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패션 사이의 합의점을 찾아내는 것.
이제는 모두가 당면한 문제이자 모두에게 당연한 과제다.
어떻게 살 것인가
패션이라는 세계 안쪽의 시간은 밖보다 빠르게 흐른다. 어제 무명이던 것이 오늘 모두가 손에 넣고 싶어 하는 이름이 되고, 한동안 신처럼 떠받들던 트렌드가 하루아침에 헌신짝 신세로 전락한다. 패션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면 그 생애 주 기는 시즌이나 월, 심하게는 일 단위로 셈해야 마땅할 정도다.
언뜻 보아도 어지러운 이 흐름에 그간 패션계는 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유행이 숨 가쁘게 지나갈수록 하우스는 ‘신상’이라는 임시 왕관을 씌운 물건을 자주 생산할 수 있고, 패션 인플루언서는 그 왕관을 재빠르게 손에 넣음으로써 보통 사람들과 스스로를 구별 지을 당위성을 얻으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판세가 달라졌다. 모두가 쉬쉬하던 환경문제, 특히 하루가 멀다 하 고 바뀌는 트렌드가 야기하는 과도한 생산과 폐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 이다. 쇼장 앞에서 종종 벌어지던 환경보호 단체의 피켓 시위를 ‘으레 그런 일’ 쯤으로 치부하던 패션계의 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책임을 논하기 시 작했고, 패션이 지구에 얼마나 큰 위해를 가하고 있는지는 연일 수치화되며 대 중에게 럭셔리와 패스트 패션을 혐오할 명분을 안겼다. 이 변화무쌍한 세계에 서 지난 수년간 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헤드라인을 차지하고 있으니, 자연스레 지속 가능성에 대한 기업의 기여도는 브랜드 평판을 좌우하는 시금석 역할을 도맡게 됐다.
결국 유수의 패션 브랜드는 지속 가능성 이니셔티브라는 과제에 집중하게 됐다. 매초마다 2.6톤에 달하는 옷이 전 세계에서 소각되거나 매립되고 있다는 영국 자원 순환 단체 엘런 맥아더 재단의 보고나 위성에서 포착한 칠레 사막의 헌 옷 산 사진이 소비자의 지갑을 닫게 만드는 방향으로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 다. 의식 수준이 높은 소비자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대다수 브랜드와 환경보 호에 진심으로 경각심을 갖게 된 일부 브랜드는 앞다투어 지속 가능한 패션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재밌는 부분은 그 안에서도 트렌드가 존재한다는 점인데, 이를테면 초창기에 는 포장용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는 정도의 소극적 수준이 주를 이뤘다면 최 근에는 버려지는 옷에서 재사용 가능한 원사를 추출하거나 옷을 해체해 새로 디자인하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특히 패스트 패션 브랜드 사이에서 이런 방향성이 인기를 끌었다. 일례로 H&M은 2014년부터 폐기되는 의류로 새 제품을 만드는 ‘클로즈-더-루프’ 컬렉션을 선보이며 의류 폐기량을 대폭 감 축했으며, 올해 발표한 2022 지속 가능성 통합 리포트에서는 당해 만든 상업용 제품 중 리사이클 또는 다른 지속 가능한 소재를 사용한 제품이 84%에 달한다고 밝혔다. 유니클로 역시 소비자들에게 지속 가능성 확보를 위한 기업의 관심 을 알리기 위해 헌 옷을 가져가면 리폼해주는 ‘리유니클로 스튜디오’ 서비스를 론칭하고 일부 국가에서 운영 중이다. 또한 지난달 도쿄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일반 폴리에스터 대비 리사이클 폴리에스터 사용량이 전년에 비해 14% 증가 했고, 2030년까지 모든 제품의 절반을 리사이클 소재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이 밖에 망고는 코오페라 리사이클링 센터를 운영해 중고 의류를 수거하며, 자라는 모다 리 유럽 의류 재활용 프로그램과 손잡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펼치는 중이다.
