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나 작가는 큰 눈을 가진 당돌한 소녀 ‘나나’와 함께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것. 그리고 매 순간 진심을 다할 것’이라는 다짐을 담아.

작가의 일상 공간인 작업실에서 개인전이 열린다니 흥미롭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하는 전시보다는 재미있고 나다운 것을 하고 싶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친구들과 파티를 하는 느낌으로.(웃음)

작가가 생각한 ‘나다운’ 전시란 어떤 것인가?

사실 나는 ‘작가님’보다는 ‘대장님’ 같은 사람이다.(웃음) 삶이 작업과 운동으로만 이뤄져 있어 주로 운동복을 입고 생활하는데, 이런 내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전시장에서 격식을 차린 채 인사할 때마다 나답지 못하다고 느꼈다. 이번에는 평소 시간을 보내는 곳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두 팔 벌려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이번 개인전의 특징을 꼽는다면 무언가?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든 과정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지금까지 선보인 페인팅 작품뿐 아니라 작업의 바탕이 된 드로잉이나 일기까지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펼쳐두었다. 전시하는 동안 작업실에서 그림도 그릴 예정이라 내가 작업을 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는다면?

‘감사’가 아닐까 싶다. 지난 2년간 아트 페어를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전시하며 많은 분을 만났다. 나를 응원해주던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역시 가장 자신 있는 건 그림이었다.(웃음) 겨울에 어울리는 따뜻한 작품 위주로 준비해 고마움과 위로를 전하는 포근한 연말 분위기를 내려 했다. 미술뿐 아니라 음악과 음식, 좋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시간을 기대했다.

권하나, ‘프레즐녀’, oil and oil pastel on canvas, 27.3×34.8cm, 2023

권하나 작가의 작업 세계에 대해 말할 때 나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나는 작품마다 새로운 모습을 한 채 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등장한다. 어떤 방식으로 그 서사를 구축하나?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그림의 소재가 된다. 이를테면 열심히 운동한 뒤 삼겹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삼겹살을 러닝머신 레일처럼 만들어 그 위를 뛰고 있는 나나를 그렸다. 또 실제로 술과 담배를 즐기진 않지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해 화가 치솟던 날에는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술잔을 깨고 담배를 피우는 나나를 만들기도 했다.(웃음) 결국 내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 나나의 서사가 된다. 모든 작품이 실화를 기반으로 한달까.(웃음) 또 내 작품에는 음식이 많이 등장한다. 내게 음식은 단순히 먹는 무언가가 아니라 그와 연관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다. 누군가와 피자 한 조각을 먹더라도 그때만의 고유한 기억이 있기 마련이지 않나. 음식을 매개로 그 순간을 그림으로 기록해두면 나중에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을 복기할 수 있다.

나나는 어떻게 탄생했나?

어릴 때부터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낙서처럼 그림 일기를 그렸는데 그때 처음 등장했다. 과거에 미국에서 10년 넘게 살았는데, 그 시절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이 심해 우울증을 앓았다.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을 친구조차 없어 나나를 만들어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분신 같은 존재이자 절대 배신하지 않을 가장 소중한 친구다.

‘나나’라는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나는 나야. 그래서 행복해’라는 뜻을 담았다. 나나는 통통하고 키도 작고 얼굴도 넓적하다. 보편적인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지만 그 누구보다 당당하다. 나는 한때 외모에 대한 강박 때문에 극단적으로 감량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스스로 뚱뚱하다고 생각했고, 온종일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더라. 내가 나를 미워하는데 누가 나를 예뻐하겠나.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고 건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자신을 인정하고 또 긍정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나를 만들고 있다.

창작 과정이 작가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되었을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성격이 급하고 표현이 분명한 편이다. 화가 나면 화내야 하고 기쁘면 크게 웃어야 하는데, 종종 이런 내 성격을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다.(웃음) 그런데 그림에 나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니, 그 감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그 덕분인지 작품을 본 뒤 나와 유사한 감정을 느끼거나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이 위로받는 경우가 많았다. 또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이 그림의 소재가 되다 보니 주어진 시간을 더 잘 쓰고 싶어진다. 흘러가는 순간을 잡아둔 뒤 꺼내 볼 수 있다는 점도 커다란 기쁨이다.

많은 이들이 권하나 작가의 작품에 공감하는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아주 솔직하기 때문에. 내가 가진 감정과 생각을 가감 없이 그림 안에 담는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나나를 보고 잊고 있던 생각이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하다. 사회는 언제나 빠르게 돌아가고 우리는 늘 바쁘다. 그런 까닭에 내가 뭘 원하고 어떤 사람인지 종종 까먹는다. 자신감이 부족해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기도 하지 않나. 내가 그림을 통해 억압된 것을 대신 꺼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리 만족이랄까.(웃음)

30년이 넘도록 그림을 그리고 있다. 꾸준히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사실 나는 작가, 선생, 화백 같은 그럴듯한 호칭으로 불리기보다 나의 그림에 공감하는 이들과 우리의 세상을 만들고 싶다. 마치 월트 디즈니의 디즈니 월드처럼.(웃음) 그림을 그리는 건 내게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작품을 비싼 금액에 팔고 난 뒤 스스로에게 행복한지 물었을 때, 솔직히 그냥 그랬다. 누가 내 작품을 계속 팔아주면 기계처럼 팔리는 것만 그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내 작품을 본 뒤 좋은 피드백을 주고 공감해줄 때 받는 에너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감상자들의 진심 어린 말들은 더 좋은 그림을 그려서 기쁨을 전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게 만든다.

한국 추상미술 1세대인 권옥연 화백과 무대미술가 이병복 선생의 손녀로도 알려져 있고, 부모님 또한 음악가다. 이러한 성장 배경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

전시나 연주회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렇기에 삶이 예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분들의 열정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매일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그런 모습을 닮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열 살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고 강조하셨고, 할머니는 “너만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그리고 그 일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지금은 두 분 모두 돌아가셨지만, 늘 그 말을 되뇌며 작업하고 있다. 두 분이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대충 거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작가가 그림 안에서 솔직할 수 있는 또 다른 동력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그 시간을 인정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대화를 나누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맞다. 오늘은 어차피 주어졌다. 그러니 무조건 즐기는 사람이 승자다. 나는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싫다. 내게는 창작이 희열을 주기 때문이다.(웃음) 고통을 느끼며 그림을 그린다면 그걸 보는 사람들도 힘들어하지 않을까? 내 삶의 주인공은 나고, 나는 언제나 내가 가장 중요하다. 본인에게 솔직하고 본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것, 그리고 매 순간 진심일 것.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들을 나나를 통해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