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가 희미해지고 고립감이 깊어지는 시대, 우리는 여전히 함께일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연대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음을 데운다.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책과 영화, 음악, 사진을 모았다.
우리의 겨울이 보다 따뜻하길 바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


소박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하던 ‘유미코’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사별한다. 몇 년 후, 그는 재혼하여 새 가족이 사는 시골의 섬으로 향한다. <환상의 빛>은 돌연히 한 사람이 떠나간 후, 남겨진 사람의 시간을 비춘다. 그럼에도 살아지는 하루, 불현듯 밀려드는 질문과 고통까지 멀찍이 떨어져서 담아낸다. 유미코가 새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도, 처음으로 울음을 토해낼 때도, 그의 표정은 끝내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섬세함에 큰 위로를 받았다. 편하게 웃어도 되고, 때로는 울어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남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유미코에게 새 남편은 말한다. “아버지가 전에 배를 탔는데, 홀로 바다 위에 있으면, 저편에 예쁜 빛이 보인댔어. 빛이 깜빡거리면서 당신을 끌어당겼다는 거야. 누구나 그런 게 있지 않을까?” 누구나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산다고, 자신의 상처만으로도 버거울 테니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감정을 누르기에 급급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센 바람과 파도가 치던 유미코의 집 앞 바다에 마침내 따스한 빛이 드리운다. 함께 봄을 느끼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용기를 가져본다. 함께 봄을 맞는 이들을 보며 용기를 가져본다. 너와 나의 벽을 허물고 슬픔을 나눌 때, 가까워질 행복을 기대하며.
한강 <희랍어 시간>

과연 인간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대한 내 안의 답이 부정으로 굳어갈 때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을 만났다. 시력을 잃어가는 한 남자와 말을 잃은 한 여자. 이들은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으려 애쓰기보다 다른 감각에 기대어 타인을 헤아린다. 캄캄한 눈으로 편지를 쓰고, 말을 대신해 상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본다. 두 사람은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우며 마주한다. 안경을 놓친 남자가 어둠에 갇혀있을 때, 여자는 기척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침묵과 암흑 속에서도 서로를 느끼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잃어버린 것을 채워주기보다 그저 곁에 존재하는 것, 그것만으로 내가 지난날 삼켜온 슬픔이 당신에게 조용히 전해지고, 또 당신이 견뎌온 시간이 내게 와 닿을 때, 우리는 조금씩 외로움을 덜어가는 게 아닐까. 어떤 말과 잔상도 없이 서로를 위로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이 나눌 수 있는 진심의 힘을 믿게 한다.
키스 자렛 <The Köln Concert> 중 ‘The Köln, January 24, 1975, Pt. II A (Live)’
지난여름,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막연히 걷던 중 허름한 문을 발견했다. 비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가보니 그곳은 오래된 음악 감상실이었다. 작은 공간을 대형 스피커가 메우고 있었고, 벽면에는 CD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두 명의 손님이 나간 후 혼자 남았을 때, ‘The Köln, January 24, 1975, Pt. II A (Live)’가 흘러나왔다. 경쾌한 멜로디의 도입부를 지나자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격정적인 연주가 이어졌다. 황홀한 음악 앞에서 내가 안고 있던 고민이 아주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 충만한 경험은 내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키스 자렛의 1975년 쾰른 콘서트 라이브 앨범은 현재까지 재즈 솔로 앨범의 신기록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 공연이 시작을 앞두고 취소될 뻔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그는 당시 극심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준비된 피아노마저 음정이 심하게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밤, 자렛은 오로지 공연 기획자인 열일곱 살 소녀를 위해 무대에 올랐다고 회상한다. 고통 섞인 신음과 무거운 페달을 누르는 거친 호흡, 몸을 비틀어가며 두드리는 건반 소리까지 음악의 일부가 되어 보다 완벽한 즉흥연주로 울려 퍼진다. 이 곡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서로를 위한 마음이 모여 이룩한 기적 같은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