이 같은 패스트 패션 그룹의 행보는 이들이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한계를 나름 대로 결자해지해 오명을 벗으려는 의도로 해석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분 투가 패스트 패션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재고 의류를 해체해 새로운 아이템으 로 탄생시키는 코오롱의 업사이클링 브랜드 래코드나 핀란드에 위치한 리사이 클 업체를 통해 수명이 다한 티셔츠를 새것으로 바꿔주는 ‘테이크백’을 포함해 여러 의류 순환 프로그램을 전개하는 파타고니아처럼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 구를 위하고, 소비자에게도 선한 의도와 높은 품질의 의류를 전하는 사례가 적 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화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구가 유행은 차치하더라도 자기표현 수단으로서 ‘의’를 중시한다는 점을 돌이켜보면, 이러한 브랜드는 지 구에 미안함을 덜 갖게 하는 동시에 옷이 주는 가치를 누리고 싶은 소비자에게 는 단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이 같은 추세에 긍정적인 반응만 따르는 건 아니다. 세계 각지에 모인 옷을 항공편으로 실어 나르거나 원사 단위로 분해하고 가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탄소가 배출되고 화학약품이나 물이 과도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또 천연섬유와 합성섬유가 섞인 직물이나 금속이 부착된 직물은 재 활용이 거의 불가능한데, 앞서 언급한 프로그램에 옷을 기증하는 소비자들이 이를 제대로 구분하기 어려워 결론적으로 폐기 수순을 밟게 된다는 지적도 분 분하다. 국제 비영리 환경보호 단체인 그린피스의 설명에 따르면 재활용한 재 료로 만든 물건은 대체로 업사이클링이 아닌 다운사이클링이 된다. 다시 말해 기존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는 뜻이며, 완전히 새롭게 생산하는 일에 비해서 는 덜 해로우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결국 담론은 원점으로 돌아선다. 넘치게 만들지 말고, 이미 만들어진 것은 어떻 게든 버리지 말자는 것. 다양한 국가적, 개인적 차원의 움직임이 이를 뒷받침한 다. 2020년 의류 재고 폐기 금지법을 제정하고 2023년 10월부터 의류와 신발 을 수선할 때마다 지원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시행한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국가와 우리나라에서 이미 의류나 산업 폐기물을 규제하자는 논의가 일 었다. 또한 ‘가장 지속 가능한 옷은 이미 옷장에 있는 옷입니다’라는 슬로건을 필두로 안 입는 옷 교환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수선 공모전을 여는 등 다시 입 기의 중요성을 적극 설파하는 ‘다시입다연구소’라는 이름의 국내 민간단체가 등장했고, 기후 위기와 새 옷 없는 삶에 대한 자전적 내용을 담은 책 <옷을 사지 로 않기로 했습니다>(이소연)는 출판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며 이러 한 일이 비단 소수의 관심사가 아님을 증명했다.
무조건 사지 말자는 입장을 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군가에게 패션은 그 저 사치재이며 환경오염의 주범에 불과할 테지만, 패션 월드에는 자유나 해방, 인간 존엄과 얽힌 유구한 역사나 기계화된 사회에서 전통을 지키고자 애쓰는 장인, 옷을 인체라는 프레임 너머의 예술적 경지로 확장하려는 쿠튀리에, 에디터나 디자이너를 포함해 이 산업에 생사를 기댄 직업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패션 자체를 향유하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살아 숨 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패션을 향한 애정과 갈증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해소해야 할까?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여도 이 짧은 지면에서 향후 50년, 1백년 간 이어질 논의의 정답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다만 이토록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쥐어짜낸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최소한의 개인적 가이드라인은 이렇다. 무분별하게 유행에 휩쓸리는 대신 취향에 맞는 장르를 취사선택할 것. 평생 입어도 될 만큼 잘 만든 옷을 택할 것. 적어도 자연에서 오고 자연으로 돌 아갈 수 있는 소재를 고를 것. 적게 사고 덜 버릴 것. 모두가 단숨에 완벽한 환경 주의자로 거듭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를 가지리라 믿어보면서. 또 작고 사사로운 선택 하나가 내일 세 상에 나올 옷의 한 땀 정도는 바꾸리라 희망하면서.