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흐름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레트로와 모던 그리고 두 카테고리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며 흔히 ‘세기말’이라는 놀림 섞인 속칭으로 불리는 어떤 집단. 뉴 밀레니엄이 시작되기 직전인 패션・문화적 과도기에 유행한 아이템들이 대체로 여기에 속하는데, 얼룩덜룩하게 워싱된 ‘돌청’ 팬츠부터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카고 팬츠, 그 시절 할리우드 셀럽들이 자주 쓰던 빵모자, 두꺼운 곱창 밴드와 나팔바지, 다리를 한껏 짧아 보이게 만들던 6부 바지, 버스 손잡이라 놀림받던 링 귀고리와 은갈치(!) 수트 등이 대표적인 예다. 누구나 어린 시절 한두 번은 입어봤을 것들이기에 20~30년 만에 돌아온 세기말 패션 열풍은 유독 반갑게 느껴진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패션을 주축으로 하는 새 시즌의 트렌드는 당연하게도 런웨이에서 시작됐다. 비비드한 색감의 스크런치 타이(곱창 밴드)와 웨이스트 체인, 카고 팬츠를 등장시킨 발렌시아가를 필두로 아크네 스튜디오와 르메르가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트로피컬 컬러와 복고적인 날염 하와이안 셔츠를 선보였고, 몽클레르는 무용을 테마로 레그 워머(발토시)와 볼레로 스타일의 쇼트 재킷을, 스텔라 매카트니와 퍼블릭스쿨은 각각 아이스 워싱과 그러데이션 워싱의 데님 제품을 내놨다. 이 밖에 디올은 레트로 룩에 메시 장식을 덧댄 푸어 보이 햇(빵모자)을, 자크뮈스는 심플한 드레스에 목가적인 두건을 매치했으며, 이치아더는 메탈릭 실버 컬러의 은갈치 수트를 탄생시켰다. 이에 질세라 리한나와 카라 델레바인, 벨라 하디드 등 런웨이와 리얼 웨이 사이의 매개 역할을 자청하는 셀러브리티들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세기말 스타일로 드레스업 한 사진을 업로드하며 유행의 전파에 힘을 보탰다.
세기말 트렌드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유행은 없다는 패션계의 진리를 상기시킨다. 그러니 옷장을 열고, 오래도록 입지 않은 옷을 전부 꺼내 세탁기에 넣은 후 세기말의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를 틀어 다시 봐도 쿨한 캐리 브래드쇼의 스타일을 감상해보길. 이번 시즌 힙해지기 위해선 촌스럽다고 여기던 것을 다시 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