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을 한 창작자의 헤리티지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기준이나 기대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가장 뜨거운 마음으로 완성한 첫 작품,
그 안에는 여전히 확장을 거듭하는 세계의 단단한 기반을 비추는 단서가 남아 있다.
영화, 음악, 문학의 영역에서 각자의 언어로 시대를 통과해온 창작자 21인이 자신의 처음과 연결된 물건과 기억을 건넸다.
한 시절을 온전히 바친 기록, 처음이기에 가능했던 선택이 그 안에 담겼다.
세상에 건넨 첫 선언, 그 선언과 함께 하나의 세계가 열리기 시작하던 순간.
시인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슬픔이 없는 십오 초> 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 까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득하고 아련한 옛 시절에 대한 이야기. 이제는 첫 시집을 다시 읽는 시간적 간격이 점점 늘고 있다. 차분히 앉아 정독한 지도 오래됐다. 사무치게 그리울까, 두렵고 그렇지 않을까 싶어 두렵다. 그저 바라보는 게 더 좋은 책이다.
처음의 장면 꽃집에서 고양이가 꽃잎을 뜯어 먹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그 꽃집이 있던 길모퉁이에 서서 주위를 바라보던 순간, 시를 쓰고 싶어졌다. 그날 밤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종이를 펼치고 시 한 편을 완성했다. 그 작품이 첫 시집의 표제작 ‘슬픔이 없는 십오 초’다.
첫 작품이 남긴 것 등단 14년 만에 첫 시집이 나왔다. 시 쓰지 않느냐고 묻던 친구들에게 시를 쓰지 않겠다고, 나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니라고, 나를 시인이라 부르지 말라고 괜한 역정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새, 어느 늦은 밤 시를 끼적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 끼적임이 모여 첫 시집이 되었다. 이후 시에 대해 늘 경건한 마음을 품고 있다. 지금껏 내가 시를 돌보거나, 시가 나를 돌봐줬다. 앞으로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변하지 않은 것 작품의 질보다 중요한 건 작품에 임하는 태도라고 생각하고, 그걸 기준으로 글을 쓴다. 하지만 내가 그 기준을 항상 충족하며 썼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쓴 글을, 시와 시 아닌 모든 글을 아끼지만 그걸 쓰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태도가 즐겁건 슬프건 진지하건 가볍건 글을 쓸 때의 내 영혼이 얼마나 깨어 있었나를 따지게 된다. 그러니 잘 모를 수밖에.
그때의 나에게 첫 시집을 내고 어머니가 내게 한 말을, 이제 내가 나 자신에게 한다. “애썼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