아님을 이 소설이 말해주는 듯하다.

김사월 <5202>

음악가의 1집은 앨범이 나오기까지 거쳐온 세월을 전부 응축한 결과라고 한다. 1집 <수잔>을 만들던 당시의 김사월은 꺼내 보이기 부끄러운 자신의 세부, 지나온 날들의 아름답고도 불안한 경험들을 ‘수잔’이라는 가상의 젊은 여자를 화자로 내세워 기록하기로 한다. 1번 트랙에서 사월이 수잔을 소개하고, 이어지는 트랙부터는 수잔이 본인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준다. 매년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이면 <수잔>을 꺼내 들으며 생각한다. 음악가가 용기 내어 자신의 가장 내밀하고 연약한 부분을 곡에 담을 때, 그 곡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얻어 더는 원작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고. 올해는 <수잔>이 세상에 나온 지 10년째 되는 해다. 그사이 수잔의 이야기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위로받았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올해 초 열린 공연 <제12회 김사월 쇼: 수잔>의 라이브 실황을 담은 앨범 <5202>는 열 살을 맞은 수잔에게 지금의 김사월이 건네는 뭉클한 인사다. 김오키의 색소폰, 지박의 첼로, 이기현의 플루트 등 <수잔>을 함께 만든 익숙한 이름들, 그리고 김사월밴드가 모여 원곡에 가까운 사운드를 다시 재현했다. 듣는 이들에 의해 새롭게 쓰여왔고, 또다시 쓰여나갈 수잔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가올 4월을 기다린다.

오쿠야마 요시유키 <엣 더 벤치>

도키엔터테인먼트
도키엔터테인먼트

철거되기 직전의 공원에 낡은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이마저도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지만, 벤치에 대한 저마다의 추억과 사연을 간직한 이들이 이곳을 찾아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 이내 자리를 뜬다. 오랜만에 재회한 소꿉친구, 마트에서 사온 초밥을 까먹다 말고 이별을 말하는 연인, 노숙자가 된 언니를 찾으러 온 동생, 벤치 철거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관청 직원들. 서로 관계없는 인물과 상황이지만,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마치 같은 벤치에 앉아 있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의 감정에 가까이 가닿게 된다. 영화 내내 벤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서로 다른 삶이 잠시 맞닿는 작은 연극 무대가 된다. 해 질 무렵의 나른한 빛 아래 롱테이크로 담아낸 인물들의 표정에는 대화 사이사이를 스치는 머뭇거림과 망설임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극적인 사건 없이도 벤치 위에서 서로의 진심이 오갈 때 잠시 피어오르는 미세한 온기가 이 계절의 마음을 데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