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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스타일 다이어리 #02 여름밤의 꿈, 디네 앙 블랑

샐리의 법칙은 몰라도 머피의 법칙은 있다.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다. 내내 화창하다가도 소풍날이 되면 비가 오고, 내일 체중을 재야 하면 오늘 저녁엔 삼겹살 먹을 일이 생기고. 참석자 전원이 흰옷을 입고 야외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는 ‘디네 앙 블랑(Diner en Blanc)’ 행사가 전 세계 65개 도시를 거쳐 마침내 서울에서 열리게 되었을 때, 기대에 부푼 나를 시샘이라도 하듯 불운과 악재의 기미는 여지없이 몰아닥쳤다.

우선 인터넷으로 주문해둔 블라우스가 사진으로 볼 때와 색감이 달랐다. 흰색이 아닌 아이보리색인 거다. 한숨을 쉬며 마뜩잖은 옷장을 한번 보고, 주최 측이 보내준 복장 규정을 또 한번 보고. 순수한 흰색이 아니면 아이보리도, 베이지도, 크림색도 안 된단다. 반바지와 스포츠 의상과 칼라 없는 캐주얼 티셔츠도 금지. 흰옷이면 다 허용된다지만 행간의 숨은 의미는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있는 힘껏 격식을 차려 제대로 잘 차려입고 오란 소리가 분명했다. 하지만 나로선 이제 코스(COS)의 평범한 흰 티 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신 밑단에 꽃 장식이 달려 움직일 때마다 찰랑찰랑 소리를 내는 쿠튀르적인 스커트로 시선을 좀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테이블에 앉아 상의만 보일 땐 역시나 문제 되지 아닐까. 그렇다면 주얼리와 액세서리가 도와야 할 차례. 진주 귀고리와 반지에, 주먹만 한 장미 코르사주도 팔찌처럼 둘렀다. 마지막으로 비즈가 잔뜩 장식된 하얀 머리띠를 꺼내 예약했던 단골 미장원으로 출발하려는데, 아뿔싸! 진짜 사고는 신발에서 일어났다. 몇 번 신지도 않은 플랫폼 샌들 한쪽이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이대로 신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오줌 마려운 절름발이 염소처럼 낑낑댈 게 분명했다. 하는 수 없이 예약을 미루고, 눈썹이 휘날리도록 차를 몰아 쇼핑을 하러 갔다.

사이즈도 모양도 적당한 흰 신발이 딱 하나 눈에 띄었다. 예정에 없던 큰 지출이지만, 그래도 다행히 여름 세일 기간이니까. “할인하면 얼마예요?” “손님, 로저 비비에는 브랜드 특성상 세일 제외 상품이라….” 오 노! 제발 내게 이러지 마…. 순백의 만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밀려오는 포기의 충동을 겨우 참아가며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데… 후드득, 이번엔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진다. 설마 이건 비? 그럴 리가, 분명 좀 전까지 해가 쨍쨍하고 무더웠는데? 부랴부랴 시간대별 일기예보를 찾아보았다. 폭우, 흐림, 폭우, 흐림…!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맹렬한 소나기가 몰려와 차 지붕을 뚫을 기세로 쏟아져 내렸다.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서 나는 ‘폭우’와 ‘흐림’이 어느 정도 간격으로 반복될 것인지 가늠해보려 애썼다. 취소하기 미안해 결국 미장원까지 가긴 했지만, 어차피 젖은 생쥐 꼴이 될 거라면 머리를 만져서 무엇하나. 아니 행사에 가서 무엇하나. 자신이 응원하면 무조건 그 팀이 지기 때문에 애국하는 마음으로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지 않는다는 친구가 떠올랐다. 지금 하늘이 혹시, 디네 앙 블랑에 내가 참석해선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는 건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백의민족 DNA를 물려받은 내게는 흰옷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옷뿐이 아니다. 카메라도, TV도, 흔들의자도, 스탠드도, 우리 집에 있는 건 우연처럼 다 하얀색 아닌가. 달항아리를 좋아하고 디터 람스를 흠모하며 이우환의 <여백의 예술>과 하라 겐야의 <白>까지 열심히 읽은 내게 흰색은 이미 스타일을 넘어 정신의 영역에까지 이르는 취향인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흰옷의 파티를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다니…. 역시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비를 쫄딱 맞더라도 일단 가고 보는 거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포기 안 하길 정말 잘했다. 머리 손질이 끝났을 땐 기적처럼 하늘이 깨끗하게 갰고, 멋지게 성장한 남녀들이 가득한 파티장은 그 자체가 잊을 수 없는 장관이었다. 참가자들이 각자 준비해온 화이트 테이블은 또 어찌나 로맨틱하고 예쁘던지. 하얀 장미와 하얀 풍선과 하얀 와인과 하얀 불꽃이 물결을 이루었던 강변의 저녁, 스타일리스트 서정은 부부와 나란히 앉아 연신 잔을 부딪으며 서늘한 여름밤을 마음껏 자축했다. 다시 소나기가 몇 분 정도 스쳐갔지만, 정은이가 준비해온 두 개의 투명 우산을 펼쳐 드니 그 자체가 더 멋진 스타일링이었다. 아, 이런 거였구나…. 꿈 같은 여름밤이었다. 뒤풀이로 근처의 치킨집에서 맥주를 들이켜며 벌써부터 내년 계획을 신나게 세우고 있는데, 이번엔 홍수에 가까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날씨 한번 기가 막히다. 어쨌든 내년엔 오늘처럼 피 말리는 상황을 만들지 말아야지. 무엇보다 튼튼하고 넓적하고 비 맞을 걱정이 전혀 없는 새하얀 캐노피를 준비해갈 테다. 포기는 없다. 어디 한번 해보자, 머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